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 애어비씨는 로빈을 집에 끌어들여 기분이 으쓱한 상태였다. 식품 저장고에까지 들어가 로빈의 앞에 얼린 고기를 잔뜩 갖다 놓고, 집에서 만든 맥주를 큰 잔에 가득 부어 거품을 불고 있었다. 좀처럼 얻어먹기 힘든 이런 음식을 로빈이 마음껏 맛있게 먹는 것을 보면서 애어비씨는 무척 기뻤다. 그 자신은 조용히 파이프 담배를 피우면서 방안을 왔다갔다 했다. 이 귀한 손님과의 환담은 가장으로서의 위신과 잡담을 즐기는 서민성 이 두 가지를 잘 만족시키고 있었다.
"그러니까 오던 길에 또 한 떼를 봤는데..." 애어비씨가 말했다. "그 소들도 역시 당신 고향에서 온 것 같던데. 물론 소는 당신 것만 좀 못하더군. 거의 두 살 짜리 소였고, 몰이꾼은 키가 큰 사나이던데, 당신처럼 킬트 스커트(스코틀랜드 특유의 허리에 감는 스커트)는 아니고, 바지를 입었어. 누군지 아나?"
"글쎄요, 휴 모리슨일까? 그래요. 그가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는데. 이건 그 친구가 이긴 셈이군. 그러나 이렇게 서둘러 왔다면 아무리 대단한 친구라고 해도 꽤 피곤할 걸. 어디까지 왔을까요?"
"여기서 한 6,7마일쯤 될거야. 녀석을 떼어놓은 곳이 크리슨베리 크락이었고 자네를 만난 곳이 훗란부슈였으니까. 소가 지쳤다면 그만 팔아버릴지도 모르지."
"아닙니다. 그렇진 않아요. 휴 모리슨은 그런 장사는 못합니다. 아무래도 이 로빈 오이그처럼 스코틀랜드 사람 아니면 못하죠. 자 그럼 이만 물러가겠어요. 난 저 아랫마을에 가서 해리 웨이크필드 녀석이 아직도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봐야겠습니다."
주막집의 패거리는 아직 한참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었다. 화제는 당연히 로빈 오이그의 행동이 중심이었는데, 마침 당사자가 딱 들어온 것이었다. 그런 경우 언제나 그렇듯, 그를 화제로 한 얘기는 일순간 딱 그쳤다. 그리고 모두들 차디찬 침묵으로 그를 맞이했다. 이러한 환영은 말하자면 몇 백마디 호통보다 더 그가 매우 반갑지 않다는 것을 내방객에게 알려주게 된다.
놀라기도 하고, 괘씸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별로 이 냉대에 물러설 이유도 없는 오이그는 태연히 아니 차라리 거만하다고 할 태도로 걸어갔다. 말 붙이는 사람도 없어서 그 역시 인사 한 마디 없이 곧바로 난로 옆, 해리와 관리인 그리고 손님 두셋이 둘러싸고 앉은 테이블에서 좀 떨어져 앉았다. 그 넓은 캔버랜드식 부엌은 더 떨어져 앉았어도 여유가 있었으련만...
로빈은 파이프에 불을 붙이고 싼 맥주 한 잔을 주문했다.
"마침 떨어졌는데요." 주인인 로버트 헤스켓이 말했다. "손님께선 자기 담배를 가지신 것 같은데 그러면 술도 갖고 계시지 않습니까? 손님의 고향에선 그게 당연한 걸로 아는데요."
"당신두, 쓸데없는 소리 말아요." 바지런히 움직이고 있던 서글서글한 안주인이 말했다. 그리고 재빨리 그에게 술을 갖다 주고 "손님이 좋아하시는 걸 당신도 잘 알지 않아요? 당신 장사는 손님을 존중하는 거예요. 스코틀랜드 손님은 맥주를 더 달게 마시는지 모르지만 값 치르는 것은 틀림없다는 걸 당신도 잘 알지 않아요."
그러나 로빈은 이들 부부의 대화에 거의 귀를 기울이는 것 같지 않았다. 둥근 병을 높이 쳐들고는 주막 안의 손님들에게 소리 내어 여러분을 위해, 시장의 경기를 위해 축복하며 건배했다.
"북쪽 땅 소몰이꾼 따위는 아예 기어 들어오지 않는 편이 낫지." 농장 주인 한 사람이 말했다. "저 하일랜드의 못된 소가 이 잉글랜드 목장을 마구 파헤치게 할 수는 없지."
"당치않은 소리. 그건 말도 안돼." 로빈은 조용히 대꾸했다. "사실 불쌍한 우리 스코틀랜드 소들을 홀딱 쳐먹고 살찌는 건 잉글랜드 인간들이야."
"그보다는 하일랜드의 소몰이들을 홀딱 처먹어줄 사람이 누구 없을까." 딴 농장주가 말했다. "그 놈들 눈이 생생하게 번쩍인데서야 어디 우리 잉글랜드 사람들이 먹을 걸 제대로 먹겠나."
"또 있지. 멀쩡한 놈이 느닷없이 나타나 고용인과 주인 사이에 끼어들어 주인 기분을 잡치게 한단 말이야. 두 사람 새에 들어와 훼방을 놓거든." 이렇게 말한 것은 바로 애어비씨의 농장 관리인이었다.
"그건 농담일지 모르지만, 어쨌든..." 로빈은 아직 평정을 잃지 않은 듯 말했다. "한 사람의 인간에겐 지나친 말이군."
