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서 그는 자신의 인간 관계를 활용하기 시작하였다. 클래레가 그 이듬해 벌써 비엔나 오페라단과 출연 계약을 맺게 된 것에는 그의 이런 노력이 적지 않게 작용하였다. 초청 공연이 성공적으로 끝난 다음 클래레는 10월에 정식 계약을 체결했다. 비엔나에서 최초의 공연을 마친 저녁, 분장실에서 그녀는 라이젠보그가 보낸 화려한 꽃바구니를 받았다. 이 꽃바구니는 남작의 소원과 희망을 동시에 드러내고 있었다.

남작은 기분이 들떠서, 공연이 끝나고 나서 그녀를 만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그는 이번에도 또 다시 선수를 빼앗긴 것을 알고 무력감에 사로잡혔다. 2,3 주 전부터 클래레와 함께 연습을 해왔던 금발의 남성이 그녀로부터 '권리'를 인정받았던 것이다. 그 남성은 작곡가이자 극장의 조감독으로서 상당한 지위를 갖고 있는 인물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녀 스스로 그 남성의 권리를 무슨 일이 있어도 훼손시키지 않으려고 했다.

그로부터 7년의 세월이 홀렀다. 이 조감독의 뒤를 이어 많은 남자들이 클래레를 거쳐갔다. 조감독의 뒤를 이어 두려움을 모르는 승마의 명수 클레멘스 폰 로데빌 씨, 그리고 그 뒤에는 가끔 자신이 지휘하는 오페라와 함께 큰 소리로 노래를 불러 가수의 노래가 들리지 않을 때도 있다는 악장(樂長) 빈센츠 클라우디 씨가 자리를 이어받았다.

클라우디 씨 뒤에는 알반 라토니 백작이었다. 그는 트럼프 도박을 하다가 헝가리에 있던 자신의 영지를 몽땅 날리고 나중에는 다시 오스트리아 평야 지대에 있는 성 하나를 딴 풍채 좋은 한량이었다. 백작 다음에는 에드가 빌헬름 씨가 등장했다.

그는 극작가로서 자기가 쓴 발레 대본에 쓸 음악을 작곡시키기 위해 엄청난 돈을 쓰는 인물이었다. 또 얀츠 극장을 빌려서 자기가 쓴 비극을 공연하기도 했다. 그는 자기 시를 그 도시에서 가장 얇은 고급지에, 가장 아름다운 글씨체로 인쇄하도록 하곤 했다.

그 다음에는 아마두스 마이어라는 굉장한 미남 신사가 나타났다. 그는 나이가 열 아흡인데다 거꾸로 설 줄 아는 폭스테리어 애완견 말고는 가진 게 전혀 없었다. 그 외에는 아무 특징도 없는 사나이었다. 이 마이어씨 뒤를 이은 인물이 바로 제국에서 제일 가는 멋쟁이 신사라는 리하르트 베덴브루크 대공이었던 것이다.

클래레는 자신의 애정 행각을 숨기는 법이 전혀 없었다. 그녀는 언제나 중산층의 평범한 집에서 살고 있었다. 다만 바뀌는 것은 그 집의 바깥 남자뿐이었다. 대중 사이에서 그녀의 인기는 굉장했다. 상류층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일요일마다 미사에 참석하고, 한 달에 두 번씩 고해성사를 하며, 교황이 직접 정결 의식을 치른 성모상을 항상 수호자로서 가슴에 달고 다닌다는 것, 또 자기 전에 반드시 기도를 드린다는 사실 등이 상류층 사람들에게 무척 호감을 주었던 것이다.

도시에서 가끔 열리는 자선 바자회에 그녀는 빠지지 않고 초대를 받았다. 물론 그녀가 직접 물건을 파는 일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가문 좋은 귀부인들이나 돈 많은 유태계 부자 상인의 부인들도 모두 클래레와 함께 자신의 물건을 내놓는 것에서 행복감을 느꼈다.

열광적인 젊은 남녀 팬들은 무대로 통하는 문 곁에 지켜 서서 그녀를 기다리곤 했다. 그리고 그녀는 이들을 향해 사람의 넋을 뺄만큼 황홀한 미소를 지어 보이곤 했다. 그녀는 자기에게 보내온 꽃들을 그 인내심 많은 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한 번은 깜박 잊고 분장실에 꽃을 그냥 두고 온 일이 있었다. 그 때 그녀는 자신의 용모에 무척 잘 어울리는 비엔나 사투리로 이렇게 말했다.

