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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장님은 마리아를 끌어당겨 자기 무릎에 앉혔다. "당신들은 모두 바보요." 제로니모가 말했다. "내가 눈이 없다고 해서 보지 못하는 줄 아시오? 나는 지금 까를로가 어디 있는지도 알고 있어요. 저... 저기 난로가에 서서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웃고 있구먼!" 모두 까를로를 쳐다봤다. 까를로는 입을 딱 벌리고 놀라서 난로에 기대고 있었다. 이제 동생의 거짓말을 나무랄 수도 없다. 그는 동생의 말을 따라서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히죽 웃었다.하인이 들어왔다. 어둡기 전에 보르미오에 도착하려면 마부들은 이제 서둘러야 한다. 그들은 일어나서 떠들석하게 작별 인사를 했다. 객실 안에는 이제 다시 두 형제만 달랑 남게 되었다. 보통 때 같으면 두 형제는 지금 잠잘 시간이다. 이 때쯤이면 호텔 전체도 항상 조용해지고, 사람들이 휴식을 취하는 것이다. 제로니모는 머리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잠자는 것 같았다.
까를로는 잠시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다가 의자에 걸터앉았다. 몹시 피곤했다. 마치 심각한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온갖 일들을 머리 속에 떠올렸다. 어제와 그제, 그리고 그 이전의 모든 날들... 특히 무더운 여름날 동생과 함께 하염없이 떠돌았던 하얀 도로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런데 이제 그 모든 것들이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것처럼 멀게 느껴졌다. 그는 이걸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오후 늦게 티롤에서 우편 마차가 왔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 그들이 쉬고 있을 때 남쪽으로 가는 마차가 또 왔다. 형제는 네 번이나 더 뜰로 내려가야 했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노래를 마치고 계단을 올라올 때에는 이미 황혼이 깃들이고 있었다. 기름 램프가 나무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려 지직거리며 타고 있었다.
가까운 채석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왔다. 그들은 호텔 아래쪽으로 3백 걸음쯤 내려간 곳에 있는 오두막에서 살고 있었다. 제로니모는 그들에게 가서 같이 앉았다. 까를로는 혼자서 식탁에 남아 있었다. 이 고독이 무척 오래 계속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제로니모가 노동자들에게 자기의 어린 시절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소리를 높여, 마치 비명이라도 지르는 것 같았다.
제로니모는 자기가 눈으로 본 것, 사람이나 물건 등 온갖 것을 남김없이 아주 잘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다. 들에서 일하던 아버지, 담 가까이 물푸레나무가 서 있던 조그만 정원, 조그만 우리집, 구두쟁이의 어린 두 딸, 교회 뒤쪽 포도원, 그리고 특히 거울에 비쳤던 자기의 어린 시절 얼굴까지도... 얼마나 자주 까를로는 이 얘기를 들었던가?
그러나 그는 이제 그걸 참을 수 없었다. 그 이야기가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르게 들렸던 것이다. 제로니모가 하는 말이 이제와는 달리 전혀 새로운 의미를 갖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말들은 모두 까를로에게 대고 하는 말처럼 느껴진다. 까를로는 슬며시 밖으로 나가 이제 완전히 어두워진 국도를 걸어갔다. 비는 이제 멎었다. 공기가 무척 차가웠다.
줄곧 걸어가, 자꾸만 어둠 속 깊이 들어가고 싶다. 마지막에는 어디든 거리의 웅덩이 같은 곳에 기어들어가 잠이 드는 거다... 그리고 두 번 다시 깨어나지 말았으면좋으련만... 이런 생각이 까를로를 유혹했다. 그는 갑자기 마차가 굴러오는 소리를 들었다. 두 개의 희미한 등불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까를로의 옆을 지나가는 마차에는 두 명의 신사가 타고 있었다. 그 중의 한 명, 얼굴이 갸름하고 수염이 없는 신사가 까를로의 모습을 어둠 속 등불 빛에 언뜻 보고는 깜짝 놀라 몸을 움츠렸다. 까를로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모자에 손을 대고 그들에게 인사를 했다. 마차와 불빛은 금방 멀어져 갔다. 까를로는 다시 깊은 어둠 속에 혼자 서 있었다.
갑자기 까를로는 겁을 먹고 놀라서 몸이 움츠러들었다. 평생 처음, 어둠이 무섭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는 1분도 더 그 자리에 서 있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는 혼란한 마음 속에서 자신의 그 오싹한 느낌과 눈먼 동생에 대한 고통스러운 안쓰러움이 겹친 이상한 느낌이었다. 그는 호텔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객실에 들어서자 아까 그의 옆을 지나갔던 여행객 두 사람이 식탁에 붉은 포도주 병을 놓고 앉아 있었다. 그들은 뭔가 굉장히 중요하고 급한 일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들어서도 그들은 얼굴을 들지 않았다.
다른 식탁에는 제로니모가 아까처럼 노동자들 사이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도대체 어디에 틀어박혀 있었나, 까를로?" 문간에서 호텔 주인이 물었다. "왜 동생을 혼자 둔 거야?"
"무슨 일이 있었나요?" 까를로가 놀라서 물었다.
"제로니모가 한턱 냈다네. 나야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이제 곧 장사가 잘 안 되는 때가 온단 말일세. 자네들은 그런 걸 생각해 둬야지."
