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이슥한데 전화가 걸려왔다. 좀처럼 듣지 못하던 문 군 목소리다. 

 

“지금 뭘 하고 계세요? 밤이라 비둘기도 오지 않았을 텐데요.” 

 

“혼자 우두커니 앉아 있소. 그런데 이 시간에 어떻게……?” 

 

“논문 작성을 겨우 끝내 교수님께 전하고 교수님 댁에서 방금 나오는 길입니다.” 

 

“그것 잘 되었군. 축하하오.” 

 

여러 차례 지적을 받고 논문을 수정하고 보완하느라고 애를 먹는다는 소리를 그에게서 들었다. 까다로운 교수가 드디어 두 손을 든 모양이다. 

 

“제가 지금 그쪽으로 가도 될까요?” 

 

무슨 일일까? 좋은 소식을 전하려는 것일까? 

 

“그럼 뵌 지도 오래 되었으니까 잠깐 들르겠습니다.” 

 

문 군이 무척 서두르는 기색이다. K로부터 드디어 소식이 온 것인가? 그게 아니면 논문이 끝났으니 이제부터 박물관과 미술관과 볼쇼이 극장 안내를 시작하겠다는 것인가? 그것은 처음 만났을 때 약속이었다. 문 군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기대감에 들떠 있었다. 십오 분쯤 지나 중간 출입문 쪽에서 종달새 울음소리가 짧게 들렸다. 손님이 온 신호다. 문 군은 방수복을 입었는데 거실로 들어서는 문 군의 옷깃에서 빗물이 몇 방울 흘러내렸다. 그는 씨름선수처럼 탄탄한 몸을 가진 사람이다. 그런 건강체가 아니라면 주머니 사정도 넉넉지 않은데 십 년째 객지 생활을 버텨내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 비가 오고 있소?” 

 

“소나기가 잠시 왔다 그쳤어요.” 

 

“밖에 나가지 않으니까 비가 오는 것도 모르겠네.” 

 

“저는 내일 페테르부르그로 떠납니다.” 

 

자리에 앉자마자, 숨 돌릴 틈도 없이 그가 말했다. 

 

“서울에서 오신 교수님 두 분을 모시고 갑니다. 모교 은사님들인데 저 말고 안내해 드릴 사람이 없네요. 두 분도 저를 원하시고. 한 분은 금년 정년인데 마지막 러시아 여행을 오신 겁니다.” 

 

그렇다면 내가 끼어들 여지는 없다. 잠시 가졌던 박물관과 미술관과 볼쇼이 극장에 대한 기대감마저 와르르 무너졌다. 다만 내게 미안하다는 한 마디를 하려고 이 늦은 밤에 찾아온 것인가? 문 군이 원망스럽지만 내 입에서는 전혀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논문 끝내느라고 잔뜩 지쳤을 텐데 쉬지도 못하게 되었군. 당신 지금 무척 피곤해 보여.” 

 

“피아노 치는 아가씨는 자주 연락 오나요?” 

 

내 기분을 헤아린 문 군이 슬쩍 말머리를 돌린다. 

 

“필요하면 내 쪽에서 연락하기로 했는데 너무 염치가 없어서 자주 연락 못해요.” 

 

“부담 가지실 필요 없습니다. 그녀도 선생님께 많이 배운다고 좋아하던데요.” 

 

“그거야 으레 하는 인사치레지.” 

 

“좌우간 K 선생께서 빨리 오셔야 하는데. 그래야 저도 안심이 되지요.” 

 

“K가 올 것 같소? 그는 아주 그쪽에 눌러앉을 생각을 하는 게 아니요?” 

 

“약속을 그런 식으로 흘려버릴 분이 아닙니다. 늦어졌지만 틀림없이 K 선생은 돌아와서 선생님을 콘스탄찌노보로 데려가실 겁니다.” 

 

‘콘스탄치노보’―한동안 잊고 있던 그 지역 이름이 문 군의 입을 통해 다시 기억에서 되살아났다. 그 이름은 여전히 지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지명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두 분이 거길 가시더라도 저는 아마도 콘스탄치노보에 동행은 못할 것 같습니다.” 

 

문 군의 이 말은 내게 충격으로 들렸다. 

 

“그럼 말도 통하지 않은 K와 나 두 사람만 가는가?” 

 

문 군은 잠자코 있다가 다시 말했다. 

 

“교수님들 여행 일정이 길어질 것 같고요. 제가 끼어들면 K 선생께 부담만 지워 드립니다.” 

