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떠날 것을 확실히 작정하고 있었다는 듯이 말했다. 약주병 바닥이 거의 드러났을 때 부엌 쪽에서 인기척이 났다. 영자가 먼저 발딱 일어서더니 부엌 쪽에 달린 조그만 장지문을 열어젖혔다.
언니야? 캄캄한 부엌을 향해 그녀가 소리쳤다. 응. 부엌에서 여자의 대답소리가 들렸다. 손님이 왔어, 언니. 영자가 다짜고짜 이렇게 말했다. 누군데? 부엌에서 여자가 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영자가 잠깐 동안 뭐라고 대답할 바를 모르고 머뭇거리다가 그냥 어떤 남자라고만 말했다. 미란이 자냐? 여자는 이렇게 묻고 미란이를 자기에게 데리고 오라고 영자에게 말했다. 영자가 벌써 방바닥에서 잠자고 있는 미란이를 안아 일으키려고 하자 민섭씨가 부엌을 향해 소리쳤다.
영애야, 너도 알 만한 손님인데 들어와도 괜찮다.
그러나 영애는 들어오지도 않고,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마테오가 다시 자기 누이더러 추운데 그만 들어오라고 말했으나 역시 부엌 쪽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러자 마테오가 일어서더니 부엌으로 갔다. 그런 뒤에 한참동안 부엌에서 마테오가 누이에게 수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필경 손님인 나에 관해서 얘기하고 있는 것 같았다.
영애는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마테오가 나에 관해서 설명해준 뒤에도 그녀가 방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것을 보고 나는 그것을 깨달았다. 마테오가 혼자서 방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나는 벌떡 일어서서 부엌으로 통하는 조그만 장지문 앞으로 갔다. 이미 약간의 취기가 전신에 오른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영애가 나를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내 마음을 들뜨게 만들었다.
내가 장지문을 열어젖히자, 부엌 바닥에서 미란이를 안고서 쭈그리고 앉아 있던 그녀는 화들짝 놀라 벌떡 몸을 일으켰다. 캄캄해서 영애의 얼굴은 물론 알아볼 수 없었다. 영애야! 내가 소리를 낮추어 부르자, 영애는 엉겁결에 부엌문을 박차고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나는 맨발로 부엌바닥에 뛰어내려 그녀가 방금 열고 나간 부엌문을 통해 바깥으로 나왔다.
짓궂게도 뒤쫓아오는 나의 발소리를 듣고 영애는 집 뒤란으로 마구 달아났다. 이미 밤이 되어버린 야산의 언덕바지 위에로 매운 바닷바람이 쉬익쉬익 소리 내며 불어왔다. 영애는 몸을 감추려고 뒤란의 헛간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나는 한달음에 헛간까지 뛰어가서 헛간 입구에 멈춰섰다.
깜깜한 헛간 속을 기웃거리면서 나는 마치 매일 만나는 사람을 부르듯이 소리를 낮추어 다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이때 잠을 깬 미란이가 헛간 구석에서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나는 취기에서 퍼뜩 깨어나 헛간 입구에 선 채 어쩔 줄 모르고 쩔쩔맸다.
그만 들어가시지요.
어느새 다가온 마테오가 나를 돌려세웠다.
그날 밤 영애는 끝내 내 앞에 나타나주지 않았다. 나는 가슴이 갑갑해서 방안에 갇혀만 있을 수는 없었다. 밤바람이 몸에 해롭다고 민섭씨가 말렸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마테오를 데리고 바깥으로 나왔다.
우리들은 가파른 언덕 비탈을 조심조심 내려와 부락 입구에서 시작되는 저수지의 제방 위로 올라섰다. 이 제방 길은 일 킬로 가량이나 일직선으로 뻗어 있는데, 그 끝에는 저수지의 수문이 있고 수문에서 다시 왼편으로 꺾어져 일 킬로쯤 더 나아가면 자동차가 다니는 도로가 있었다. 양일부락 사람들은 이 제방 길을 읍내로 나가는 통로로 이용하고 있었다. 길을 걷기에는 주위가 너무 어두웠고 해안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냉기가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어디까지 가실 건가요?
외투도 입지 않고 마테오가 벌써부터 몸을 와들와들 떨면서 물어 왔다.
염전까지 나가보자. 한 시간이면 돌아올 수 있겠지.
나는 되도록이면 멀리까지 나가보고 싶었다. 나의 말에 마테오는 깜짝 놀랐다. 녀석은 추위도 추위지만 해안을 경비하는 초소들 때문에 밤에는 해안 가까이 접근하는 것이 몹시 위험한 노릇이라고 말했다. 마테오는 다시 오늘밤 공소에서 모임이 있기 때문에 빨리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하는 수 없이 우리들은 제방 길을 몇 번이나 오락가락했다. 제방 길에는 인적이 전혀 없었고, 다만 왼쪽 저수지의 수면 위에서 여태껏 이곳을 떠나가지 않은 철늦은 물오리 몇 마리가 날개로 수면을 찰싹찰싹 때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테오는 목을 잔뜩 움츠리고 끌려오듯이 어슬렁어슬렁 내 뒤를 따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