까를로는 서둘러 동생에게 걸어가서 팔을 붙잡고 말했다. "이리 좀 와라."
"이거 왜 이래?" 제로니모가 소리쳤다.
"저리 좀 가자." 까를로가 말했다.
"이거 놔, 놓으란 말이야! 난 돈을 벌고 있어. 내가 하고 싶은 건 내 돈으로 할 거야. 흥! 형이 전부 챙길 수는 없을걸? 사람들은 형이 돈을 내게 준다고 생각하겠지? 천만에! 나는 장님이야! 하지만 손님들이 있어! 그래서 나에게 '네 형에게 20프랑 주었다'고 친절하게 일러준단 말이야!"
노동자들이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만 해." 까를로가 말했다. "자, 이리 와라!" 그는 동생을 잡아당겨 계단으로 데리고 갔다. 전혀 장식이 없는, 지붕 밑 방 자기들 잠자리로 간신히 끌다시피 올라가야 했다.
그러나 제로니모는 그렇게 끌려가면서도 도중에 계속 소리쳤다. "그래 이제 다 폭로가 된 거야. 이젠 다 알아! 아, 잠간만 기다려! 그 여자 어디 있지? 마리아 말이야. 형은 그 돈을 그 여자 저금통에 넣어 두었지? 흥! 나는 형을 위해 노래하고 기타를 켜고, 형은 내 것을 먹으며 살고 있어. 그런데 형은 내 걸 훔치고 있단 말이야!" 제로니모는 짚을 채운 시트 위에 쓰러졌다.
불빛이 복도에서 희미하게 방으로 새어들었다. 저쪽 손님방이 하나 문이 열려 있었다. 마리아가 거기서 손님들의 잠자리를 펴고 있었다. 까를로는 침대 옆에 서서 동생이 쓰러져 누운 것을 내려다 보았다. 제로니모는 얼굴이 부어오르고 입술이 파리했다. 축축한 머리카락이 이마에 늘어붙은 그 얼굴은 실제보다 몇 년이나 더 늙어 보였다.
이제 점점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 눈먼 동생의 의심은 오늘 비로소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틀림없이 이미 오래 전부터 제로니모의 마음 속에 잠자고 있던 그런 의심인 것이다. 그 동안에는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낼만한 어떤 계기, 감히 그런 사실을 직접 말할 용기가 없었을 뿐이었다.
까를로가 지금까지 그를 위해 해온 모든 일은 허사였다. 가슴을 후비는 회한이나 자기 인생을 내던진 희생도 소용이 없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그래도 계속해서 날이면 날마다, 그를 돌봐주고, 그를 위해 구걸을 해야 할까? 영원한 암흑 속을 함께 걸으며 돌봐주고 그 대가로 의심과 욕을 얻어먹어야만 한단 말인가? 이런 일을 앞으로 얼마나 계속해야 한다는 말인가?
동생이 나를 도둑이라고 생각하는 상황에서는 나는 동생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한다. 전혀 모르는 낯선 사람이라도 똑 같은 일을 동생에게 해줄 수 있다. 아니 오히려 더 잘해 줄지도 모른다. 정말 이젠 동생을 혼자 내버려두고 영원히 그와 헤어지는 것이 제일 현명한 일일 것이다. 그러면 제로니모는 결국 자기의 잘못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 때 가서야 제로니모는 비로소 기만 당한다는 것, 도둑을 맞는다는 것, 또 외롭고 비참하다는 것이 어떠한 것인가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 때 나는 무슨 일을 해야 할까? 그래, 나는 아직 늙지 않았다. 나 혼자뿐이라면 나는 아직도 무슨 일이든 시작할 수 있다. 최소한 하인 일자리라도 어디서든지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순간에도 그는 여전히 동생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갑자기 눈앞에 동생의 다른 모습이 떠올랐다. 해가 비치는 길거리에서 보이지 않는 두 눈을 크게 뜨고, 눈이 부시다는 것조차 느끼지 못하며 하늘을 멍하게 바라보는 모습이었다. 언제나, 영원히 그를 둘러싸고 있는 어둠 속을 두 손으로 휘저으며 돌 위에 앉아 있는 동생의 모습이었다.
까를로는 이 눈먼 동생에겐 이 세상에서 오직 자기밖에 없으며, 역시 마찬가지로 자기에게도 이 동생밖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동생에 대한 사람이 자기 인생의 전부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아주 분명히, 눈먼 동생이 자기의 이 사랑에 보답하고 자기를 용서해 주었다는 믿음, 이 믿음만이 그에게 모든 불행을 이겨내게 해 주었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
그는 이 희망을 그렇게 쉽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는 동생에게 자기가 필요한 만큼, 자기에게도 동생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동생을 버릴 수도 없고, 또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이 의심을 참고 견디거나, 아니면 동생에게 그 의심이 터무니없다는 것을 설득하는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그렇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 금화를 마련할 수만 있다면... 내일 아침이라도 동생에게 말해줄 수 있을 것이다. "네가 그 노동자들과 다 마셔버리지 않도록... 사람들이 그걸 훔쳐가지 않도록 내가 그걸 잘 간직해 두었다고"고 말이다. 혹은 그밖에 무슨 다른 말이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