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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니모는 방 한가운데 서서 말했다. "난 이제 떠날 준비 다했어." "그래 곧 떠나자." 까를로가 말했다.까를로는 방 구석에 있는 작은 장롱에서 자기들의 소지품을 꺼내 짐을 꾸렸다. 그리고 말했다. "날씨는 좋아. 무척 춥기는 하지만."
"나도 알아." 제로니모가 말했다. 두 사람은 방을 나왔다.
"조용히 걸어가자." 까를로가 말했다. "어제 저녁에 온 손님 두 사람이 옆 방에서 자고 있으니까 말이야." 그들은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갔다. "주인이 네게 인사 전해달라더라." 까를로가 말했다. "어제 밤 숙박비 20쎈티시모를 우리에게 주었어. 지금 바깥 오두막에 가 있는데 두 시간 후에나 돌아올 거야. 물론 내년에는 다시 만나게 되겠지." 제로니모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아침 햇살이 비치는 가운데 그들 앞에 펼쳐진 국도를 걸어갔다. 까를로는 동생의 왼팔을 잡아 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아무 말도 없이 계곡 쪽으로 걸어갔다. 얼마 동안 걸은 후 둘은 길이 길게 굽이치며 멀리 뻗어나가는 모습이 훤히 보이는 곳에 이르렀다. 안개가 위로 솟아오르며 그들에게 몰려왔다. 위에 펼쳐진 산들을 구름이 삼켜버린 것 같았다. 까를로는 그 때 생각했다. 이제 동생에게 그 얘기를 해주어야 하겠다...
까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금화를 호주머니에서 끄집어 내어 동생에게 쥐어주었다. 동생은 그것을 오른손 손가락 사이에 끼고 볼에 대 보고 이마에 대 보고 하더니 드디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나도 그런 줄 알았어." 제로니모가 말했다.
"응, 그래?" 까를로는 대답하면서 의아스럽게 동생을 쳐다보았다.
"그 낯선 손님이 내게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어도 난 다 알게 됐을 거야."
"그래?" 어떻게 해야 할 바를 모르고 까를로는 말했다. "하지만 넌 알 거야. 왜 내가 저 위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난 네가 몽땅 써 버릴까 그게 두려웠던 거야. 그리고 이것 봐, 제로니모... 이제 네 윗도리와 내복, 구두를 새로 살 때가 됐어. 그래서 난..."
장님은 사납게 머리를 흔들었다. "뭐 하려고?" 그는 한 손으로 자기 윗도리를 만졌다. "이 옷은 아직 좋아. 또 따뜻하기도 하고. 그리고 우린 이제 남쪽으로 가잖아."
까를로는 제로니모가 전혀 기뻐하지도 않고, 자기에게 사과도 하지 않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말을 계속했다.
"제로니모야, 내 말이 옳았지 않아? 너는 왜 기뻐하지 않는 거야? 지금 우린 그걸 갖고 있단 말이야, 그렇지 않아? 지금 우리는 그걸 완전히 손에 쥐고 있단 말이야. 내가 저 위에서 네게 이미 말했더라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정말 내가 너에게 말 안 하기를 잘했지, 생각해 봐..."
그때 제로니모가 소리쳤다. "거짓말 좀 그만 해!... 형은 항상 거짓말만 해! 벌써 백 번은 거짓말을 했을 거야! 그것도 실은 형이 가지려고 했던 거야. 그러다가 겁이 난 거지... 겁이 났던 거라구!"
까를로는 머리를 떨어뜨리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눈먼 동생의 팔을 붙잡고 계속해서 그를 데리고 길을 걸어갔다. 제로니모가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그는 정말 슬펐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어제보다 더 슬프지는 않았다. 자기의 그런 마음이 그로서도 놀라웠다.
안개가 걷혔다. 오래 침묵을 지킨 끝에 제로니모가 말했다. "이제 좀 따뜻해지는군." 이 말은 무관심하고, 당연한, 벌써 몇 백번이나 한 말이 아닌가. 까를로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제로니모의 생각이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제로니모에게 까를로는 영영 도둑이 되고 만 것이다.
"배 고프지 않아?" 까를로가 물었다.
제로니모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저고리 주머니에서 치즈와 빵을 꺼내 입에 넣고 먹기 시작했다. 그들은 계속해서 길을 걸어갔다.
그들은 보르미오에서 오는 우편 마차와 만났다. 마부가 그들을 보고 소리쳤다. "벌써 내려가나?" 그리고 또 다른 마차들도 왔다. 마차들은 모두 위로 올라갔다.
"계곡에서 바람이 불어와." 제로니모가 말했다. 급하게 휘어진 커브를 돌아가자 그들의 눈 아래에 벨트린이 나타났다.