"농담이라니, 이건 진담이야. 이봐, 로빈 오이그인지 뭔지 모르지만, 똑똑히 말해두지. 여기 있는 모두가 그렇게 생각한다는 걸 알아둬. 네 놈의 이 친구, 해리 웨이크필드에 대해 네 놈이 한 짓은 인간 쓰레기 똥개 새끼 같다는 거야."
"그래, 잘 알겠어." 로빈은 변함없이, 놀라울 만큼 침착했다. "너희들 모두의 소갈머리에 나도 감탄했어. 너희들의 생각, 너희들의 하는 짓이 난 조금도 탐탁치 않지만 말이야. 허나 해리가 그렇게 고생을 했다면, 도대체 어떻게 하면 그 값을 치를 수 있는가 그것도 말해줄 수 있지 않느냐 이거지."
"그건 그래." 해리 웨이크필드는 그때까지 잠자코 되어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오늘 로빈에게서 받은 상처에 대한 노여움도 노여움이지만, 지금까지의 오랜 우정 때문에 마음이 착잡했던 것이다. 그가 비로소 입을 연 것이다. 그는 벌떡 일어나 로빈에게 가까이 갔다. 로빈도 일어서서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해리, 그래 그래. 해 버려. 눕혀버려." 사방에서 일제히 외쳤다. "한 대 갈겨서 늘씬하게 뻗게 만들어."
"다들 조용해. 그래서 말이야." 해리는 로빈을 돌아보며 경의와 도전이 반반 뒤섞인 표정으로 내민 손을 잡았다. "이봐, 로빈. 오늘 네가 한 짓은 누가 뭐래도 심했다. 하지만 말이야. 사나이답게 손을 잡고 어디든 밖에서 한 바탕 겨루고 싶다면 내 너를 용서해도 좋아. 그리고 다시 한 번 지금보다 더 사이 좋게 지내보자."
"하지만 말이야." 로빈이 대답했다. "이번 일은 다시 말하지 말고 이대로 화해하는 게 더 좋지 않을까? 다리나 허리를 다치지 않고 말이야. 이대로 더 좋은 친구가 되자."
그러자 이 말을 들은 해리는 로빈의 손을 놓았다기보다, 거칠게 뿌리쳤다.
"난 말이야, 지난 3년간 이런 겁쟁이와 사귄 줄 몰랐는데..."
"겁쟁이? 내 이름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말이야." 로빈의 눈이 번쩍였다. 그러나 아직은 흥분을 꾹 누르며 말했다. "이봐, 해리 웨이크필드, 저 후르의 여울에서 말이야. 시꺼먼 바위 위에서 허우적대던 너, 강의 뱀장어들이 고마운 미끼라고 기다리던 때 너를 건져준 이 팔과 다리가 설마 겁쟁이의 것이라곤 못하겠지?"
"그렇지, 그건 네 말이 맞아." 해리는 적잖이 가슴이 섬찟했다.
"야, 이거 왜 이래, 해리." 관리인이 외쳤다. "설마 이제 와서 마음이 약해지는 건 아니겠지? 아 참 스코틀랜드 킬트 따위를 두른 녀석과 오래 있으면 - 사나이 본때도 잊는 모양이구만."
"여보슈 프리스밤킨씨, 똑똑히 가르쳐 주지. 남자의 본때를 잊은 건 아니야." 해리는 말을 계속했다.
"이봐 로빈, 그건 틀렸어. 아무튼 한바탕 해보지 않으면 안돼. 그러지 않으면 둘 다 이곳에서 웃음거리가 되는 거야. 절대 너에게는 상처 같은 건 입히지 않을 테니까. 뭐하면 네가 원하는대로 장갑을 끼어도 좋아. 자 사내답게 나가는 거야."
"하지만 강아지처럼 맞은들 쓸데없는 짓 아닌가." 로빈이 말했다. "내가 너에게 나쁘게 했다면 난 얼마든지 나갈 수 있어. 여기 법률도 언어도 전혀 모르지만 말이야."
"안돼, 안돼. 법률이 문제가 아니야. 재판 문제도 아니구. 실컷 한바탕 하는 거야! 친구는 그때부터 되는 거야." 모인 패들이 모두 한마디씩 했다.
"그러나 해리." 로빈이 말했다. "가령 한다고 해도 말이다. 난 원숭이처럼 때리고 할퀴고 하는 싸움은 할 줄 모른다."
"그럼 어떡하면 좋다는 거냐." 해리가 말했다. "어쨌든 나와 대등하게 맞서기는 힘들 줄 알고 있지만 말이다."
"나 같으면 단검을 갖고 하지. 그리고 먼저 피를 낸 편이 칼을 거두고... 나리들이 하는 그 식으로 말이다."
물론 그 말은 냉정한 이성의 소리라기보다는 차츰 복받쳐오르는 감정에서 자기도 모르는 새에 튀어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이 도전을 듣고 사람들은 크게 웃어댔다. 동시에 사방에서 벌떼처럼 떠들어댔다.
"나리라는데!" 누군가 외치자 또 웃어댔다. "훌륭하신 나리셔! 여봐, 라프 헤스켓, 어때 결투용 칼 두 자루 있지? 나리께 드리는 거야."
"없는데. 칼라일의 병기고에 사람을 보내면 있겠지. 하지만 그때까지 포크라도 두 개 빌려드릴까? 그런대로 써보지 그래."
"쓸 데 없는 농담은 그만두게." 한 사나이가 말했다. "적어도 스코틀랜드 놈이라면 태어나서부터 머리엔 푸른 모자, 허리엔 단검과 피스톨, 이것만은 갖고 있는 법이야."
"그러나" 관리인이 또 입을 벌렸다. "아무래도 고비 성에 사람을 보내서 나리께 이 나리의 후견인을 맡아 주십사 부탁을 해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