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아가씨는 바보예요..." 지그루트가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지요." 남작은 대답했다.
"그래요... 그 아가씨는 우리들이 얼마나 행복했는지도 전혀 알지 못했어요..." 그리고 나서 그는 오랫동안 침묵을 지켰다.
"계속하시오." 라이젠보그는 이렇게 말하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어느 날 아침이었습니다. 클래레는 아직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지그루트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녀는 항상 해가 높이 떠오를 때까지 잠을 잤지요. 난 숲으로 산책을 나갔습니다. 그때 갑자기 패니가 나를 뒤쫓아오더군요. 그리곤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외르제 씨, 늦기 전에 어서 떠나세요. 당신은 지금 아주 위험한 상태에요. 당장 여길 떠나세요!'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녀는 그 이상은 아무 것도 가르쳐주지 않더군요.
하지만 나는 그녀를 다그쳐서 결국 그녀가 말하는, 나에게 닥쳐올 위험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아, 그녀는 그때까지도 아직 나를 구해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나에게 아무 것도 말하지 않았을 겁니다!"
난간에 걸린 초록색 숄이 바람 때문에 돛처럼 부풀어오르고 있었다. 그 바람에 테이블 위 램프 불마저 조금씩 흔들거렸다.
"그래. 패니 양이 무슨 얘기를 한 겁니까?" 라이젠보그는 엄숙하게 물었다.
"기억하십니까?" 지그루트가 물었다. "우리가 클래레의 집에 손님으로 초대되어 갔었던 그날 저녁 말입니다."
"그 날 아침 클래레는 패니 양과 함께 대공의 묘소에 갔습니다. 그리고 대공의 무덤 앞에서 클래레는 이 여자 친구에게 아주 소름 끼치는 이야기를 털어놓았습니다."
"소름 끼치는 이야기라구요?" 남작은 몸이 떨려왔다.
"그렇습니다... 당신은 대공이 어떻게 죽었는지 알고 계시겠죠? 대공은 말에서 떨어진 뒤에도 몇 시간 더 살아 있었습니다."
"그건 알고 있소."
"그 곁에는 클래레 외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랬지요."
"대공은 클래레 외에는 아무도 만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죽어가면서 그녀에게 저주를 내렸습니다."
"저주라구요?"
"저주 말입니다! 대공은 말했습니다. '클래레, 나를 잊지 말아 줘. 당신이 날 잊는다면, 난 무덤 속에서도 결코 편안하지 못할 거야.' 그러자 클래레는 '난 잊지 않을 거예요'라고 대답했어요. '날 잊지 않는다고 맹세할 수 있어?' '맹세할게요.' '클래레, 난 당신을 사랑해... 하지만 난 이제 죽을 수밖에 없어...'"
"그건 누구 얘기요?" 남작은 소리를 질렀다.
"내가 말하는 겁니다." 지그루트는 말했다. "그런데 난, 이걸 패니 양에게 들었고, 패니는 클래레에게 들었어요... 그리고 클래레는 대공으로부터 들은 겁니다. 내 말 이해하시겠지요?"
라이젠보그는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마치 죽은 대공의 목소리가 세 번이나 겹겹으로 닫힌 관 안에서 새어나와 밤하늘로 울려 퍼지는 것을 듣는 느낌이었다. 지그루트는 제 입으로 대공이 한 말을 옮겼다.
"클래레, 난 당신을 사랑해... 하지만 난 죽을 수밖에 없어... 당신이 이렇게 젊은데... 나는 죽어야 하다니... 그럼 다른 녀석이 나를 대신하겠지. 그렇게 되리라는 걸 난 알아... 다른 녀석이 너를 품에 안고 너와 즐기겠지... 그렇게 할 수는 없어... 그건 허락할 수 없지... 그 자식이 그렇게 못하게 하겠어... 난 그놈을 저주할 거야... 클래레, 듣고 있어? 그놈을 난 저주한단 말이야!
