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지 2 / 전체 8
이야기는 하일랜드의 도운페어를 떠난 다음날 시작된다. 꽤 활기를 띤 시장이었다. 잉글랜드의 북부와 중부에서 적지않은 가축 상인들이 모여들어 돈푼깨나 뿌려대, 하일랜드 농부들은 싱글벙글댔다.
이 시장이 끝나면 상당히 큰 가축떼들을 잉글랜드까지 보내는 일이 남아있다. 물건을 산 주인이 직접 몰고 가는 경우도 있지만 이것은 힘이 많이 들고 또 책임이 무겁고 지루한 일이다. 도살장에 보낼만큼 소를 살찌우는 농장까지는 수백 마일이나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문적인 소몰이꾼을 고용하는 경우가 많다.
하일랜드 지방 사람들은 이 까다로운 소몰이 일의 전문가들이었다. 군인으로서도 그렇지만 이 지방 사람들은 이 소몰이 일에서도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다. 이들은 이렇게 힘든 일을 해내는 것이 고난을 이겨내는 좋은 훈련이 된다고 믿는다. 또 이들은 큰 길을 피해 황무지를 가로지르는 지름길을 잘 알고 있었다. 큰 길은 자칫 소의 다리를 아프게 하기 일쑤고 또 도중에 돈을 받는 경우도 있어서 소몰이꾼들에게는 반갑지 않다.
보통 사람에겐 길조차 잘 보이지 않는 습지대를 가로지르는 지름길은 넓고 푸른 들이 계속 널려있고 소들이 걷기도 편했다. 마음이 내키면 멈춰서서 소들에게 먹이를 뜯길 수도 있다. 해가 저물면 소몰이꾼들은 비나 바람 따위에는 개의치 않고 소 곁에 벌렁 누워 잠든다. 로커벨에서 랭커셔까지 걸어가면서도 이들 강인한 소물이꾼들은 하루도 지붕 밑에서 자는 경우가 없다.
소몰이 삯은 퍽 높은 편이다. 소를 목적지인 시장까지 잘 보내서 목축업자들의 벌이가 되려면 뭣보다도 이들 소몰이꾼들의 기질과 소를 다루는 솜씨, 정직함이 열쇠였다. 그만큼 이들 소몰이꾼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것이다. 반면 그들이 소를 모는 동안의 비용은 일체 자기 부담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무척 구두쇠 노릇을 할 수밖에 없다.
이들 하일랜드 출신 소몰이꾼들은 이 길고 고생스러운 여행을 하는 동안 대개 한 끼에 귀리 두세줌, 양파 두세 개를 먹을 뿐이고 그밖에 양뿔로 만든 잔으로 위스키를 아침 저녁 찔끔찔끔 마실 뿐이다.
몸에 지니는 무기 역시 단검 하나뿐이다. 그들은 이 무기를 팔 아래 감추던가 체크 무늬 어깨걸이(이것은 하일랜드에서 겨울 외투로 쓰인다) 사이에 감춰두곤 한다. 그리고 소를 모는 작대기가 하나 있을 뿐이다.
하일랜드 사람들에겐 이 소몰이 여행처럼 즐거운 것은 없었다. 무엇보다도 여행의 처음부터 끝까지 온갖 변화무쌍한 사태가 발생한다는 것이 켈트 사람들의 타고난 호기심과 방랑벽을 자극하는 것이다. 여행 중 만나게 되는 사소한 일들, 농민들, 목축업자, 장사꾼들을 대하는 즐거움이 그것이다. 종종 벌어지는 술자리 역시 이들 하일랜드 사나이들에게는 무척 즐거운 일이었다. 돈 따위는 상관 없었다. 거기에 자신의 억센 힘에 대한 자신과 긍지가 있었다.
