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말씀 좀 들어주십시오." 지그루트 외르제가 말했다. 남작은 지그루트의 목소리가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폭이 좁고 작은 마차를 타고 푸른 바닷가를 따라 이어진 아름다운 오솔길을 달려갔다. 두 사람 모두 입을 다물었다. 라이젠보그는 감히 나서서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의 눈길은 거의 움직이지 않는 바다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파도의 숫자를 세어보고 싶은 그런 기분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그것은 덧없고 이상한,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별들이 위에서 천천히 방울지어 떨어져 내리는 느낌이었다. 그 생각의 끝은 클래레 헬이라는 이름이었다. 그런 이름의 여가수가 이 세상에 분명 있으며, 세상 어디선가 배회하고 있으리라는 그런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런 것은 별로 대수로운 것도 아니다... 마침내 마차가 덜커덕 흔들리더니 온통 짙은 초록색에 싸여 있는 아담한 하얀 집 앞에 멈춰 섰다. 그들은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베란다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얼굴 표정이 엄숙한 하인 한 사람이 시중을 들었다. 이 하인이 잔에 포도주를 부을 때에는 마치 위협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투명한 북유럽의 밤 하늘은 끝간데 모르게 한없이 고요했다.
"자, 그런데요?" 라이젠보그는 마치 둑이라도 터진 것처럼 초조한 생각이 밀려들었다.
"전, 이제 끝장이 났습니다." 지그르트는 멍한 시선을 앞으로 향하며 이렇게 말했다.
"왜 그런 생각을 하시오?" 라이젠보그는 억양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글쎄, 제가 어떻게 해드리면 좋겠습니까?" 그는 기계적으로 덧붙였다.
"그럴 일도 별로 없습니다.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지그르트는 테이블 보, 난간, 정원, 창살, 길거리, 바다 너머 저 멀리로 시선을 던졌다. 라이젠보그는 마음이 굳어진 채 여러 가지 생각이 동시에 스쳐 지나갔다. 무슨 일이 있었을까? 클래레가 죽기라도 했나? 지그루트가 그녀를 죽인 것일까? ...그래서 바다에 던졌을까? 아니면 지그루트가 죽었단 말인가? 이런 바보 같으니... 그럴 순 없지... 이 친구는 지금 내 눈앞에 앉아 있지 않은가... 그런데 왜 아무 말도 않는 거야?
그리고 갑자기 어떤 엄청난 불안감에 사로잡혀 라이젠보그는 말을 내뱉었다. "클래레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그러자 가수는 천천히 남작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그의 약간 뚱뚱한 얼굴이 안으로부터 빛을 내기 시작하고, 이상한 웃음을 띤 것 같았다. 만약 그게 그의 얼굴에 어른거리는 달빛이 아니라면 말이다. 지그루트는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고, 발을 테이블 아래로 길게 뻗고 있었다. 남작은 그 순간 자기와 함께 앉아 있는 이 눈빛이 흐릿한 사나이가 세상에서 두 번 다시 찾아보기 힘든 광대처럼 느껴졌다.
녹색 숄이 베란다 난간에 걸려 있었다. 순간 남작에게는 그것이 무척 오래 전부터 친숙한 물건처럼 보였다. 그런데 이 우스꽝스러운 물건이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혹시 난 지금 꿈을 꾸는 게 아닐까? 나는 지금 몰데에 와 있다... 정말 희한한 일이다... 내가 맑은 정신이었다면 이 가수 녀석에게 이렇게 말했을 텐데... '이봐, 무슨 일이야? 어이 광대, 나한테 뭘 바라는 거야?' 하고 말이다...
그는 불쑥 아까 했던 질문을 다시 던졌다. 아까보다 훨씬 조용하고 침착하게 되풀이해 물었다. "클래레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그러자 가수는 몇 번씩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클래레가 문제지요... 당신은 정말 내 친구 맞지요?"
라이젠보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어딘지 오싹하는 기분이었다. 미지근한 바람이 바다에서 불어왔다. "난 당신의 친구요. 나에게는 딱딱하게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어떻게 해주면 좋겠습니까?"
"남작, 그 날 밤 일을 기억하시겠지요? 우리가 작별 인사를 주고받던 그 날 밤 말입니다. 브리스톨 호텔에서 같이 저녁을 먹고 역에까지 배웅을 나와 주셨지요..." 라이젠보그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내가 탔던 바로 그 기차로 클래레 헬이 비엔나를 떠난 것은 아마 꿈에도 무르셨을 겁니다..."
라이젠보그는 머리를 무겁게 가슴 쪽으로 숙였다.
"나 역시 당신이나 마찬가지로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습니다." 지그루트는 말을 이었다.
"다음 날 아침 식사를 하는 역에 도착해서 비로소 클래레를 보았습니다. 그녀는 패니 링아이저와 함께 식당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더군요. 당시 상황이나 그녀의 거동을 보고 나는 그녀를 만난 것이 그저 우연일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계속하시오." 남작은 말하며 약간씩 흔들리는 푸른 숄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나중에 그녀는 그게 우연이 아니었다고 내게 고백하더군요... 그날 아침부터 우리는 쭉 함께 지내게 되었습니다. 클래레, 패니 그리고 저 말입니다. 오스트리아에는 기가 막힌 호수가 많지요... 우리는 그런 호반에 머물기로 했습니다. 사람들과 떨어진, 물과 숲 사이 작고 유쾌한 집을 장만했습니다. 우리는 무척 행복했지요."
지그르트는 환장할 정도로 느릿느릿 말했다. 이 자식이 왜 날 이곳으로 불렀을까? 라이젠보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내게서 뭘 원하는 거야? 그녀가 저자한테 고백했을까? 난 무엇 때문에 여기 이 몰데의 베란다까지 와서 저 광대 자식과 함께 앉아 있지? 왜 저 자식은 날 저렇게 가만히 쳐다보는 거야? 이건 모두 꿈이 아닐까? 나는 어쩌면 지금 클래레의 품에서 쉬고 있는 것 아닐까? 결국 그날 밤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 아닐까? ...그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크게 부릅떴다.
"저의 원수를 갚아주시겠습니까?" 지그루트는 불쑥 이렇게 물었다.
"원수를 갚아요? 아니... 무슨 얘깁니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남작은 이렇게 되물으면서 자신의 목소리가 아주 멀리서 들려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가 나를 파멸시켰습니다... 난 이제 끝장이 났습니다."
"하여간 이야기를 해보시오." 라이젠보그는 딱딱하고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패니 링아이저 양도 함께 있었습니다." 지그루트는 계속했다. "그 아가씨는 좋은 사람일 겁니다. 그렇죠?"
"그럴 겁니다..." 남작이 대답했다. 그리고 갑자기 그는 그 푸른 빌로드 가구와 싸구려 커튼이 걸린 어두컴컴한 방에서 패니의 어머니와 함께 얘기했던 것이 몇 백 년 전의 일처럼 눈앞에 떠올랐다.
라이젠보그 남작의 운명 - 6.
- 세부
- 주동식에 의해 작성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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