정말...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군... 까를로는 생각했다. 그런데 나는 동생을 위해 도둑질까지 했다. 그런데 그것조차 이제 허사가 된 것이다.
그들 아래에 펼쳐져 있던 안개는 자꾸 엷어졌다. 햇빛이 여기저기 구멍을 뚫고 비쳐 들어왔다. 까를로는 생각했다. "이렇게 서둘러서 여관을 떠난 것이 잘못한 것 아닐까? 침대 밑에 지갑이 놓여 있고... 하여간 의심을 받을 만한 일이니까 말이야..."
그러나 이제 아무래도 좋다. 더 이상 무슨 나쁜 일이 생길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동생의 눈을 멀게 만들었고, 동생은 나에게 돈을 도둑 맞았다고 생각한다... 벌써 몇 년 동안이나 그렇게 생각해온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두고두고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이보다 더 나쁜 일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들의 발 아래 커다란 하얀 호텔이 마치 아침 햇살에 목욕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렇게 서 있었다. 더 아래로 깊숙이 내려가면 계곡이 넓어지면서 마을이 기다랗게 뻗쳐 있다. 그들은 둘 다 아무 말도 없이 길을 걸었다. 까를로의 손은 여전히 장님의 팔을 붙잡고 있었다. 그들의 호텔의 정원을 지나갔다. 테라스 위에서 손님들이 밝은 여름옷을 입고 앉아서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다. "우리 어디서 쉴까?" 까를로가 물었다.
"그래, 항상 독수리장에서 쉬었으니까, 이번에도..."
그들은 마을 끝에 있는 조그만 호텔에 도착했다. 그들은 바에 앉아 포도주를 주문했다.
"오늘은 왠일로 이렇게 일찍 우리 집에 왔나?" 주인이 물었다.
까를로는 이 질문에 약간 놀랐다. "지금이 철이 이른 건가요? 9월 10일 아니면 11일텐데... 그렇지 않나요?"
"작년에는 지금보다 훨씬 늦게 온 것 같은데..."
"저 위는 지금 무척 추워요." 까를로가 말했다. "어제 밤에는 정말 춥더라구요. 참, 그렇지... 잊지 말고 석유를 보내 주시라고 그러더군요."
바의 공기는 탁하고 무더웠다. 이상스러운 불안감이 까를로를 휩쌌다. 그는 다시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티라노, 에돌레, 이세오의 호수, 어디든지 무조건 멀리 가는 길로 나가고 싶었다. 그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섰다.
"벌써 가려고?" 제로니모가 물었다.
"오늘 점심 때까지는 볼라도레에 가야 해. '사슴장 호텔'에서 점심 때 마차들이 쉬니까... 거긴 벌이가 좋아." 그들은 거기를 떠났다. 이발사 베노치가 담배를 뻐끔뻐끔 피우면서 가게 앞에 서 있었다. "안녕." 이발사가 소리쳤다. "저 위는 좀 어때? 지난밤에 눈이라도 오지 않았나?"
"네, 네." 까를로는 건성으로 대답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마을을 벗어나자 목장과 포도원 사이로 뽀얗게 비치는 길이 졸졸 흐르는 시냇물을 따라 이어져 있었다. 하늘은 푸르고 고요했다. "왜 나는 그런 짓을 했을까?" 까를로는 생각했다. 그는 눈먼 동생을 옆에서 쳐다보았다. 지금 저 애 얼굴이 전과 달라지기라도 했단 말인가? 실상 동생은 계속 까를로가 도둑질을 한다고 믿어 왔던 것 아닌가?
까를로는 실상 언제나 혼자였던 것이다. 그리고 동생은 언제나 나를 미워하고 있었다... 그는 결코 벗어 던질 수 없는 무거운 짐을 어깨에 매고 걸어가는 기분이었다. 햇볕이 모든 길 위를 눈부시게 비추고 있다. 그러나 제로니모는 어두운 밤 속을 걸어가고 있다. 까를로는 자기도 그 어두운 밤이 보이는 듯했다.
그들은 계속 걸어갔다. 몇 시간이고 걷고 또 걸었다. 가끔 제로니모는 이정표 위에 앉아 쉬었다. 어떤 때는 둘 다 다리 난간에 기대 숨을 돌리기도 했다. 그들은 다시 마을을 지나갔다. 호텔 앞에 마차가 서 있었다. 여행객들은 마차에서 내려 이리저리 다니고 있다. 그러나 두 구걸꾼은 거기서 지체하지 않고 다시 툭 트인 거리로 나왔다. 해는 자꾸만 높이 솟았다. 점심 때가 가까워진 모양이다. 그날도 다른 수천 개의 날과 똑 같은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