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6월도 하순 무렵이었다. 스칸디나비아 출신 가수 지그루트 외르제가 비엔나 오페라단에서 트리스탄 역을 맡아 노래를 불렀다. 그의 목소리는 특별히 격조가 높지는 않았지만 맑고 탄력이 넘쳤다.
그는 대단히 키가 크고 살이 찐 편이었다. 노래를 부르고 있지 않을 때, 그의 얼굴에는 특별히 눈에 띄는 표정이 나타나지 않았고 그저 평범했다. 그러나 일단 노래를 시작하면 그의 투명한 잿빛 눈은, 신비롭게 반짝였다. 마치 그의 내부에서 뭔가 타오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의 목소리와 그 눈빛은 모든 사람, 특히 여성들을 황홀한 도취경으로 이끌었다.
클래레는 그 때 공연이 없는 남녀 동료들과 함께 극장 맨 위쪽 특별석에 앉아 있었다. 그녀만이 유일하게 그 날 노래에 감동하지 않은 것 같았다. 다음 날 오전에 그녀는 극장 사무실에서 지그루트 외르제를 소개받았다. 그녀는 그의 어제 공연에 대해서 친절한 말 몇 마디를 건넸다. 그러나 그것은 거의 냉담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의 발언에 불과했다.
그날 오후 외르제는 특별한 초청을 받지도 않았으면서 클래레를 방문했다. 그 자리에는 라이젠보그 남작과 패니 양이 자리를 함께 했다. 지그루트는 그들과 함께 차를 마시며 노르웨이의 작은 마을에서 고기를 잡으며 살아가는 자기 부모에 대한 이야기, 하얀 요트를 타고 여행중이던 어떤 영국 사람이 호젓한 피오르드 해안에 정박하였다가 자신의 노래 소질을 기적처럼 발견한 이야기 따위를 들려주었다.
그의 아내는 이탈리아 사람이었으나 신혼 여행 도중에 대서양에서 물에 빠져 죽었다는 것이었다. 그가 돌아간 뒤에 남아있던 사람들은 오랫동안 침묵에 잠겨있었다.
패니 양은 가만히 자기 앞의 빈 잔을 들여다보고 있었고, 클래레는 피아노 앞에 앉어 닫아놓은 뚜껑 위에 팔꿈치를 고이고 앉아 있었다. 그러나 남작은 말없이 걱정하며, 의문에 빠져 있었다. 대공이 죽은 후, 클래레는 이 세상에 사랑에 들뜬 사람들의 얘기, 격정적인 애정 관계 등 사람이 살아가는 데 없을 수 없는 애정에 관한 얘기 비슷한 것만 나와도 거부 반을 보였다. 손을 들어 가로막는 그 이상한 거부 동작 말이다. 하지만 오늘 지그루트가 신혼 여행 얘기를 할 때에는 왜 그 동작을 취하지 않았을까?
지그루트 외르제는 그 밖의 초청공연 배역으로 '지그프리트'와 '로엔그린' 역을 맡아 노래를 불렀다. 클래레는 그때마다 무감동하게 특별석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지금껏 노르웨이 영사관 말고는 별로 사람들과 사귀지 않았던 이 북유럽의 가수는 매일 오후가 되면 클래레의 집을 찾아왔다. 그리고 그때마다 그는 라이젠보그 남작이나, 특별한 경우를 빼놓고는 패니 링아이저도 늘 만나곤 했다.
7월 27일 외르제는 마지막으로 트리스탄 역을 맡아 무대에 나섰다. 이번에도 클래레는 무감동한 표정으로 객석에 앉아 있었다. 다음 날 아침 그녀는 패니와 함께 대공의 묘소를 찾아가 엄청나게 큰 화환을 그 앞에 놓고 돌아왔다. 그리고 그날 저녁, 내일이면 비엔나를 떠날 이 초청 가수의 환송 파티를 열었다.
엄청나게 많은 친구들이 빠짐없이 거기 모여들었다. 지그루트가 그녀에게 완전히 푹 빠져 있다는 것은 누구의 눈에도 분명했다. 늘상 그런 것처럼 그는 홍분하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런 이야기 가운데 그는 자기가 배를 타고 이곳으로 오는 도중에 러시아 대공과 결혼한 한 아라비아 여자로부터 손금을 보았다는 얘기를 했다. 그 여자는 그에게 곧 생애의 가장 운명적인 시기가 다가올 것이라고 예언했다는 것이다.
