내가 거들떠보지도 않았건만 그 남자는 자기와 술을 같이 나누자고 끈덕지게 내게 청해왔다.
형씨, 이쪽으로 와서 한잔만 같이 나누자구요. 딱 한잔만 같이 듭시다 글쎄.
그의 말투가 이번에는 거의 애원하듯이 들렸기 때문에 부득불 나는 그 남자의 청에 응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대체 이런 장소에서 전혀 알지도 못하는 상대방에게 저토록 끈덕지게 술을 권하는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 나는 무엇보다 이 사실이 궁금했다.
장충단공원의 숲은 석양녘의 어스름이 시작할 때여서 주위에는 사람의 흔적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숲에서 약간 떨어진 넓다란 공원의 공지에서는 공원 주변의 아이들이 늦게까지 공을 가지고 뛰어놀고 있었고, 공지 변두리의 긴 의자에는 몇쌍의 젊은 연인들이 다정하게 붙어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으나 이 숲 쪽으로 다가오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이렇게 한적하고 어둑어둑한 숲속의 잔디밭 위에 그 남자는 혼자 덩그랗게 앉아서 연거푸 술잔을 들이켜며 이따금 내가 앉아 있는 쪽을 흘끔흘끔 쳐다보았다.
나는 벌떡 일어나서 그 남자의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종이컵에 소주를 가득 따르더니 대뜸 그 잔을 내 앞으로 쑤욱 내어밀며 말하였다.
잘 오셨소. 정말로 잘 오셨다구! 형씨께서 날 구해주시는구먼. 자, 인사는 뒤로 미루고 우선 한잔 드신 다음 잔을 돌리시구려.
그가 건네준 술잔을 단숨에 들이켠 다음에야 나는 그 남자의 맞은편 자리에서 엉거주춤 주저앉았다. 그 남자가 땅콩과 구운 오징어 조각들이 놓여 있는 신문지를 내 앞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나는 잔을 다시 채워서 그 남자에게 돌려주고 그가 그 잔을 마시는 사이에 얼핏 그 남자의 형색을 살펴보았다.
그는 검정색 새 양복을 말쑥하게 차려입었고 머리도 단정하게 빗질이 되어 있으며, 그 남자의 옆에는 꽤나 커다란 트렁크가 한 개 놓여 있었다. 얼핏 보아 그의 행색은 이렇게 한적한 저녁나절 공원에서 혼자 술이나 마시고 있기에는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는 그런 차림이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그 남자가 불쑥 나에게 물어왔다.
여기 장충단 쪽에는 자주 나오시오?
아니오. 어쩌다가 오늘 들렀지요. 신촌에 집이 있기 때문에 신촌을 가느라고 버스를 탔는데 그게 약수동으로 와버렸소. 내가 버스의 행방을 착각한 탓이죠. 그래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공원이나 들러보자 하구 찾아왔지요. 정말 서울에서 수십 년을 살아왔지만 공원에 오는 건 처음이죠. 매일 쫓기면서 살다보니 이 도시에 공원이 어디 붙어 있는지, 그것도 모를 지경이죠.
그래 어쩐지 낯이 익지 않은 사람 같다고 생각했지요. 여기 자주 나오는 사람들 얼굴은 서로 잘들 알고 있으니까.
형씨는 그럼 이 공원의 단골이시오? 그렇게는 보이지 않는데.
나야 단골이구 말구요. 비오는 날만 빼놓으면 거의 매일 나와서 이 공원에다 엉덩이를 붙이고 여기서 살다시피 한다구요. 우리야 어디 갈 데가 따루 없으니까요. 실직자, 무직자, 늙어서 아무도 상대해주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여기 단골이죠. 시민의 공원이 무직자들의 소굴 아니 천국이 되어버린 거죠. 허허허허.
그 남자는 벌써 취하기 시작한 탓인지 초면의 상대 앞에서 실례가 될 만큼 실성한 사람처럼 큰소리로 마구 웃어제꼈다.
그렇다면 저 트렁크는 뭡니까? 그리고 형씨는 매일처럼 이렇게 정장을 하고 다니시오?
나는 이윽고 줄곧 혼자서 궁금하게 여기던 문제를 그 남자에게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