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여왕'으로 분장한 클래레 헬이 오랜 만에 다시 무대에 나타난 것은 덥지도 춥지도 않은 5월 어느 날 밤이었다(밤의 여왕 : 모짜르트와 쉬카네더 공동창작 오페라 '마술 피리' 에 나오는 여가수 역할).
이 여가수는 거의 두 달간이나 오페라에 출연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다. 3월 15일 리하르트 베덴브루크 대공이 말에서 떨어져 겨우 몇 시간만에 클래레의 품에 안겨 세상을 떠난 것이다.
대공이 병원에 누워 있늠 몇 시간 동안 클래레는 줄곧 그의 곁에 있었다. 클래레의 상심이 너무 심해 사람들은 그녀의 목숨까지 위태롭지 않을까 걱정할 지경이었다. 또 정신이 이상해진 것 아닌가 이야기도 나왔고, 또 최근에는 그녀의 목소리가 상한 것 아닌가 걱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음성에 대한 걱정도 처음 두 가지 걱정처럼 기우였다는 것이 곧 드러났다. 다시 관중 앞에 선 그녀는 호의와 기대 어린 박수로 환영을 받았다. 그리고 첫 번 째 긴 아리아가 끝나자마자 그녀의 절친한 친구들, 그리고 그다지 가깝지 않은 다른 친구들까지 그녀에게 축하 인사를 쏟다부었다.
5층 관람석에서 앉아 있던 패니 링아이저 양의 앳띤 얼굴도 기쁨에 넘쳐 환해졌다. 그리고 그녀 뒤에 앉아있던 다른 팬들도 클래레의 다정한 친구인 이 아가씨에게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패니는 마리아힐프 거리(비엔나의 서쪽에 있는 제6구역)의 레이스 상인의 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 인기 여가수의 가장 가까운 친구의 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클래레 집 오후 간식 시간에 초대를 받곤 했다. 패니가 작고한 대공을 남몰래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다들 알고 있었다.
공연의 중간 휴식 시간에 패니 양은 자기의 남녀 친구들에게 이 '밤의 여왕' 역으로 클래레가 다시 등장한 배경을 들려주었다. 즉 클래레는 라이젠보그 남작의 아이디어를 받아들여 이 역할에 출연하기로 했던 것이다. 남작은 이 검은 의상이 지금 그녀의 기분에 딱 들어맞을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는 얘기였다.
남작 자신은 언제나 그런 것처럼 오케스트라 바로 앞에 자리잡고 앉아 있었다. 바로 중앙통로 제일 첫째 줄 끝 좌석이다. 남작은 거기에서 인사를 건네오는 친구들에게 기쁜 미소로 응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미소엔 어딘지 고통이 담겨 있었다. 오늘 그의 머리엔 갖가지 추억이 그의 머리를 스쳐가고 있었다.
남작은 10년 전에 클래레를 알게 되었다. 당시 그는 어떤 고독한, 붉은 머리칼의 젊은 여인을 도와주고 있었다. 그 젊은 여인의 예술 수업을 후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여인은 아이젠슈타인 음악학교의 '연극의 밤'에 미뇽 역으로 처음 데뷔하게 됐다. 바로 거기에 남작이 참석했다가, 그 여인이 출연한 같은 장면에서 필리네 역을 맡아 노래하는 클래레를 처음 보았던 것이다.
당시 남작은 스물 다섯의 나이에 독신이었고, 매인 데 없이 자유로운 몸이었다. 그는 미뇽 역을 맡은 여인에게는 완전히 관심을 잃어버리고, 공연 후 나탈리에 아이젠슈타인 부인을 통해 피리네를 소개받았다. 그 자리에서 남작은 자신의 마음, 재산 그리고 극장 총감독과의 인간 관계 등을 모든 것을 그녀를 위해 바치겠노라고, 그리고 그런 행동을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클래레는 당시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다. 어머니는 우정국 중간 간부의 미망인이었다. 그리고 클래레는 어떤 의대생과 열애중이었다. 그녀는 가끔 시 외곽 알저포슈타트 구역에 있는 그 대학생 방에서 차를 마시고 잡담을 나누곤 했다. 그녀는 남작의 폭풍우 같은 구애를 거절했지만, 남작의 찬사 때문에 기분이 좋아져서 자신이 의대생과 애인 사이라는 것을 숨기지 않고 털어놓았다.
