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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히 퍼붓는 조소 속에서 불현듯 로빈의 손은 본능적으로 어깨걸이 밑을 찾았다. "하지만 역시 그만둬야지." 그는 겔 말로 중얼거렸다. "부끄럼도 예의도 모르는 돼지 같은 놈들이다. 악마라도 잡아 가라지."
"자, 모두 길이나 비켜라." 입구쪽으로 걸어가며 그는 말했다.
그 때 딱 커다란 덩치를 내밀고 버티며 그의 길을 가로막은 건 과거의 벗 해리였다. 로빈 오이그가 밀어 제치고 나가려는 순간 그는 느닷없이 얻어맞고 바닥에 나뒹굴었다.
"싸움이다, 싸움." "해라 해리!" "뉘어버려." "어이 조심해. 아니 저 놈 피가 나는군!" 입이란 입이 모두 미치광이처럼 외치는 바람에 새까만 나무 선반에 매달아놓은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 덩어리가 마구 흔들리고 벽의 선반에 가지런히 놓여있던 큰 접시까지 서로 맞닿아 달그락 소리를 냈다.
여하간 굉장한 소동이었다. 로빈은 겨우 땅에서 일어났지만 콱 흥분이 치밀어 오르면서 이성이나 자제력을 모두 잃고 말았다. 분노에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 산고양이처럼 대들었으나 노여움만으로 훈련으로 다진 주먹에 맞설 수는 없었다. 여지없이 또 얻어맞고는 그 일격에 그대로 땅바닥에 뻗어버렸다. 주막 안주인이 놀라서 일으켜 세우려 했지만 관리인이 제지하며 가까이 가지 못하게 했다.
"내버려 둬." 그는 말했다. "이제 살아날 거야. 그러면 또 덤비겠지. 아직 덜 맞았거든."
그러나 해리 본인은 옛 우정에서 우러나오는 따뜻한 마음이 되살아났는지 "아니, 이제 그만, 이쯤 해두겠어. 뒤는 당신에게 맡기지, 프리스밤킨씨. 당신도 한 마디 하고싶을 테니까. 그리고 로빈 녀석 싸움을 시작하는 데 쓸데없는 것조차 벗을 줄 모르니까 말이야. 어깨걸이를 너덜너덜 걸치고 덤벼들다니. 임마 로빈, 일어서! 자 이젠 친구다. 너의 일, 너의 고향 이야기를 아직도 뭐라고 그러는 놈이 있으면 너 대신 내가 한꺼번에 맡아 주지."
그러나 로빈의 분노는 누그러지지 않았다. 다시 한 번 하겠다고 발버둥쳤다. 그러나 한편에서 안주인이 말리고 또 해리도 이미 맞설 의향이 없음을 알자 자연 그의 노여움은 마음 속의 앙금으로 가라앉았다.
"자, 이제 감정은 풀자." 해리는 영국인다운 뱃심으로 배포 좋게 말했다. "자, 악수. 다음부턴 이제까지보다 더 사이 좋게 지내자."
"사이좋게?" 로빈 오이그는 거친 소리로 외쳤다. "사이 좋게라구? 천만에,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해리."
"끈덕진 스코틀랜드 근성이구만. 연극 대사는 아니지만, 크롬웰 각하, 제발 벌을 주십사 하는 건가? 네 신상에 뭐가 좋은 건지 모르겠나? 똥 같은 놈, 생각해봐. 사람이 싸운 뒤 화해하는 말 말고 그 이상 할 말이 뭐가 있어?"
아무튼 둘은 이런 식으로 헤어졌다. 로빈 오이그는 아무 소리없이 동전 한 닢을 꺼내 탁자에 던지고 곧바로 주막을 나갔다. 나갈 때 문간에서 잠깐 뒤돌아보며 두고 보자는 뜻인지 위협의 뜻인지 그는 손가락을 세워 해리쪽을 향해 흔들었다. 그리고 밝은 달빛 아래로 사라져갔다.
