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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어느 맑게 개인 날, 코펜하겐의 큰 교회에서 식을 올린 후 젊은 부부는 노르웨이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그들은 멀리 북쪽 하르당겔까지 갔다. 당시 분위기에서 신혼여행을 노르웨이로 가는 것은 좀 상식 이하의 일이었기 때문에 신부인 엔신의 친구들은 왜 파리로 가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엔신은 결혼 생활을 남편과 함께 황야에서 단 둘이서 시작하고 싶었다. 그녀는 속으로 그밖에는 아무 것도 소용이 없고, 바라지도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덧붙였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라고.코펜하겐에선 신랑은 돈, 신부는 지위를 노린 결혼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양쪽 다 그런 것은 아니었다. 말 그대로 연애 결혼이었고, 밀월여행은 문자 그대로 목가적(牧歌的)이었다. 엔신은 사랑하지 않는 사나이와는 결단코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사랑의 신 큐피드에게 대단한 존경심을 갖고 있어서 벌써 몇 년 전부터 매일같이 작은 기도를 드리고 있었던 것이다. "왜 빨리 와주지 않으십니까?"라고.
그러나 이제 그녀는 사랑의 신이 그녀의 기도를 오히려 복수의 심정으로 들어주었다는 것, 그녀가 읽은 책들은 사랑의 진짜 모습에 대해서는 가르쳐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가 최초로 정욕을 경험한 노르웨이의 풍광은 압도적인 감명을 던져줬다. 자연 풍경이 가장 아름다울 때였다. 하늘은 푸르고 벚꽃이 여기저기 피어 있고, 대지는 달콤 쌉쌀한 향기로 가득 차 있었다. 한밤중도 책을 읽을 수 있을 만큼 밝았다. 엔신은 후프 스커트에 등산 지팡이를 짚고 남편의 팔에 매달리거나 단 혼자서 험한 산길을 올라갔다.
그녀는 건강하고 다리가 가벼웠다. 바람에 옷자락을 휘날리면서 산꼭대기에 올라서 미칠 듯이 기뻐하고 또 기뻐했다. 그녀는 덴마크에서 자랐으며 류베크의 하숙에서 1년을 보낸 적도 있었다. 그래서 그녀의 대지에 대한 생각은, 발 밑에서 평평하게 혹은 파도 치면서 수평으로 퍼져나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산들은 모두 괴이하게 수직으로 서있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뒷다리로 일어선, 무언가 거대한 짐승처럼… 놀기 위해서인지, 누군가 쳐부수기 위해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렇게 높은 곳까지 온 것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공기는 마치 포도주같이 그녀의 머리에 와 닿았다. 또 그녀가 눈을 보내는 곳은 어디나 치솟아 오른 바위 산에서 호수로 흘러내리는 냇물이 보였다. 냇물은 은실 혹은 우렁찬 폭포가 되어 무지개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마치 자연 그 자체가 소리높이 흐느껴 울거나 깔깔거리며 웃는 것 같기도 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눈에 새로웠기 때문에 그녀는 이 세계에 대한 자신의 낡은 관념이 마치 스커트나 숄처럼 사방으로 흩날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곧 이 인상은 더 없이 깊은 놀라운 생각 - 한 번도 경험한 일이 없는 놀라움으로 굳어버렸다.
그녀는 신중하고 계획적인 분위기에서 자라났다. 아버지는 자신이 손해 보는 것도, 손님에게 손해를 입히는 것도 두려워하는 정직한 상인이었다. 때로는 이 양쪽의 위험이 그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어머니는 신을 두려워하는 경건한 신앙을 갖고 있었다. 두 사람의 늙은 숙모는 세상의 뜬소문에 민감한 엄격한 도덕가였다.
집에 있을 때 엔신은 때때로 자기를 용감한 혼이라 자부하며 모험을 동경했다. 그러나 신혼여행에서 마주친 이 난폭하고 낭만적인 풍경에 엔신은 놀랐다. 그리고 자기 마음속의 사납고 무서운 힘, 자신도 알지 못했던 그 힘에 압도돼 그녀는 의지할 것을 찾아 주변을 둘러보곤 했다.
