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지 3 / 전체 9
까를로는 처음에 동생에게서 전혀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대장간에서 자기가 배워야 할 수업을 소홀히 하고 말았다. 아버지가 거듭 걱정을 하고 경고를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는 그리고 자기의 장래 직업을 다시 시작할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어느날 까를로는 제로니모가 이제 더 이상 자기의 불행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이상하게 여겼다. 그리고 그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눈먼 소년은 결국 모든 것을 알아차리게 된 것이다. 자기는 앞으로 하늘과 언덕과 길거리, 사람들의 모습과 빛을 두 번 다시 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까를로 역시 자기가 일부러 동생을 이렇게 만든 것은 아니라는 사실로 자기를 위안하려 했지만 별로 도움이 되질 않았다. 이전보다 한결 더 마음이 괴로웠던 것이다. 때때로 이른 아침에 일어나 옆에서 포근히 잠든 동생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오히려 동생이 잠에서 깨어날 것이 두려워졌다. 동생은 깨어나 무의식적으로 빛을, 자기 눈에서 영원히 사라져버린 그 빛을 새삼스럽게 찾을 것이다. 그런 모습을 보지 않으려고 그는 정원으로 뛰어나가곤 했다.
그 당시 까를로는 목소리가 좋은 제로니모에게 음악 공부를 시키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일요일이면 가끔 이곳을 지나가는 톨라의 학교 선생이 그에게 기타 연주를 가르쳐 주었다. 그때만 해도 이 눈먼 소년은 자기가 새로 배운 이 기술이 언젠가 자기의 호구 수단이 되리라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슬픈 여름날의 사건과 더불어 불행이란 놈은 이 늙은 라가르디의 집안에 영원히 자리를 잡고 앉은 것 같았다. 농사는 해마다 흉작이었으며 노인이 그나마 모아두었던 약간의 돈마저 어느 친척에게 사기를 당해 날리고 말았다. 그리고 노인은 어느 여름 무더운 8월 어느날 넓은 들판에서 쓰러져 세상을 떠났다. 그는 죽었을 때 빗 외에는 아무것도 남겨놓지 않았다. 약간의 땅과 집마저 다 팔리고 두 형제는 집도 없이 빈털터리가 되어 고향 마을을 떠나야 했다.
그때 까를로는 스무 살, 제로니모는 열 다섯 살이었다. 그때부터 구걸과 방랑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생활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처음에 까를로는 자기와 동생이 함께 먹고 살 수 있는 벌이가 없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그 시도는 좀처럼 이루어지지 못했다. 제로니모 역시 아무데서도 안정을 얻지 못했다. 그는 결국 여기저기 항상 떠돌아다니는 것을 원했던 것이다.
그들은 이탈리아 북쪽 지방과 남부 티롤 지방을 떠돌아 다녔다. 여행자들이 주로 떼를 지어 몰려다니는 거리와 오솔길을 따라 떠돌아다닌 것이다. 그런 세월이 어언 20년이었다.
이제 이렇게 세월이 흘렀기 때문에 까를로는 옛날에 느꼈던 그 고통, 타는 듯한 마음의 고통을 느끼지는 않았다. 찬란한 태양 빛, 가는 곳마다 펼쳐지는 정다운 풍경들... 이런 것들을 볼 때마다 그는 그러한 고통을 느꼈던 것이다.
이제 그는 그런 고통을 직접 느끼지는 않았으나 그의 마음 속 한구석에는 여전히 변하지 않는, 물어뜯는 듯한 연민의 정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마치 그의 심장 고동이나 호흡이나 마찬가지로 그의 무의식과 하나가 되어 있었다. 그는 제로니모가 술에 취한 것을 보는 것이 기뻤다.
독일인 가족을 태운 마차는 떠나갔다. 까를로는 좋아하는 버릇대로 계단의 제일 아래 층계에 걸터앉았다. 그러나 제로니모는 자기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팔을 맥없이 축 늘어뜨리고, 머리를 치켜들고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여관 집 하녀 마리아가 객실에서 나왔다.
