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아침 라이젠보그 남작은 말을 타고 프라터 공원으로 산책을 나갔다. 그는 행복감과 젊어진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자신의 오랜 소원이 이렇게 뒤늦게 이루어진 데에는 보다 깊은 어떤 뜻이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가 지난밤 체험했던 것은 아주 놀라운, 기적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조금 생각을 돌려보면 어쩌면 그것은 지금까지 그가 클래레와 맺어온 관계의 상승이자 필연적인 귀결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는 이제 이것이 만드시 올 수밖에 없는 결론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이제 거기에 이어서 이것저것 앞으로 이어질 장래의 일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앞으로 얼마 동안이나 더 무대에 서게 될까?' 그는 생각해봤다...
'아마 4년이나 5년 정도겠지... 그보다 더 일찍은 아니겠지만... 그렇게 되면 난 그녀와 결혼하겠지. 그러면 함께 시골에서 살기로 하자... 비엔나에서 아주 가까운 생 바이트나 라인쯔(당시 비엔나 서쪽 근교의 고급 주택가) 쯤이 좋겠지. 거기 집을 한 채 사서, 그녀 취향대로 집을 꾸미게 하자. 우린 아주 조용히 살아가겠지... 하지만, 가끔 멀리 여행도 떠나기로 하자... 스페인이나 이집트, 인도 쯤이면...' 그는 말을 타고 호이슈타들 목초지를 빠르게 달리면서 이런 상상을 하고 있었다.
그는 속도를 조금 늦추어 큰 길로 들어섰다. 그리고 프라터 로타리에서 자기 마차로 옮겨 탔다. 그는 포사티 꽃집에서 마차를 멈추고 클래레에게 화려한 흑장미 꽃다발을 보내도록 시켰다. 그는 여느 때처럼 슈바르첸베르그 광장에 바로 맞닿아 있는 자기 집에서 혼자 아침 식사를 했다.
식사 후 그는 안락 의자에 길게 누웠다. 클래레를 보고 싶은 마음이 사무쳤다. 그녀 말고 다른 여인들이 도대체 그에게 무슨 의미를 갖는단 말인가? 그들은 다만 기분풀이의 대상일 뿐이다.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언젠가 클래레가 자기에게 비슷한 말을 해줄 그런 날이 오리라고 믿었다. 다른 남자들이 나에게 무엇이었냐구요? 내가 지금까지 사랑한 유일한 남자, 그 사람은 바로 당신이에요! 이렇게 말할 그런 날이 오리라고 그는 예감하고 있었다.
그는 긴 안락의자에 누워 눈을 감고 그 동안 클래레를 거쳐간 수많은 남자들을 떠올렸다. 그래, 그건 확실해. 그녀는 나 이전에 다른 어느 누구도 진실로 사랑하지 않았던 거야. 항상 나만을 사랑하고 있었던 거지... 모든 사람 안에서 나를 보았던 거야! 남작은 옷을 갈아 입었다. 그리고 재회를 기다리는 그 기쁨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마음에 새기고 싶어서 천천히 그녀의 집으로 향하는 익숙한 길을 걸어 올라갔다.
원형의 광장에는 산책하는 사람들이 무척 많았다. 하지만 이제 사람들이 밖에서 시간을 보내는 계절은 거의 지나가고 있었다. 라이젠보그는 이제 여름이 왔다는 것, 클래레와 함께 여행을 떠나는 자신의 모습을 머리속에 떠올렸다. 그녀와 함께 바다와 산을 즐기게 될 것을 생각하니 기뻐서 견딜 수 없었다. 황홀한 나머지 큰 소리로 환호성이라고 지를 지경이었다. 그는 애써 자기 자신을 억제했다.
그녀의 집 앞에 서서 그는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오후의 햇살이 창문에서 반사되어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그는 대문 쪽으로 계단을 두 개 올라가 초인종을 눌렀다. 그러나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다시 한 번 초인종을 눌렀다. 그래도 반응이 없었다. 라이젠보그는 그제야 문에 저금통 모양 자물쇠가 채워진 것을 발견했다.