 

그는 이미 마음을 분명히 정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언어라는 매개물이 제거된 두 사람의 만남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문 군의 동행을 굳게 믿었던 나는 잠시 혼란에 빠졌다. L 교수도 당연히 문 군이 그곳에 동행할 거라고 말했다. 

 

"K는 한국말이 아주 불가능하오?” 

 

“가벼운 인사말 정도라고 할까요. 무슨 담론 같은 것은 기대 못하죠. 그런데 두 분 사이에 반드시 언어가 필요할까요?” 

 

“……?” 

 

문 군이 기묘한 말을 했다. 그가 말하는 의도를 알 것 같기도 했고 모를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그 물음에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자, 문 군이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손바닥으로 이마를 탁 치면서 말했다. 

 

“아, 참 그 새 부인이 알마타에서 우리말 교사를 하셨답니다. 어느 수준인지 몰라도 만약 부인과 함께 오시면 도움이 되겠는데요.” 

 

“새 부인이라뇨?” 

 

“제가 말씀 안 드렸나요? 참 그렇군. 전 당연히 아실 줄만 알고. K 선생께서 바로 얼마 전 이혼하셨어요. 이혼하고 바로 카자흐스탄으로 가신 겁니다.” 

 

“러시아 부인은 젊고 미인이란 소문이 있던데요.” 

 

“나이 차이가 컸지요. K 선생께서 무척 사랑하신 걸로 아는데요. 아무튼 그곳에 가자마자, 새 부인을 만난 것은 다행이지요. 한국 말 교사란 걸 보면 이번에는 고려인 출신인가 봐요.” 

 

“그다지 사랑했다면 왜 헤어졌을까? K가 참 안됐네.” 

 

“저는 깊은 내용은 모릅니다. 여기서는 이혼하는 문제가 한국처럼 그렇게 중대사건이 아닙니다. 두 번 세 번 결혼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예술가들이 특히 더 그런 것 같습니다. 이혼한 사이끼리 친구처럼 지내기도 하고. 다른 건 불합리한 것 투성이지만 결혼이나 성 문제 같은 것은 러시아 사람들이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해요. K 선생만 해도 이번에 헤어진 러시아 부인이 처음은 아니죠. 첫 부인은 고려인이라고 들었는데 그 부인과 사이에 따님도 두 명 있고.” 

 

L 교수는 왜 K의 이혼 얘기를 하지 않았을까? K와 교신이 잦은 그가 K의 신변에 생긴 가장 중요한 변화를 모를 리가 없다. 아마 K는 자기 사생활의 변화를 대수롭지 않은 일로 치부했을 터이고 L 교수도 그 문제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 같다. 러시아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니까.

 

그런데 엉뚱하게 K의 이혼은 내 마음에 마치 자기의 젊은 날의 실연의 기억처럼 잔잔한 아픔의 파문을 일으켰다. 그 얘길 듣는 순간 아마 허공에 높이 떠 있는 기중기의 운전석에 앉아 모스크바 중산층의 저녁 식탁을 훔쳐보는 이방인 청년이 갑자기 떠올랐기 때문일 것이다. K의 글이 실린 잡지에서 그가 그린 스케치 몇 점을 본 일이 있다. 인물 스케치인데 대부분 젊은 여성의 전신상이나 반신상이었고 노파나 남자를 그린 것도 한두 점 있었다.

 

K는 화가로 친다면 매우 탐미적 경향이 짙은 인물이다. K가 한때 화가 지망생이었다는 얘기는 그의 자전에도 나와 있다. 그의 선은 세련되고 무척 대담했다. 젊은 여성들은 갸름한 턱, 날카로운 콧날, 꿈을 꾸는 듯한 아련한 눈빛 등 모두가 미인인데 K가 그린 여성들의 매력적인 모습에서 나는 한동안 눈길을 떼지 못했다. 

 

도심의 거리나 지하철에서는 이따금 그 스케치에서 방금 걸어 나온 것 같은 매력적인 젊은 여성들을 볼 수가 있다. 문 군이 K와 이혼한 전처가 젊고 아름다운 러시아 여성이란 말을 했을 때 나는 K가 그린 그 여성들을 떠올렸다. K는 분명 자기 취향에 어울리는 여성상을 그렸을 것이다. 화가들은 대체로 자기가 꿈꾸는 여성상을 그려낸다는 글을 어디서 읽은 기억이 있다. 

 

‘나이 차이가 컸지요. K 선생께서 무척 사랑하신 걸로 아는데요.’ 

 

문 군의 이 말이 쉽게 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