그가 나간 뒤 관리인과 해리는 사소한 말다툼을 했다. 관리인은 로빈을 괴롭혀준 것이 기뻤던 반면 해리 웨이크필드는 전후가 모순된 태도로 이번에는 로빈의 역성을 들어 자칫하면 싸움도 불사할 태세였다.
"물론 잉글랜드 사람처럼 주먹은 시원치 않지만 그건 지방 특성이라 어쩔 수 없는 거야"라는 요지였다. 그러나 다행히 이번의 싸움은 안주인의 호통으로 그럭저럭 무사히 끝났다. "더 이상 이 집에서 싸움은 안돼요. 하지만 웨이크필드씨, 이제 알게 될 거예요. 옛 친구를 원수로 만든 것이 어떤 결과가 될 것이라는 걸."
"원, 아주머니두, 로빈이란 녀석은 멋진 놈이예요. 원한 같은 건 품지 않아요."
"안심해서는 안되요. 당신이 얼마나 스코틀랜드 사람을 잘 아는지는 모르지만, 그들의 원한과 집념은 대단해요. 제 어머니가 스코틀랜드 사람이었거든요." "그래, 그래서 그렇게 성격이 앙칼맞구먼." 주인 라프 헤스켓이 아내의 말을 받았다.
부부의 대화를 끝으로 화제는 바뀌었다. 술집에는 새로 손님이 들어오고 나가는 손님도 있었다. 이야기는 주로 앞으로 설 장날,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등 각지의 소 시세에 대한 소문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흥정이 시작되고 운 좋게도 해리 웨이크필드의 소떼 얼만가를 유리한 조건으로 사준다는 사람까지 나타났다. 초저녁의 불쾌했던 싸움 같은 건 벌써 잊어버릴만 했다. 그러나 단 한 사람, 설령 에스크에서 이든까지 소라는 소는 몽땅 자기 것으로 만든대도 잊지 않을 사나이가 있었다. 바로 로빈 오이그 매콘비히가 그였다. "아, 무기를 전혀 지니고 있지 않았다니." 그는 중얼거렸다.
"생전 이런 일은 처음이다. 하일랜드에서 태어난 사나이에게 그 단검을 벗어놓으라면 말이 되나, 빌어먹을, 단검 - 그렇다. 잉글랜드의 피, 숙모가 그렇게 말했지. 그 아주머니가 말한 것 치고 그대로 되지 않은 게 없지." 그 무서운 예언이 떠오르자 그의 언뜻 떠올랐던 살의(殺意)는 그대로 움직이지 않는 결심으로 변했다.
"그렇지, 모리슨 녀석, 바로 뒤에서 따라오고 있을 거다. 까짓 백 마일이 떨어졌대도 무슨 상관이냐."
마냥 흥분하기 쉬운 성미는 고스란히 무서운 결의, 그리고 행동력으로 나타났다. 그는 하일랜드의 자랑인 나는 듯한 걸음을 황야로 옮겼다. 오늘 애어비씨의 얘기로 미루어볼 때 모리슨은 반드시 이 길로 올 것이다. 마음은 굴욕감, 그것도 친구에게서 받은 굴욕감 때문에 더욱 쓰라렸다. 그리고 그 친구는 이제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겨졌다. 그에 대한 복수심이 마음 속에 불타 올랐다.
그렇잖아도 그의 자부심, 태생과 가문 등에 대한 은근한 자랑은 말하자면 수전노의 보물과 마찬가지였다. 남몰래 혼자 즐긴다는 의미에서 더욱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것이었다. 지금은 그 보물을 빼앗긴 셈이다. 남 몰래 예배하던 우상이 더럽혀지고 짓밟힌 것이다. 얻어터지고 채이고 모욕을 당한 것이다. 가문의 이름 앞에 얼굴을 내밀 수 없는 심정이었다. 이제 아무 것도 없다. 남은 것은 다만 복수 뿐이다. 이런 생각은 한 발 한 발 숨차게 걸음을 내디딤에 따라 더욱 굳어졌다. 이 복수는 받은 모욕과 똑 같은 모양으로, 일격에 되돌려주지 않으면 안 된다.
