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할머니는 나를 깨우고, 곧 내가 해야 할 일을 가르쳐주었습니다. 나는 실을 짜야 했습니다. 그리고 개와 새도 보살펴야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집안일에 재빨리 익숙해졌고, 주위의 모든 것에 대해 잘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원래부터 으레 그래야만 되는 것 같았고, 할머니에게 이상한 점이 있다던가, 집이 괴상하게 생기고 속세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든가 또 새가 좀 특별하다든가 하는 것들은 염두에 두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새의 아름다운 모습은 정말 언제나 감탄스러웠습니다. 오색찬란한 깃털에 아주 아름다운 담청색과 타는 듯한 진홍색이 목과 몸에 어우러져 있었습니다. 게다가, 노래할 때면 언제나 자랑스러운듯이 거드름을 피우는 그 모습이 더욱더 화려한 깃털의 생김새를 돋보이게 했기 때문이죠.
할머니는 가끔 외출했다가 저녁에야 돌아오곤 했습니다. 그럴 때면 나는 개를 데리고 마중을 나갔고 할머니는 나를 자기 딸처럼 다정하게 불렀습니다. 나는 마침내 그 할머니가 진심으로 좋아졌습니다. 우리들은 뭐니뭐니해도, 특히 어릴 때는 무엇에나 정이 들게 마련이니까요. 밤에는 할머니가 나에게 글 읽기를 가르쳐줘서, 읽는 법을 금방 배웠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나중에 내가 혼자 있을 때 무한한 즐거움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할머니는 이상한 이야기가 적혀있는 낡은 필사본 책을 몇 권 가지고 있었거든요.
당시의 내 생활을 돌이켜 보면 지금도 여전히 이상한 느낌이 듭니다.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 없이, 그렇게 호젓한 집에서 무척 마음 편하게 지내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개도 그렇고 새도 그렇고 마치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오던 친구 같았습니다. 나는 지금 그 개의 이름을 아무리 생각해도 전혀 기억할 수 없습니다. 무척 이상한 이름이었어요. 그 이름을 당시에는 그렇게도 자주 불렀는데도 지금은 전혀 생각이 떠오르지 않으니 참 이상한 일이죠?
4년 동안 나는 이렇게 할머니와 같이 살았습니다. 그리고 내가 열 두 살이 되었을 때입니다. 할머니가 나를 더욱 믿게 되었는지 마침내 비밀을 하나 털어놓았습니다. 즉 그 새가 날마다 알을 하나씩 낳는데, 그 속에 진주나 보석이 하나씩 들어있다는 얘기였습니다. 나는 그 전에도 할머니가 새장 속에서 뭔가 조심스럽게 꺼내는 것을 늘 보아왔지만, 거기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할머니는 그 얘기를 한 뒤부터는 자기가 없을 때, 이 알들을 받아 값진 보석상자 속에 간직하는 일을 나에게 맡겼습니다.
그리고 할머니는 내가 먹을 음식을 남겨놓고, 전보다 더 오래 몇 주일이고 몇 달이고 집을 비우곤 했습니다. 나는 물레를 윙윙 돌렸고, 개는 컹컹 짖어댔으며, 새는 신기한 노래를 불렀고, 주위의 모든 것이 조용했습니다. 내가 거기에 있는 동안 폭풍이 불거나 천둥번개가 몰아친 기억은 전혀 없습니다. 길을 잃고 찾아 드는 사람도 없었고, 들짐승도 우리들이 사는 집 근처에는 가까이 오지 않았습니다. 나는 내게 주어진 일을 하며 하루하루 만족스럽게 보냈습니다. 사람이 만약 죽을 때까지 그렇게 쭉 평온한 생활을 계속할 수 있다면 아마 무척 행복한 일생일 것입니다.
나는 그 집에 있는, 몇 권 되지 않는 책을 읽고, 세상과 세상 사람들에 대해 아주 희한한 상상을 하곤 했습니다. 모든 것을 내 생활, 즉 나하고 같이 사는 개와 새, 그리고 할머니와 연관시켜 상상한 것입니다. 명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오면, 그들이 꼭 조그마한 그 개처럼 느껴졌고, 화려한 귀부인들은 언제나 그 새처럼 생각되었으며, 할머니들은 모두 다 이상한 그 할머니처럼 생각되었던 것입니다.
