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님 제로니모는 벤치에서 일어나 식탁 위 술잔 옆에 준비돼 있는 기타를 손에 잡았다. 첫 마차가 멀리서 달려오는 소리를 들은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익숙한 길을 더듬어 열리진 문으로 나아갔다. 문을 나서자 거칠 것 없이 가느다란 나무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그 나무 계단은 지붕이 씌워져 가운데 뜰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의 형이 제로니모 뒤를 따라갔다. 둘은 계단 바로 옆에 서서 차갑고 눅눅한 바람을 피해 벽에 등을 기댔다. 바람은 대문으로 들어와 더럽고 질퍽질퍽한 땅 위를 스쳐 불어왔다.

슈틸후저 고개를 넘어가는 여행 마차는 모두 이곳 낡은 호텔의 우중충한 아치 아래를 지나지 않으면 안된다. 이태리에서 티롤로 가는 여행객들에게 이 여관은 슈틸후저 고개를 앞둔 마지막 휴게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호텔은 오래 머물 만한 곳은 아니다. 전망도 보잘 것 없고, 헐벗은 언덕 사이로 평범한 길이 나 있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장님 이태리 사람, 제로니모와 그의 형 까를로는 여름 몇 달 동안을 여기를 집 삼아 지내곤 했다.

우편 마차가 들어오고 곧 그 뒤를 따라 다른 마차도 도착했다. 대부분의 여행객들은 두터운 숄과 외투로 몸을 휘감고 자리에 그냥 앉아 있었다. 그 가운데 몇 사람은 마차에서 내려 호텔 문 근처를 초조하게 이리저리 거닐고 있었다. 날씨는 점점 더 나빠진다. 차가운 빗방울이 소리를 내며 땅에 쏟아졌다. 그 동안 맑은 날씨가 꽤 오래 계속됐으나 가을이 느닷없이, 그리고 너무 일찍 닥쳐온 모양이다.

장님 사나이가 기타 반주를 곁들여 노래를 불렀다. 그는 술을 마시면 음을 제대로 다듬지도 않고 고함을 치는 듯한 음성으로 노래하곤 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따금 그는 머리를 위쪽으로 쳐들었다. 마치 누군가에게 하소연하는 듯한 몸짓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수염을 깎은 자리가 거무스레하고 입술이 파랗게 얼어붙은 듯한 그의 표정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그의 형은 옆에서 거의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누가 지폐를 한 장 그의 모자에 던져 넣어주면 그는 고맙다며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돈을 준 사람의 얼굴을 잽싸게, 그러나 당혹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봤다. 그러다 곧 뭔가 근심하는 표정으로 시선을 옮겨 동생이 바라보는 그 곳, 허공을 응시했다. 그런 모습은 마치 그의 두 눈만이 빛을 볼 수 있고, 그의 눈먼 동생에게는 한 줄기 빛도 나누어 줄 수 없다는 것을 부끄러워 하는 것 같았다.

"포도주를 좀 갖다 줘." 제로니모가 말했다. 까를로는 항상 그런 것처럼 순순히 그 말을 따라 포도주를 가지러 갔다. 그가 계단을 올라가는 동안 다시 노래를 시작했다. 그는 오래 전부터 이미 자신의 노래하는 목소리를 듣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제로니모는 아주 가까운 곳에서 젊은 남자와 여자 두 사람이 뭔가 속삭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이 두 사람이 얼마나 자주 이 길을 왕래했을 것인지 생각해 봤다. 그는 눈이 보이지 않는데다 취해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그에게는 똑 같은 사람들이 날이면 날마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갔다가 곧 또다시 남쪽에서 북쪽으로 고개를 넘어오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리하여 이 젊은 한 쌍의 남녀도 마치 오래 전부터 알아왔던 것 같은 기분이었다.