어디에서 그것을 발견해야 하는가? 그녀를 여기에 데리고 온, 그리고 지금 그녀와 같이 단 둘이 있는 그녀의 젊은 남편은 그녀를 도울 수 없었다. 오히려 남편은 그녀의 혼란의 원인이었다. 또 그녀가 보기에 남편 역시 이 외부 세계의 위험에 놓여있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까닭은, 엔신이 결혼하고 나서 곧 아니 처음 만났을 때부터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남편은 공포를 전혀 모른다기보다 아예 그것이 결여돼있는 인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책에서 영웅에 관한 얘기를 읽고는 진심으로 그들을 찬미했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그녀가 읽은 책 속의 영웅 같지는 않았다. 그는 이 세상의 위험을 멸시하거나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 존재를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산은 운동장이며 연애까지도 포함해 인생의 모든 것은 모두 흥겨운 놀이의 소재일 뿐이었다.
"여보, 백년도 되기 전에 모두 마찬가지 결과가 되어버리는 거야"하고 남편은 말하곤 했다.
그녀는 남편이 지금까지 어떻게 세상을 살아왔는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남편의 인생은 모든 점에서 자기와 다르다는 것을 이해했다. 이제야 그녀는 공포를 갖고 그 점을 깨달은 것이다. 이제 자기는 꿈에도 보지 못한 높이와 심연을 지닌 이 세계에서, 중력의 법칙 같은 것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남자에게 맡겨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남편에 대한 감정은 깊은 도덕적 불만으로 이어졌다. 마치 남편이 의도적으로 자신을 배반한 것처럼 느꼈다. 동시에 그녀는 버림받은 아이가 마찬가지로 의지할 데 없는 다른 어린애에게 느끼는 것 같은 지극히 다정한 감정을 남편에게 느끼기도 했다. 이 두 가지 열정은 그녀의 성질에서 아마 가장 강력한 것이었던 모양이다. 점차 속도를 더해가서 나중에는 완전히 그녀를 점령해버린 것이다.
그녀는 공포를 배우기 위해 여행을 떠난 소년의 얘기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 또는 남편을 보호하고 구하기 위해서 남편에게 무서움을 가르쳐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남편은 그녀의 마음 가운데서 진행되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는 아내를 지극히 사랑하고 또한 숭배하고 존경했다. 그녀는 천진난만했고 자수 성가해 재산을 모은 가문 출신으로 프랑스어나 독일어를 말할 수 있고 역사나 지리에도 정통했다. 이러한 능력 전부에 대해 그는 일종의 종교적인 존경을 바쳤다. 그는 그녀에 대해 경탄할 준비가 돼 있었던 것이다.
하기야 그녀를 알고 있었다 해도 그것은 사소한 것이었다. 결혼할 때까지 겨우 서너 번밖에 만나지 않은 것이다. 게다가 그는 여자에 대해 잘 안다고 자부하는 그런 스타일이 아니었고, 그녀들의 신비한 점을 오히려 매력의 하나로 여기고 있었다. 젊은 아내의 변덕이나 기분이 상하는 것 모두 이 여자야말로 자기 인생에서 필요한 존재 - 최초에 만났을 때부터 그런 생각을 했지만 - 라는 신념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는 그녀를 친구로 맞아들이기를 바라고 자기가 지금까지 한 사람의 진실한 친구도 갖지 못했다고 반성했다. 과거의 연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지만, 그녀가 듣고 싶었다 해도 그 애기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점에서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데까지 충분히 얘기했다.
어느날 그는 바덴바덴에서 도박을 하고, 마지막 1센트까지 털어넣고는 딴 얘기를 했다. 그는 아내가 자기 곁에 앉아서 "이 사람은 확실히 도둑이다. 그렇지 않다고 해도 훔친 물건을 받은 사람이며 즉 도둑과 다름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는 또 과거에 자기가 진 빚이나, 양복점 주인에게 돈을 치르지 않아 피하느라고 고생한 경험을 재미 삼아 얘기했다.
이 얘기는 엔신의 귀에는 정말 기괴하게 들렸다. 그녀에게 빚은 큰 죄였다. 때문에 남편이 거기 파묻혀 살아오면서, 행운이 돌아오면 언젠가 갚게 되겠지 하면서 유유히 살아온 것이 전혀 자연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생각했다. 운명이 친절을 베풀어서 부잣집 딸인 자신이 적당한 때 나타나 그 양복점의 신뢰를 정당화해 준 것이라고.
그는 또 독일의 한 장교와 했던 결투를 얘기하고, 그 때의 흉터를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그 얘기를 듣고, 사방이 다 보이는 높은 산꼭대기에서 남편의 품에 안겨 그녀는 속으로 이렇게 부르짖었다. "신이여, 만일 가능하다면 아무쪼록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시옵소서"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