나는 연애 이야기도 약간 읽었습니다. 그럴 때는 내 자신을 주인공으로 이상야릇한 이야기를 머리 속에 그리곤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멋있는 기사를 머리 속에 그리고, 그를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게 꾸며놓았지만, 정작 내 정성을 다해 꾸며놓은 그 기사가 실제로 어떻게 생겼는지는 생각해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기사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모습을 그려보면 나 자신이 정말 가련해지곤 했습니다.
그럴 경우 나는 그를 설득하려고 한참 동안 감동적인 말들을 머리 속으로 꾸며서 늘어놓기도 하고 때로는 직접 그 말들을 입 밖으로 내서 큰 소리로 되풀이하기도 했습니다. 웃고 계시는군요. 이건 우리들 모두가 젊은 시절 한 때 거쳤던, 그런 일들이지요. 이젠 물론 모두 다 이런 시절을 지나왔으니까요.
그 무렵엔 나는 혼자 있는 것이 더 좋았습니다. 혼자 있으면 집안에서 이것저것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었거든요. 개는 나를 무척 좋아하고 내가 시키는 대로 잘 따라 했습니다. 새는 내가 무엇을 묻거나 언제나 그 노래로 대답을 대신했으며, 물레는 언제나 신나게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나는 뭔가 변화를 바라는 욕망을 전혀 느끼지 않았습니다. 할머니는 오랜 여행을 마치고 돌아올 때면 내가 알뜰하다고 칭찬하면서 내가 그 집에 들어온 이후 살림살이가 훨씬 좋아졌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할머니는 내가 건강하게 잘 자라난 것을 무척 기뻐했습니다. 한 마디로 할머니는 나를 꼭 자기 딸처럼 대했던 것입니다. '기특하구나 애야!' 한번은 할머니가 그렁그렁한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습니다. '지금처럼만 계속한다면 너는 언제까지나 행복할 거다. 그러나 올바른 길을 벗어나면 절대로 잘될 수가 없단다. 조만간 그 벌이 뒤따라오기 마련이야.' 할머니가 이런 말을 해도 나는 그 말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때 나는 온몸에 활기가 넘쳐흘렀기 때문에, 차분하게 앉아 뭔가 생각하기 어려운 그런 시기였으니까요.
한밤중에 문득 잠에서 깨면 할머니의 그 말이 머리에 언뜻 떠오르곤 했습니다. 그러나 할머니가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는 잘 알 수 없었습니다. 나는 그 말을 한마디 한마디 곰곰이 생각해보았습니다. 나는 전에 부귀영화를 누리는 생활에 관한 책을 읽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할머니의 진주와 보석이 무척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언뜻 들었습니다. 이 생각은 점차 나에게 더욱 뚜렷해졌습니다. 그러나 할머니가 말한 그 올바른 길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리저리 생각해봐도 나는 할머니의 말뜻을 잘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 나는 열 네 살이었습니다. 인간이 분별을 갖게 됨으로써, 마음의 순결을 잃게 된다는 것은 인간에게는 불행한 일입니다. 할머니가 집을 비울 때 새와 보석을 훔쳐서 내가 책에서 읽었던 세계를 찾아가는 것은 쉬운 일이었습니다. 그건 오직 내가 마음 먹기에 달려 있다는 것을 나는 잘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때까지 여전히 내 머리 속에 자리잡고 있던 더없이 아름다운 기사와도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이런 생각이 특별히 강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물레 앞에 앉아 일하고 있으려면 본의 아니게 언제나 그 생각이 다른 여러 가지 생각들 사이를 뚫고 나와 되살아나곤 했습니다. 나는 그 생각에 몰두해서 내가 호화찬란하게 차려 입고 기사와 왕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넋을 잃고 이런 생각에 잠겨 있다가 눈을 들어 조그마한 방안에 앉아 있는 내 자신을 보게 되면 정말 슬퍼지곤 했습니다. 그러나 할머니는 내가 일을 하고 있을 때엔 더 이상 내 거동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어느날 할머니는 다시 길을 떠나면서 이번에는 다른 어느 때보다 더 오래 집을 비울 것이니 모든 일에 주의를 게을리하지 말고 부지런하게 집안 일을 잘 돌보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마음속으로 어떤 불안을 느끼면서 할머니와 작별했습니다. 어쩐지 할머니와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던 겁니다. 나는 할머니의 뒷모습을 한참동안 바라보면서 왜 내가 그렇게 불안한지 나 자신도 알지를 못했습니다. 내 계획이 어떤 것인지 나도 잘 알지 못하지만, 그 계획은 이미 세워져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금발의 에크벨트 - 5.
- 세부
- 주동식에 의해 작성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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