까를로가 포도주 한 잔을 들고 내려와 제로니모에게 주었다. 눈먼 사나이는 그 잔을 손에 들고 젊은 남녀 한 쌍에게 흔들며 말했다. "여러분의 건강을 위하여!" "고맙소." 젊은 사나이가 말했다. 그러나 젊은 여자는 남자를 끌고 가 버렸다. 여자는 이 장님이 징그럽게 여겨졌던 것이다.

그때 떠들썩하게 떠드는 일행이 또 한 대 마차를 타고 들이닥쳤다. 아버지와 어머니, 세 명의 아이들, 그리고 그 아이들의 보모가 일행이었다.

"독일 사람 가족이군."

제로니모는 나지막한 소리로 까를로에게 말했다. 아버지는 아이들에게 금화를 하나씩 주었다. 각자 받은 금화를 장님의 모자에 던져 넣으라고 하는 것이다. 제로니모는 아이들이 돈을 넣을 때마다 고맙다며 머리를 숙였다. 제일 나이가 많은 소년이 걱정스럽다는 듯, 호기심에 가득 찬 얼굴로 장님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까를로는 그 소년을 쳐다 보았다. 그런 또래 아이들을 볼 때면 언제나, 그 생각이 났다. 그 불행한 사고, 제로니모가 장님이 됐던 그 불행이 닥쳐온 것이 바로 저만한 나이 때 아니었던가. 그는 거의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사건이 일어났던 그 날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아이의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지금도 그의 귓속을 울리고 있는 것이다.

그때 어린 제로니모는 비명을 지르며 잔디밭에 주저앉았다. 그 정원의 하얀 담벼락 위에서 햇빛이 마치 놀리기라도 하듯이 휘감아 돌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멀리서 교회의 일요일 종소리가 울려왔었다.

까를로는 그날도 방안에 서서 화살을 담 옆 물푸레나무 쪽으로 쏘고 있었다. 그는 그 전에도 가끔 그렇게 놀곤 했다. 비명소리를 듣자 그는 마침 거기를 지나가던 동생이 화살에 맞아 다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손에서 활을 떨어뜨리고 창문을 통해 밖으로 뛰어나갔다. 어린 동생은 풀 위에 누워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신음하고 있었다. 오른 쪽 볼과 목으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때 아버지가 들로 통하는 정원의 조그만 문으로 들어왔다. 아버지와 까를로는 둘 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누워서 신음하고 있는 어린아이 옆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이웃 사람들이 부랴부랴 달려왔다. 바네티 할머니가 간신히 어린아이를 달래 얼굴에서 손을 떼도록 했다. 까를로가 당시 견습공으로 일하던 대장간의 대장장이도 왔다. 그는 치료법을 약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제로니모는 오른쪽 눈의 시력을 잃고 말았다. 그날 저녁 포시아브에서 온 의사도 더 이상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 의사는 자칫하면 하나 남은 왼쪽 눈마저도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은 넌지시 암시했다. 그리고 그의 말이 옳았다. 일 년 후 제로니모에겐 온 세상이 어두움 속에 가라앉아 버렸던 것이다.

처음에는 가족들도 그에게 나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하려고 했다. 그리고 제로니모 역시 그런 말들을 믿는 것처럼 보였다. 사실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던 까를로는 그 당시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여기 저기 방황했다. 길거리와 포도밭, 숲속을 거는 헤매고 돌아다녔다. 죄책감 때문에 심지어 자살하려는 생각까지 했다.

그러나 그가 괴로운 심정을 목사에게 고백했을 때, 그 목사는 까를로에게 살아 남아서 그 생명을 동생을 위해 바치는 것이 그의 의무가 아니겠느냐고 타일렀다. 까를로는 그것을 깨달았다.

동생에 대한, 사무치는 연민의 정이 그를 사로잡았다. 그가 눈먼 소년의 곁에 있을 때,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의 이마에 입 맞출 때, 또 그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집 뒤의 들과 포도나무 시렁 사이로 제로니모의 산책 길을 안내할 때, 그럴 때에만 까를로는 마음의 고통을 어느 정도 달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