하일랜드 사나이들은 양 떼를 다룰 때는 마냥 어린아이 같았지만 소몰이에 있어서는 위풍당당한 왕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러한 천성 때문에 활기차지 않은 양치기 생활은 질색이었고 반면 그 삽상한, 자랑스러운 고향의 소떼의 보호자가 되어 당당히 소떼들을 몰고 갈 때는 자세를 쭉 펴고 사는 보람을 느낀다.
그 날 아침 도운페어를 출발한 몇십명의 패거리 속에서 로빈 오이그(오이그는 꼬마 형이라는 뜻)는 가장 위세 좋은 인물이었다. 모자의 챙을 척 올리고, 타탄 무늬의 바지 자락을 무릎 바로 아래에 꼭 묶은 그 다리는 젊음이 넘쳐흘렀다. 오이그라는 별명이 말하듯 몸집이 작고 손발도 그리 억세지 않았지만 그 가쁜하고 삽상하기란 마치 노루를 보는 것 같았다. 튀는듯한 발걸음, 그것은 멀리 여행하는 튼튼한 사나이들도 항상 부러워하는 것이다.
어깨걸이를 맨 모양이나 모자 쓴 것 하나만 보아도 이 하일랜드 출신 호남자에게는 로울랜드(스코틀랜드의 낮은 지대) 처녀들이 놓칠 리 없는 씩씩함이 엿보였다. 햇볕이나 비에 드러낸 얼굴은 거칠다기보다 야무지고 건강한 안색이었다. 혈색이 좋은 볼과 빨간 입술, 하얀 이로 한층 시원스러운 인상이었다. 대부분의 하일랜드 사나이들처럼 오이그 역시 큰 소리를 내 웃는다거나, 이를 드러내는 일이 드물지만 그럼에도 모자 아래 밝은 두 눈에는 기쁨과 유쾌함이 넘쳤다.
로빈 오이그의 출발은 이날 이 작은 읍에서는 그리고 남녀 친구들이 있는 근방 일대에까지 조그마한 사건이었다. 동업자 중에서 그는 첫 손가락에 꼽히는 존재였다. 그 자신의 장사도 상당한 규모였고, 하일랜드 농민이나 다른 여러 곳의 중요 고객들도 그에게 자주 일거리를 맡겼기 때문이다. 이 지방에서는 아무래도 그가 제일이라는 것을 누구나 인정했다.
조수를 쓴다면 장사 규모를 더 키울 수 있지만 그는 조카 둘을 쓰는 것 외에는 일체 조수를 두지 않았다. 소몰이꾼으로서의 그의 평판 역시 그렇게 소떼를 손수 돌봐준다는 점에 기인한다는 것을 그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동업자 가운데 최고의 사례금을 받는 것으로 만족하고, 이제 몇 번만 더 영국으로 여행하면 그 후는 자기 장사에만 전념해 집안 체면을 세우리라는 희망으로 자위하고 있었다.
집안 체면이란 그의 부친 라프랑 매콘비히(나의 친구의 아들이라는 뜻)라는 이름이 저 유명한 로브 로이(18세기 초에 스코틀랜드에 실재했던 의적)에서 따왔고, 또 로빈의 조부와 이 의적이 아주 친했다는 데 근거한다. 더 캐기를 좋아하는 사람의 말을 들으면 로빈이라는 이름도 셔우드의 숲을 중심으로 유쾌하게 설친 로빈훗처럼 이 로호 로오몬의 황야에서 크게 활약한 의적의 이름에서 따왔다는 말도 있다.
제임스 보즈웰(18세기 스코틀랜드의 문인)의 표현처럼 '어느 누가 이 조상을 자랑하지 않을 자 있으랴?'하는 식으로 로빈 오이그도 이 부계 혈통을 자랑스러워 했다. 그러나 그도 물론 잉글랜드나 로울랜드로 자주 여행하다 보니 그러한 집안 내력은 물론 촌구석에서나 다소 유익할 뿐이지, 다른 지방에서는 오히려 조소거리나 주체스러운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출생의 긍지라는 것은 말하자면 수전노의 보물과 같았다. 혼자 남몰래 자랑스러워 할 수는 있어도 조금이라도 남 앞에서 자랑할만한 것은 아니었다.