"어쩜 좋아! 오늘은 샐러드(꽃을 비유한 것 - 편집자 주*)를 잊고 그만 내 방에 두고 나왔네! 여러분, 뭘 좀더 드실 분들은 내일 오후에 저희 집으로 오세요." 이렇게 말하고 나서 마차에 올라타 막 떠나려는 순간 그녀는 다시 창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소리쳤다. "커피 정도는 대접할 수 있답니다!"

이런 초대에 선뜻 응할 만큼 용기 있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았다. 그리고 이 소수의 열성 팬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패니 링아이저 양이었다. 클래레는 패니 양과 농담 섞어 얘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마치 대공비(大公妃)처럼 상냥한 표정으로 패니 양의 가족에 대해 묻기도 했다. 클래레는 이 싱싱한 처녀 아이가 발랄하게 수다를 떠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그녀는 다시 한 번 놀러오라고 초대했다.

패니는 이 초대에 응했다. 그리고 곧 이 예술가의 집에서 두드러진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녀가 이렇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클래레가 아무리 친밀하게, 비둘기처럼 다정하게 신뢰감을 나타내도 패니는 결코 클래레에게 친근한 것 같은 태도를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패니 양도 여러 번 청혼을 받았다. 청혼한 상대방은 대부분 그녀가 무도장에 함께 춤추러 다니곤 했던 마리아힐프 공장주들의 아들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 청혼을 모두 거절했다. 그건 일종의 규칙 같았다. 그녀는 이제 스스로도 어쩔 수 없이 차례차례 클래레의 연인들에게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이었다.

클래레는 베덴브루크 대공을 3년 이상 줄곧 사랑했다. 그 열정과 진실함은 그 이전의 어떤 남성에게 대한 것보다 더 깊은 것으로 보였다. 지난 10년 동안 수없이 실망을 맛보고도 결코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라이젠보그조차도 이제는 10년 동안 정성을 들여 사모해왔던 그 행복이 영원히 꽃피지 못할지 모른다는 걱정을 진지하게 하게 되었다.

그는 클래레가 그 동안 사귀던 남성에 대해 싫증을 내는 것 같은 조짐을 보기만 하면 어떤 경우 어떤 순간에라도 자기가 그 동안 사랑하던 사람에게 이별을 고하곤 했다. 클래레의 사랑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려는 것이었다. 이번 리하르트 대공이 갑자기 사망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사실 이번에는 어떤 확신 때문이 아니라, 그저 습관적인 행동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일은 라이젠보그에겐 처음이었다. 클래레가 대공의 죽음을 너무 고통스러워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제 그녀가 인생의 모든 즐거움을 영원히 포기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매일 작고한 대공의 묘소를 찾아가 꽃을 바쳤고, 화려한 옷들은 모두 벗어서 지붕 밑 다락방에다 처박아 버렸다. 장신구들은 책상의 가장 아래 손이 잘 닿지 않는 서랍 속에 넣어 버렸다. 영원히 무대를 떠나겠다는 그녀의 생각을 바꾸기 위해 그야말로 진지한 설득 작업을 해야 했다.

복귀 무대가 대단히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뒤에,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녀의 삶은 이전과 달라지지 않은 것 같았다. 그 동안 약간 소원했던 예전의 친구들도 다시 모여들었다. 음악 평론가 베른하르트 포이어슈타인은 점심 식사로 뭘 먹었건 상관없이 항상 짧은 윗도리에 시금치나 토마토 자국을 묻힌 채 나타나 남녀 배우나 무대감독 등에게 욕설을 퍼부어댔다. 클래레는 이걸 무척 재미있어 했다.

죽은 리하르트 대공의 두 조카인 루치우스와 크리스티안은 베덴브루크 가문의 방계에 속한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예전처럼 지극히 담백하고 공손하게 클래레를 대했다. 그녀는 거기 대해서도 별 얘기가 없었다. 또 프랑스 대사관에 근무하는 한 신사와 체코의 피아노 명인을 새로 소개받기도 했다. 6월 10일에는 비로소 경마를 하러 나가기도 했다.

그러나 다소 문학적 재능이 없지 않은 루치우스 대공이 그녀의 상태에 대해 표현한 것이 있었다. 즉 '그녀의 영혼이 겨우 깨어났지만, 그 마음은 여전히 조는 듯 잠겨 있다'는 것이었다. 사실 그 말 그대로였다. 나이가 젊거나 늙은 그녀의 친구들 가운데 누군가가, 이 세상에는 부드러운 사랑과 격정 같은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아무리 넌지시 암시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녀는 그런 말을 듣자마자 곧 미소가 사라지고, 눈빛이 어두워졌다. 때로는 손을 가볍게 쳐들어 이상야릇한 거부 동작을 나타내기도 했다. 이런 거부의 행동은 마치 누구에게나 그리고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