로빈이 주막을 나왔을 때 그와 모리슨의 거리는 적어도 7,8마일 정도였다. 모리슨은 소떼의 걸음으로 인해 그리 빨리 움직일 수 없었다. 반면 로빈은 맑은 11월의 달빛 아래 바윗돌과 히이드가 널려있는 들을 나는 듯이 걸어갔다. 밤 서리가 내려 그루터기 밭들과 나무 울타리들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이윽고 모리슨 일행인 듯 소떼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마치 두더지 떼처럼 습지대를 걸어오는 소의 모습이 나타났다. 마침내 만났다. 그는 재빨리 소떼 사이를 뚫고 지나가 모리슨을 찾아냈다.
"어, 수고가 많구만." 모리슨이 말했다. "로빈 매콘비히 아닌가! 갑자기 귀신처럼 웬일이야?" "맞아, 로빈 오이그 매콘비히일세. 아니, 그게 아닐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건 어떻든 상관없고, 그보다 내 단검을 주게."
"뭐라고? 하일랜드에 돌아갈 셈인가? 제기랄, 장에 내놓기도 전에 벌써 다 팔아치웠단 말인가? 원 재빠른 장사꾼이구먼." "아니, 판 게 아니야.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두 번 다시 고향에는 돌아가지 않을 거야. 아무튼 휴, 내 단검을 주게. 주지 않으면 좀 시끄러울지 몰라." "그래, 알겠어. 하지만 로빈, 주기 전에 좀 생각이나 해보세. 본래 이 단검은 하일랜드 사내가 가지면 무섭고 위험한 무기야. 자네 혹시 어디 털러 갈 생각이라도 한 건가?"
"노, 농담은 말게! 아무튼 칼이나 주게." 로빈 오이그는 답답해졌다. "뭐, 그리 급하게 굴진 말게." 사람 좋은 휴 모리슨은 진정시키듯 말했다. "찌르고 베는 것도 좋지만, 더 좋은 것을 알려주지. 이봐, 자네도 알테지만 하일랜드 사내나 로울랜드 사내, 그리고 국경 지방의 젊은이 할 것 없이 모두 한 발 국경만 넘어서면 한 형제나 마찬가지야. 보게, 뒤에서 자꾸 오는 에스크델의 젊은이들이나 싸움 좋아하는 리데스데일, 로카비 친구들도 그렇구, 라스트라자의 4인조나 그밖에 여러 친구들도 이제 자주 만나게 되지 않나! 자네가 뭔가 일을 당했다면 여기 있는 이 힘센 모리슨 나리도 있는데, 설령 칼라일이나 스탄빅스 패들이 한꺼번에 덤빈대도 우리들 손으로 너끈히 맛을 보여줄 수 있어."
"아니, 실은 말이야" 로빈 오이그는 대답했다. 이 이상 휴의 의혹을 받고싶지 않았던 것이다. "블랙워치(스코틀랜드 제42 고지연대의 별명) 부대에 입대했어. 그러니까 내일 아침에 출발해야 해." "뭐, 입대라구? 머리가 어떻게 된 것 아닌가? 아니면 취하기라도 했나? 돈을 주고 그만 둬. 스무 장쯤은 빌려주지. 소만 판다면 스무 장쯤은 어떻게 되겠지."
"뜻은 고마워. 참 고마워 휴. 그러나 난 어떻게든 가야 해. 그러니까, 칼을 줘. 칼 말이야." "그래, 주지. 도저히 말을 들을 것 같지 않군. 그러나 내가 지금 말한 것을 꼭 한 번 생각해보게. 그건 그렇고 볼키다의 산골이 실망할 거야. 다름아닌 로빈 오이그 매콘비히가 엉뚱한 길로 가버리니 말이야."
"볼키다에서 실망한다구? 그렇겠지." 로빈은 상심한듯 말했다. "아무튼 휴, 잘있게. 장사 잘하구. 앞으로 두 번 다시 자네와는 시장에서나 어디서나 만나지 못할 걸세." 그는 바쁜 듯 친구와 악수하고는 오던 길을 다시 빠른 걸음으로 되돌아갔다.
"뭐가 어떻게 된 모양인데." 모리슨은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아침이면 더 자세히 알게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