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어 살쯤 되어 뵈는 계집아이가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아서 채소를 다듬고 있다가, 우리들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는 놀란 눈초리로 민섭씨와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우리가 그녀의 곁으로 다가설 때까지 일손을 놓고 우리를 물끄러미 쳐다보고만 있었다.

 

여기가 내 집이오.

 

민섭씨가 가리키는 집은 마치 토인의 움막처럼 낮게 내려앉아 있는 흙벽집이었다. 민섭씨는 그게 자기 집이라는 사실을 밝힌 것이 조금 부끄러운지 슬쩍 고개를 돌리고 바다 쪽을 바라보았다. 잡목이 무성한 야산을 등지고 언덕의 비탈에 자리잡고 있는 이 가옥은 양일(陽日) 부락에 와서 내가 보았던 어떤 가옥보다 더 초라했고 더 적적해 보이는 집이었다.

 

지붕을 덮은 볏짚은 이미 몇해째나 되었는지 삭을 대로 삭아서 풀썩 주저앉아버렸고, 투박한 흙벽 주변에는 산에서 굴러내린 잡석 조각들이 멋대로 뒹굴었다. 거기에다 저녁나절의 산 그림자가 언덕바지 일대에 드리워져 이 외딴 가옥의 풍경을 더욱 을씨년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이렇게 찾아주시리라고는 꿈에도 몰랐거든요.

 

민섭씨는 방금 언덕바지 아래서 처음 만났을 때 했던 말을 다시 되풀이했다. 그제서야 나는 민섭씨의 눈언저리에 술기운이 번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약간 뚱뚱한 그의 몸에서도 술 냄새가 확 끼쳐왔다. 그는 마당 가운데 엉거주춤 서서 초점이 흐린 눈으로 한동안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갑자기 어린아이처럼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아, 이제 또 생각나는데요. 그 당시 큰 부채를 만들어가지고 부친께서 점심 자실 때 부쳐드리던 아드님이죠. 이제 누군지 확실히 알겠군. 그 사실은 작고하신 댁의 부친께서 늘 자랑하셨으니까 알지, 그렇지 않으면 도무지 몰라요. 서로 이웃간이었지만 댁은 얼굴 보기가 힘들었으니까.

 

그런데 어떻게 이곳으로 옮기셨지요?

 

나는 아까부터 내심 몹시 궁금했던 사실을 불현듯 물었다. 그의 집을 찾느라고 나는 한참동안 부락을 헤매고 다녔는데, 부락사람들 중에서 민섭씨가 옮겨간 곳을 알고 있는 사람을 좀처럼 만날 수가 없었다.

 

이 마을 공소(公所)가 어디로 옮겼습니까?

 

부락사람을 만날 때마다 나는 다짜고짜 이렇게 묻곤 했다.

 

공소라니, 그런 건 처음 듣는 소리요.

 

어떤 사람은 도리어 묻고 있는 내 얼굴을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보기도 했다. 염전에서 돌아오는 민섭씨와 부락의 입구에서 우연히 마주치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길로 양일부락을 떠났을는지도 몰랐다. 민섭씨는 내가 묻는 말에 얼핏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갑자기 표정이 굳어진 채 잠시 고개를 떨구고 있더니 전혀 엉뚱한 대답을 했다.

 

그러니까 여기서 벌써 팔 년째 넘기고 있지요.

 

우리가 서 있는 언덕바지에는 염산(鹽山) 해안의 전모가 한눈에 들어왔다. 왼편으로는 야산의 발목 근처에 타원형의 봉남리(奉南里) 저수지가 길게 누워 있고 저수지의 제방을 경계로 바른쪽에는 널따란 개간지가 펼치어 있다.

 

개간지를 지나면 염전이 있고 염전 건너편에 해안지대의 뾰쪽산들이 멀리 바라다보였다. 해안이라고 말했지만 여기서는 칠산 바다의 넓은 수면이 해안에 밀립한 그 뾰쪽산들로 가리워 보이지 않았다. 따라서 범선 한척 구경하기도 어려웠다. 그렇지만 겨울 해풍은 이 언덕바지 쪽으로 쉬지 않고 불어오고 있었다.

 

그만 들어갑시다. 이 바람은 몸에 해로워요.

 

민섭씨는 취기가 점점 더 오르는지 뚱뚱한 몸집에 어울리지 않게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우리들은 돌아서서 다시 흙벽집 앞으로 갔다.

 

아빠, 미란이가 배탈 났어요. 배가 아파서 죽을려고 그래.

 

우리가 장지문 앞으로 다가서자, 여태까지 땅바닥에 앉아 있던 계집애가 갑자기 쇳소리로 말했다.

 

그년 죽을려나 보다 끌끌. 너, 애가 땅바닥에서 무얼 집어먹는 걸 못 봤어?

 

민섭씨가 몹시 화난 어조로 묻자, 계집애는 고개만 몇 번 가로저었다. 민섭씨는 허리를 굽히고 낮게 내려앉은 장지문의 손잡이를 잡고서 다시 투덜거렸다.

 

그래, 영자 너는 애기가 땅바닥을 멋대로 기어다니게 버려뒀다는 말이지? 에끼, 망할 것. 끌끌.

 

나는 민섭씨를 뒤따라 곧 방으로 들어갔다. 방안은 몹시도 깜깜해서 민섭씨도 미란이라는 애기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고 다만 방 한편 구석에서 애기의 칭얼대는 소리만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