로빈 오이그는 축복의 말에 둘러싸였다. 심사원들은 마냥 그가 맡은 소를 좋다고 하고(사실 일급품 뿐이었다) 전송의 뜻으로 냄새 맡는 담배 쌈지를 내밀기도 하고 술잔을 나누는 사람도 있었다. 모두 한마디씩 "잘 가게, 잘 다녀오게. 색손의 시장에선 잘해봐. 종이 쌈지에다 빳빳한 지폐, 그리고 가죽 지갑에다가는 가뜩 잉글랜드의 금화를 가져와." 그야말로 여간 소란한 전송이 아니었다.
젊은 처녀들과의 이별은 더욱 정다운 것이었다. 만일 그가 떠나기 전에 한 번 쳐다만 보아주어도, 간직해둔 브로치를 아낌없이 선물로 줄 처녀들이 한둘이 아니었다는 소문이다.
바로 로빈 오이그가 무리에서 떨어진 몇 마리의 소에게 '후우후' 소리를 지를 때였다. 돌연 등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로빈, 잠깐 기다려. 토마프리치의 자네트야. 아버지의 누이, 자네트 숙모란 말이야."
"제기랄, 저 여편네가 왔군. 저 년은 하일랜드의 마녀야, 여우에 홀리겠군."
스타링 늪에서 온 농부가 투덜거렸다. "우물쭈물하다간 소가 홀릴 거야." "그렇게는 못하지."
소몰이꾼 사이에서 좀 지식이 있다는 한 사나이가 말했다.
"로빈 오이그가 꼬리에 망고 성자님의 매듭을 짓지 않고 내버려 두었을 리는 없지. 어림도 없어. 그것만 해 두면 아무리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나는 늙은 너구리 마녀라도 당장 엉덩이에 돛을 달고 줄행랑치는 법이야."
여기서 말해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도대체 이 하일랜드 소들은 걸핏하면 마법이나 주문에 홀리기 일쑤다. 그래서 머리 좋은 소몰이꾼들은 꼬리 끝 털을 일종의 독특한 묶음으로 묶고 그것으로 주술을 피하곤 한다. 그러나 농부들의 불신의 시선을 받고 있는 당사자 노파는 전혀 소 따위는 상관 없이 오직 소몰이꾼들에게만 관심이 있는 것 같았다. 로빈은 이 여자의 얼굴을 쳐다보기만 해도 질색이었다.
"어쩌자고 또 이렇게 아침 일찍 화롯가를 빠져나왔어요? 어젯밤에 벌써 인사를 했을텐데."
"아무렴 그렇지. 더구나 돌아올 때까지 쓰라고 이 몹쓸 늙은이에게 뭉텅 용돈까지 주었지. 넌 참 착한 아이다. 그런데 말이다." 늙은 마녀는 말했다.
"내 한 가지 걱정되는 건 만에 하나라도 너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거야. 그렇게 되면 난 이제 먹을 것도 필요없고, 화롯불도 필요없고, 아니 그렇지 저 고마운 해님도 필요 없어. 그러니 말이다, 무사히 다녀서 돌아와. 무사하게 돌아오도록 오른편 돌림의 주문을 해주지."
로빈 오이그는 할 수 없이 발을 멈추었다. 웃으면서도 난처한 듯이 주위의 패들에게 눈짓을 했다. 할 수 없지, 숙모의 마음이 시원해지도록 해주는 것 뿐이니까 라는 의미였다. 자네트 숙모는 비틀비틀 그의 둘레를 돌기 시작했다. 옛 드루이드 신앙(고대 켈트족의 종교)에서 나온 것이라는 의식이었다. 대상이 되는 사람의 주위를 세 번 빙빙 오른쪽으로 돈다. 태양의 운행과 같은 방향이었다. 그러나 돌연 그녀는 우뚝 멈추는가 싶더니 놀란 듯 무서운 소리를 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