내 뒤에 이 입술에 키스하고, 이 몸을 껴안은 첫번째 남자는 지옥에 떨어지고 말 거야! 클래레, 신은 죽어가는 자의 저주를 들어준다고 하더군. 조심하라구... 그 자식도 조심하는 게 좋을 걸... 그 자식은 지옥으로 떨어져, 미치광이가 되는 거야! 참혹하게 죽는 거야! 화가 있으라! 화가 있으라! 화가 있으라!"
입으로 죽은 대공의 목소리를 울려내던 지그루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크고 뚱뚱한 몸을 하얀 플란넬 양복으로 감싸고 서서 맑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초록색 숄이 난간에서 정원으로 떨어졌다. 남작은 무섭게 얼어붙었다. 몸 전체가 굳어오는 것 같았다.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그저 입만 크게 벌릴 뿐이었다... 이 순간 그는 클래레를 처음 보았던 성악교수 아이젠슈타인의 작은 홀에 있었다.
무대에는 한 광대가 서서 울부짖고 있었다. "대공은 이런 저주를 토하면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들어보세요. 최초로 그녀의 품에 안겼던 그 불행한 자, 그 저주를 실현시킬 그 불쌍한 인간, 그 사람이 바로 납니다! 바로 나예요! 나라구요!"
이 순간 무대는 커다랗게 우지끈 소리를 내며 무너져 내려, 라이젠보그 눈앞에서 바다로 가라앉았다. 그러나 사실은 남작이 마치 꼭둑각시 인형처럼 힘없이 의자와 함께 뒤로 넘어진 것이었다.
지그루트는 튀어 오르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도와달라고 소리쳤다. 하인 두 사람이 달려와 정신을 잃은 남작을 들어올려 테이블 옆 긴 등받이 의자에 눕혔다. 한 사람은 의사를 부르러 달려나갔고, 다른 한 사람은 물과 식초를 가져왔다. 지그루트는 남작의 이마와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그러나 남작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의사가 와서 진찰을 했다. 진찰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마침내 의사가 말했다. "이 분은 죽었습니다."
지그루트 외르제는 마음이 무척 흔들려, 의사에게 필요한 조치를 해달라고 부탁하고는 테라스를 빠져나왔다. 그는 성큼성큼 걸어 응접실을 지나 위층으로 올라가 침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불을 켠 다음 그는 다급하게 글을 쓰기 시작했다.
'클래레, 난 지체없이 몰데로 왔소. 이곳에 당신의 전보가 와 있더군... 솔직히 고백하자면 난 당신 말을 믿지 않았었다오. 그저 당신이 거짓말로 나를 안심시키려 한다고 생각했지. 날 용서하오. 이제 더 이상 의심하지 않겠소. 라이젠보그 남작이 여기 왔었다오. 실은 내가 부른 거요.
하지만 난 그에게 아무 것도 묻지 않았소. 명예를 중시하는 남자로서 그는 나에게 거짓말을 했을 테니까... 나에겐 기발한 생각이 있었어. 남작에게 대공의 저주 이야기를 전해주었던 거야. 그 효과는 정말 놀라울 정도였지. 남작은 의자 뒤로 넘어져서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오.'
지그루트는 손을 멈췄다. 그리고 뭔가 열심히 대단히 진지하고 깊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그는 방 한가운데 우뚝 서서 목소리를 다듬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약간 기어들어가는 것 같은, 어설픈 목소리였다. 그러나 점차 소리가 맑게 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높고 화려하게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나중에는 그 노래 소리가 마치 파도에 부딪쳐 울리듯이 격렬하게 터져 나왔다. 안도의 미소가 그의 얼굴에 흐르고 있었다. 그는 숨을 깊이 내쉬었다. 그는 다시 책상으로 다가가 그의 전보에 덧붙였다. '너무나 사랑하는 클래레! 용서해주오! 모든 게 다시 원래처럼 좋아졌소. 사흘 안에 당신 곁에 도착할 수 있을 거요...'
<끝>
라이젠보그 남작의 운명 - 7. 저주의 정체
- 세부
- 주동식에 의해 작성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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