이건 도대체 뭐야? 내가 집을 잘못 찾았나? 그녀는 평소 집에 문패를 걸어놓지 않았다. 그러나 맞은편 집에는 늘 그랬던 것처럼 '폰 엘레스코비츠 중위'라는 문패가 그대로 걸려 있었다. 이건 의심할 여지도 없이 그녀의 집인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집은 지금 닫혀있다.
그는 서둘러 계단을 달려 내려와 관리인 집의 문을 열었다. 관리인의 마누라는 어두운 방안 침대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어린아이가 지하층의 작은 창문을 통해 거리를 내다보고 있었다. 또 다른 아이는 입에 빗을 물고 뜻을 알기 어려운 어떤 노래를 흥얼거리는 중이었다. "헬 양은 지금 집에 계시지 않소?" 남작은 물었다. 그러자 여인이 일어섰다. "지금 안 계십니다. 남작 님. 헬 양은 여행을 떠나셨습니다."
"뭐라고?" 남작은 소리를 질렀다.
"아, 참, 그렇지..." 그는 소리가 새는 것처럼 덧붙였다
"세 시에... 그렇지?"
"아니오, 남작 님. 헬 양은 아침 여덟 시에 떠났습니다."
"그래, 어디로? 글쎄, 내 생각으로는 아마 곧장..." 그는 입에서 나오는대로 멋대로 말했다.
"아마 드레스덴으로 바로 갔겠지?"
"아닙니다, 남작 님. 헬 양은 주소를 전혀 남기지 않았습니다. 다만 어디에 있는지 곧 편지로 알리겠다고 그러셨어요."
"그래? 그렇지... 음, 그랬겠지... 그건 그렇고, 아무튼 고마워..." 그는 발걸음을 돌려 거리로 나왔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집 쪽을 돌아보았다. 석양 무렵의 해가 창문에 비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빛나는 모습이 아까 이 집에 올 때의 그 모습과 어쩌면 이리도 다르게 느껴질까? 묵지근하고 어딘지 서글픈, 여름날 저녁의 그 답답하고 울적한 기분이 도시 전체에 드리워 있는 것 같았다.
클래레가 떠났다고? 왜 그랬을까? 그녀 스스로 떠나다니? 도대체 이유가 뭐란 말인가? 이게 무슨 뜻일까? 그는 처음에 오페라 극장으로 가볼까 생각했다. 그러나 모레부터는 여름 휴가로 공연을 쉰다. 그리고 그 전 이틀 동안 클래레의 공연은 없다는 것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는 마차를 타고 패니 링아이저가 살고 있는 마리아힐프 거리 76번지로 달려갔다. 나이 먹은 요리사가 나와 문을 열어주며 말쑥하게 차려입은 방문객을 어딘지 수상쩍다는 듯이 살펴보았다.
그는 링아이저 부인을 찾았다. 그리고 물었다. "패니 양이 지금 집에 있습니까?" 그는 이제 스스로를 억제할 수 없을 정도로 흥분한 상태였다.
"왜 그러시는 건데요?" 링아이저 부인이 빠른 말투로 물었다. 남작은 자기 이름을 말해줬다.
"아, 그러시군요. 남작 님, 아무쪼록 안으로 들어오세요."
부인이 말했다.
남작은 현관에 서서 다시 한 번 물었다. "패니 양은 집에 없습니까?"
"자, 남작 님, 우선 안으로 잠깐 들어오세요."
라이젠보그는 별 수 없이 그녀 뒤를 따라갔다. 그는 천장이 낮고, 푸른 빌로드 빛 낡은 커튼이 드리워진, 가구들도 같은 색깔로 비치해 놓은 어두침침한 방에 들어갔다.
"그래요, 패니는 지금 집에 없답니다. 헬 양이 그 애를 휴가에 데리고 떠났습니다."
"어디로 간 겁니까?" 남작은 물었다. 그는 피아노 위 금박 액자에 담긴 클래레의 사진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어딘지는 저도 모릅니다" 링아이저 부인이 대답했다.
"아침 여덟 시에 헬 양이 직접 찾아와서 저에게 패니와 함께 가게 해달라고 그러더군요. 글쎄, 하도 간절하게 부탁을 하는 바람에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더군요."
라이젠보그 남작의 운명 - 4. 느닷없는 행복과 느닷없는...
- 세부
- 주동식에 의해 작성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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