"오늘은 좀 많이 벌었어요?" 마리아가 아래를 내려다 보며 소리쳤다.
까를로는 그 쪽을 돌아보지 않았다. 눈먼 사나이는 몸을 굽혀 땅바닥에서 자기 잔을 집어들고는 그걸로 마리아를 향해 건배했다. 마리아는 저녁 나절이면 종종 객실에서 그의 가까이에 앉아 있곤 했다. 그는 마리아가 아름답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까를로는 몸을 앞으로 내밀어 거리를 바라보았다. 바람이 불고 있었다. 빗방울 뿌리는 요란한 소리에 파묻혀 가까이 다가오는 마차 바퀴 구르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까를로는 자리에서 일어나 동생의 앞 자기 자리에 다시 자리잡고 앉았다.
마차가 들어오자 제로니모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마차에는 단 한 사람의 여행객밖에 없었다. 마부는 마차에서 내려 급히 말들의 멍에를 푼 다음 객실로 서둘러 올라갔다.
여행객은 회색 비옷을 온 몸에 두른 채 마차 구석 자리에 파묻혀 잠시 동안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전혀 노래를 듣는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잠시 후 그는 마차에서 뛰어 내려왔다. 그리고는 마차에서 그다지 멀리 가지 않고 그 주위를 초조한 듯이 이리저리 서성거렸다. 그는 두 손을 녹이려는 듯 쉴 새 없이 서로 부벼댔다.
그는 그때서야 거기서 노래하는 두 걸인을 알아본 모양이었다. 그는 그들의 맞은편에 서서 한참 동안 마치 탐색하듯이 그들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까를로는 인사 삼아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 여행객은 무척 잘생긴 젊은 청년으로, 얼굴에는 수염이 없었다. 두 눈은 불안스럽게 번뜩였다.
그는 한참 동안이나 그들 걸인 형제 앞에 서 있더니 마차가 지나가게 될 대문 쪽으로 급하게 걸어갔다. 그리고 비와 안개에 잠겨 있는 우울한 풍경을 쳐다보고는, 화가 치민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어때?" 제로니모가 형에게 물었다.
"아직 아무것도..." 까를로가 대답했다. "아마 떠날 때쯤 주겠지."
여행객은 다시 되돌아와서 마차 문에 몸을 기댔다. 눈먼 사나이는 다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 젊은 사나이는 갑자기 무척 흥미를 느끼며 듯 귀를 기울이는 것 같았다. 마부가 돌아와 말에게 멍에를 다시 얹었다. 그제서야 생각이 났다는 듯 그 잘생긴 젊은이는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 까를로에게 1프랑을 주었다.
"아이구,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까를로가 말했다.
여행객은 마차 속에 앉아 다시 비옷을 온몸에 휘감았다. 까를로는 땅바닥에서 잔을 집어들고 나무 층계를 걸어 올라갔다. 제로니모는 노래를 계속했다. 여행객은 몸을 마차 밖으로 내밀고 우월감과 동시에 애처로운 감정이 뒤섞인 표정으로 머리를 흔들었다.
그는 별안간 무슨 생각이 머리를 스친 모양이다. 그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나서 겨우 그에게서 두어 발짝쯤 떨어져 길 거리에 서 있는 눈먼 사나이를 불렀다. "자네 이름이 뭐지?"
"예, 제로니모입니다."
"그럼 제로니모, 제발 속지는 말게!" 그 순간 마부가 계단 맨 위 층계에 모습을 드러냈다.
"나리, 속다니요? 무슨 말씀이세요?"
"내가 네 친구에게 20프랑짜리 지폐를 주었단 말이야."
"아이구 나리,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래, 그럼 조심하라구!"
"그 사람은 제 형이에요, 나리. 그 사람은 저를 속이지 않습니다."
젊은이는 잠시 어안이 벙벙한 모양이었다. 그가 아직 곰곰히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마부가 운전대에 올라 말을 몰기 시작했다. 젊은이는 마치 "운명이야! 될대로 되려므나" 이렇게 말하려는 듯 머리를 흔들며 몸을 의자 뒤에 기댔다. 그리고 마차는 떠나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