클래레가 자신의 애정 관계를 숨김없이 털어놓자, 남작은 다시 붉은 머리칼의 여자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러나 클래레와의 친분 관계는 계속 유지했다. 그는 축제일이랄지 무슨 구실이 있을 때마다 그녀에게 꽃과 봉봉 과자를 보냈고, 가금 우정국 중간 간부의 미망인 집을 인사차 방문하기도 했다.
가을에 클래레는 데트몰트 극장과 최초의 계약을 맺었다. 라이젠보그 남작은 당시 아직 중앙 관청에서 근무하는 관리 신분이었다. 그는 처음 맞는 크리스마스 휴가를 이용하여 클래레가 새롭게 머물게 된 데트몰트를 방문했다. 그는 클래레와 사귀던 그 의대생이 의사가 되어 지난 9월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고 새로운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남작이 도착하자 클래레는 여전히 뻣뻣한 태도로 그에게 자신이 궁정 극장의 테너 가수를 사랑하게 됐노라고 밝혔다. 때문에 남작은 클래레와 시내의 숲에서 플라토닉한 산책을 하고, 다시 그녀의 동료 몇 사람과 함께 극장 안의 레스토랑에서 저녁 식사를 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데트몰트에서는 그 외에 특별한 추억을 만들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데트몰트를 자주 방문했다. 그는 예술 애호가로서 클래레의 눈부신 발전에 큰 기쁨을 느꼈다. 또 문제의 그 테너 가수가 다음 해 시즌에는 함부르크로 옮겨가기로 계약을 맺은 사실도 그가 기대를 품는 요인이었다. 그러나 다음 해에도 그는 역시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클래레가 루이스 베르하옌이라는, 네덜란드 출신 거물급 상인의 구애를 받아들이기로 마음을 굳혔기 때문이다.
세 번째 시즌에 클래레는 드레스덴 궁정 극장 전속 가수로 초빙되었다. 이 때 남작은 아직 젊은 나이에 전도 유망한 국가 관리였으나 미래의 출세마저 포기하고 드레스덴으로 거주지를 옮겼다.
이제 그는 매일 저녁 클래레와,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이 어머니는 무척 영악스럽게 처신했다. 딸이 벌이는 어떤 연애 행각도 교묘하게 모르는 체했던 것이다. 남작은 이제 새로 희망을 품게 되었다. 그러나 재수가 없었다. 그 네덜란드 상인에게는 고약한 습관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편지를 보낼 때마다 다음 날 자기가 드레스덴으로 찾아올 것이라고 예고하였고, 자기가 보낸 첩자들이 클래레를 둘러싸고 암암리에 감시하고 있다는 점을 넌지시 암시하곤 했다. 그리고 그녀가 정절을 지키지 않을 경우, 극히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살해하겠다는 위협을 적어 보내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 상인이 실제로 드레스덴을 찾아온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오직 그 편지는 클래레를 극도의 신경과민 증세로 몰아갔을 뿐이었다. 그래서 라이젠보그 남작은 어떠한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그 상인과 클래레의 관계를 끝장내주기로 결심했다. 그는 그 상인과 개인적으로 담판을 짖기 위해 데트몰트로 출발했다.
그러나 그 상인은 남작에게 놀랍게도 엉뚱한 얘기를 했다. 자신이 클래레에게 보낸 사랑의 편지나 위협의 편지는 단지 기사도적인 의무감에서 쓴 것일 뿐이라는 설명이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이 앞으로 그런 의무감에서 벗어난다면 그보다 더 반가운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남작에게 분명히 밝혔다.
라이젠보그는 마치 하늘에라도 오를 듯한 행복한 마음으로 드레스덴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클래레에게 이번 담판이 아주 원만하게 마무리되었다고 알려주었다. 그녀는 그에게 진실로 감사하다는 인사를 했다. 그러나 남작이 그녀와의 애정 관계를 더 진척시키려고 하자, 그런 시도를 단호하게 거절했다. 남작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다지 말을 많이 하지는 않았지만 남작은 클래레의 태도에 대해 절박하게 그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마지못해 털어놓았다. 남작이 드레스덴을 떠나있는 동안 다른 사람도 아닌 카예탄 황태자가 자신에게 격렬한 사랑을 고백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황태자는 클래레가 이 사랑을 받아주지 않으면 자살하겠다는 맹세까지 했다는 것이었다.
왕실과 나라 전체를 슬픔에 빠지게 하지도록 하지 않으려면 그녀가 황태자의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비통으로 찢긴 가슴을 안고 라이젠보그는 드레스덴을 떠나 비엔나로 돌아왔다.
라이젠보그 남작의 운명 - 1. '밤의 여왕' 클래레 헬
- 세부
- 주동식에 의해 작성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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