그는 그 예언을 단순한 홍미거리 이상으로 확고히 믿고 있었다. 사실 그는 미신을 단순한 화젯거리 이상으로 여기고 있었다. 어떤 에피소드는 다른 사람에게도 잘 알려진 것이었다. 즉 그가 지난 해 초청 공연을 하기로 되어 있던 뉴욕에 도착한 직후 선박의 상륙용 다리에서 검은 고양이가 다리 사이를 빠져 달아난 일이 있었다. 그는 바로 그날 유럽으로 가는 배를 타고 말았다. 계약 위반에 따라 엄청난 많은 배상금을 물어야 하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그로서는 그러한 이상한 징조들과 인간의 숙명 사이에 어떤 비밀스러운 관계가 있다고 믿을 만한 나름대로의 근거를 충분히 갖고 있었다. 런던의 코벤트 가든 극장에서 공연을 하는 어느 날 밤, 그는 무대에 서기 전에 할머니로부터 전해 받은 주문을 암송하는 것을 잊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날 밤 그는 갑자기 음성이 나오지 않는 경험을 했던 것이다.
또 어느 날 밤에는 꿈에 분홍빛 타이츠를 입고 날개가 달린 요정이 나타나, 그가 좋아하는 이발사가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준 적도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실제로 그 이발사는 목을 매 죽은 시체로 발견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외르제는 짧지만 내용이 의미심장한 편지 한 장을 항상 몸에 지니고 있었다.
그 편지는 브뤼셀에서 열린 심령술사 회의에서 이미 사망한 여가수 코르넬리아 루얀의 혼령으로부터 건네받은 것이었다. 그 편지는 유창한 포르투갈어로, 지그루트가 유럽과 미국을 통틀어 가장 위대한 가수가 될 것이라는 예언을 담고 있있다. 그는 이 날 이 자리에서 그런 것들을 몽땅 얘기했다. 심령술사 회의에서 만들어진, 그린우드 회사가 만든 분홍색 편지지에 쓰여진 그 편지가 사람들의 손에서 손으로 전해졌다. 사람들은 그 편지를 보느라 술렁거렸다.
그러나 클래레 본인은 거의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다만 가끔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라이젠보그는 점점 더 불안해 견딜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한층 예민해진 그의 눈에는 분명 위험한 징조가 시시각각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특히 지그루트는 저녁식사 내내 남작에게 묘하게 친근한 태도를 보였다. 이것은 예전 클래레의 애인들이 그랬던 것과 꼭 같았다.
지그루트는 저녁식사를 하면서 남작을 몰데 피요르드 해안에 있는 자기 저택으로 초청하는가 하면 나중에는 친밀하게 서로 말을 트자는 얘기까지 했다. 게다가 패니 링아이저는 지그루트가 말을 건넬 때마다 온몸을 부르르 떠는가 하면, 그가 커다랗고 차가운 잿빛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면 얼굴이 창백해졌다 벌개졌다 오락가락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이제 떠날 시간이 다 되었다고 말하자, 그녀는 큰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그러나 클래레는 여전히 침착하고 담담한 표정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그녀는 지그루트의 불타는 듯한 시선에도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그와 나누는 대화 역시 다른 사람들과 하는 것보다 특별히 더 진지한 것도 아니었다. 마침내 그가 클래레의 손에 키스를 한 후 간청하는 듯한, 맹세하는 듯한, 미칠 것 같은 눈길로 그녀를 올려다보았을 때도 엷은 베일에 싸인 듯한 그녀의 눈빛이나 표정에는 전혀 변화가 없었다.
라이젠보그는 이 모든 것을 의혹과 공포의 심정으로 유심히 관찰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은 연회가 모두 끝나고 서로 작별 인사를 나눌 때 일어났다. 남작으로서는 전혀 예기치 못했던 일이었다. 남작이 맨 마지막으로 다른 사람들처럼 클래레 손에 키스를 하고 돌아서려는 순간, 그녀는 그의 손을 꼭 쥐고는 속삭였다. "다시 오세요."
그는 자기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 한 번 그의 손을 꼭 쥐더니 그의 귀 가까이 입을 대며 다시 되풀이했다. "다시 오세요. 한 시간 안에 오실 줄 알고 기다릴께요."
거의 휘청거릴 것 같은 발걸음으로 그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집을 나왔다. 그는 패니 양과 함께 지그루트를 호텔까지 바래다주었다. 지그루트가 클래레에 대해서 마치 꿈이라도 꾸는 것처럼 주절대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지만 그것은 먼데서 들려오는 소리처럼 느껴졌다.
이어서 그는 부드럽고 서늘한 밤의 공기를 마시며 고요한 거리를 지나 패니 링아이저를 마리아힐프 구역으로 데려다 주었다. 패니 양은 마치 어린애처럼 발그스레한 뺨 위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모습마저도 안개 너머로 보이는 것처럼 희미하게 느껴졌다.
그런 다음에야 그는 마차를 세워 몸을 싣고 클래레의 집으로 달려갔다. 그녀 침실의 커튼 사이로 불빛이 새어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녀의 그림자가 거기 살짝 스쳐 지나가는 모습을 그는 보았다. 다음 순간 그녀가 커튼 사이로 머리를 내밀고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보였다. 결코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라이젠보그 남작의 운명 - 3. 불안한 라이젠보그
- 세부
- 주동식에 의해 작성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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