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진을 만나고 들어온 날 밤 늦게 문 군이 전화를 걸어왔다. 목소리는 아주 가깝게 들렸는데 사실은 아주 먼 데서 걸어온 전화였다. 

 

“저는 지금 니즈니노보고로드에 와서 있습니다. 교수님께서 전부터 한번 와 보고 싶었던 곳인데 기회가 없었답니다. 이번이 마지막 여행이 될지 모르니 꼭 오시고 싶다고 해서 모시고 왔어요.” 

 

“당분간 당신 얼굴 보기 힘들겠네.” 

 

기대감을 잃은 나는 덤덤하게 대꾸했다. 그런데 뜻밖의 소식을 전했다. 

 

“드디어 K 선생께서 오신답니다. 이틀 뒤에 모스크바에 도착하실 거래요. 저도 그때에 맞춰 갈 거구요. 그러니 다차로 떠날 준비를 미리 해 두세요.” 

 

옆에서 누가 재촉을 하는지 문 군은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콘스탄치노보―나는 잊고 있던 그 지명을 혼자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그곳에 간다는 게 어쩐지 실감이 되지 않았다. 

 

문 군이 전한 대로 약속한 날 K는 모스크바로 돌아왔다. 신혼인 부인은 이번에는 동행하지 않았다. 문 군도 여행 일정을 잠시 중단하고 두 사람을 연결시켜 주기 위해 모스크바로 돌아왔다. 한낮인데 나는 짐을 꾸린 큰 여행 가방을 끌고 어둑어둑한 계단을 지나 바깥 거리로 나갔다. 방을 떠나기 전 피아노 위에 놓인 그리미의 사진과는 열흘 뒤에 만나자는 간단한 작별인사를 했다.

 

바깥 거리에는 미리 차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새 나타난 문 군이 내게 달려와서 큰 가방을 받아 들고 차의 트렁크로 옮겼다. 차는 조그만 라다 승용차인데 차령이 이십 년도 넘어 보일 만큼 낡을 대로 낡은 차였다. 요즘 거리에서는 이런 차를 구경하기도 힘들었다. 

 

K는 무표정한 얼굴로 천천히 차에서 밖으로 나왔다. 그는 공사장 인부처럼 투박한 작업복을 입었는데 짧은 코밑수염과 치켜 올라간 눈 꼬리가 선뜻 눈에 들어왔다. 그는 나이에 비해 강인한 인상을 풍겼다. K는 말 한마디 없이 눈으로만 웃으며 내게 불쑥 손을 내밀었다. 그 눈웃음이 나를 반긴다는 유일한 표시였다. 그는 나와 비슷한 세대다. 기껏해야 한두 살 터울일 거다. 그가 말을 아끼려고 입을 닫고 있는 게 아니고 간단한 한국어 인사말도 그의 입에서는 선뜻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는 걸 곧 나는 알았다.

 

K와 내가 차의 앞좌석에 올라앉자, 문 군이 밖에서 손을 흔들었다. 그는 한 사람의 귀찮은 짐을 덜게 되었으니 기분이 가뿐할 것이다. 차가 시동을 걸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콘스탄치노보를 향해서. 나도 벙어리이고 K 역시 벙어리이다. 두 사람의 벙어리가 난생 처음 만났는데 만나자마자, 함께 열흘 동안을 지낼 낙원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둘만 남게 되자, 지금까지 언어소통의 불능에 대해 걱정했던 일들이 씻은 듯 사라지고 두려움보다는 기대감이 슬며시 피어올랐다. 나도 자기의 그런 기분을 이해할 수 없었다.

<문장 웹진/2007년 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