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앗, 로빈, 네 손에 피가 묻었어."

"아주머니두, 제발 그만둬요." 로빈 오이그는 말했다.

"그 따위 점은 당치도 않지, 아주머니 자신에게 해로워요. 벌을 면치 못할 걸요."

그러나 노파는 무서운 얼굴로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너의 손에 피가 묻었다. 그것도 잉글랜드 사람의 야. 겔 사람(주로 하일랜드 지방에 사는 켈트족의 일부)의 피라면 더 진하고 붉을 게다. 저것 봐, 좀 보여다오. 잠깐만."

로빈이 막을 새도 없이(정말 막으려 했다면 폭력을 쓸 수밖에 없었지만) 노파는 민첩했고 막무가내였다. 순식간에 로빈의 어깨걸이 아래 손을 넣어 허리의 단검을 쑥 뺐다. 말끔히 간 칼날이 한 점의 얼룩도 없이 햇빛에 빛나자, 그녀는 또 큰 소리를 질렀다.

"피다, 피야 피. 색슨 사람의 피야. 로빈 오이그 매콘비히, 오늘은 잉글랜드로 떠나선 안돼!"

"농담하지 말아요." 로빈이 대답했다.

"그럴 수야 없죠. 그러면 스스로 자기 발을 찍는 셈이예요. 이봐요, 아주머니. 꼴불견이요. 자, 그 칼을 줘요. 빛깔만 가지고 검은 소의 피, 흰 소의 피를 어떻게 구별한담. 사람의 피는 말이죠, 모두 아담에게서 받은 거예요. 자 그 칼을 달라니까. 괜찮죠, 갔다 오겠어요. 지금쯤 벌써 스타링 다리께까지 많이 갔을 텐대. 자 그 칼. 난 이제 가야겠어요."

"아니야, 못 줘. 이 어깨걸이는 놓지 못하겠어. 이 불길한 칼을 두고 가면 모르지만." 주위의 여인들도 이젠 같은 말을 했다. 자네트 노파의 예언이 맞지 않은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로울랜드 농부들은 난처한 얼굴로 아까부터 방관하고 있었다. 이렇게 된 바에는 어떻게든 끝장을 낼 수밖에 없다고 로빈은 결심했다.

"자, 그럼 말이죠." 로빈은 칼자루를 휴 모리슨에게 넘겨주며 말했다.

"당신네들 로울랜드 사람들은 이런 아귀다툼쯤 아무것도 아니겠지. 그럼 내 칼은 당신이 맡아 줘. 아주 줄 수는 없지. 아버지의 유품이니까. 하지만 당신네 떼는 우리들 바로 뒤에 따라오지. 내 허리에 없는 건 유감이지만 당신이 갖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런대로 참지. 아주머니 어때요. 이럼 됐죠?"

"할 수 없지." 노파는 말했다. "그런 칼을 맡아주는 바보가 로울랜드 태생에 있다면야."

기운 센 사나이인 휴 모리슨은 소리내어 웃어댔다.
"이봐요. 아주머니. 난 말이죠, 그레네의 휴 모리슨 조상은 옛날부터 호걸 모리슨 일가, 결투하는 데 단검 같은 건 안썼어요. 아직 우리집 역사엔 한 번도 없어요. 그런 건 필요없죠. 모두 덩치가 컸거든요. 나만은 좀 약하지만, 어때요, 이런 걸 씁죠." 휴 모리슨은 그러면서 아주 굉장한 곤봉을 내보였다.

"마시고 먹고 하는 자리에서 느닷없이 쿡 찌르는 따위는 몽땅 하일랜드 깡패들에게 맡깁니다. 아니, 웃을 게 아니죠. 하일랜드 사람들, 특히 로빈 녀석도 그럴 걸. 아무튼 단검은 내가 맡아주지. 이런 할머니의 잠꼬대가 그렇게도 걸린다면 말이야. 필요할 땐 언제든지 도로 돌려줄게."

휴 모리슨의 말투를 듣고 로빈의 속에는 뭔가 꽉 치밀어오르는 것이 있었다. 하지만 그도 여러 번 여행하는 동안 발끈하는 하일랜드 사람의 본래 기질을 누르고 조금은 인내라는 것을 배운 터였다. 그런 까닭에 약간 배알이 틀리기는 했으나 잠자코 호걸 모리슨 일가의 후예라고 하는 이 사나이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아냐, 저 놈은 아침 술을 안마셔도 기껏 댐프셔 출신의 얼간이야. 그렇지 않다면 조금쯤은 신사다운 말씨를 쓰겠지. 그나저나 너 놈도 돼지새끼나 마찬가지야. 꿀꿀하는 것 밖에는 재주가 없어. 저 따위 때문에 창자 속의 잡탕을 찔러서야 아버지 유물인 칼이 울지, 울어." 이렇게 말하면서(물론 겔 언어로 중얼거린 것이었다) 로빈은 떼를 몰고 배웅하는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어 작별했다. 그는 동업자며 형 아우 하는 사이인, 이번에 함께 가기로 약속한 사나이와 빨리 합류하고 싶었다.

이 친구는 이름이 해리 웨이크필드, 잉글랜드 젊은이였다. 북부의 시장에서는 어디서나 얼굴이 알려져 있었고 또 사실 그 방면의 솜씨에 있어서는 우리의 주인공 로빈 오이그 못지 않게 평판이 좋고 잘 통했다. 키는 6피트 가깝고 스미스필드(런던 옛 성 밖에 있던 광장. 가축 시장이 섰다)의 권투 시합이나 레슬링 시합 같은 데 나가도 충분히 통할만한 훌륭한 체격이었다. 물론 프로 선수에 낄 정도는 아니었지만, 시골 아마추어들이 뛰는 권투 시합 정도라면 어떤 상대라도 케이오시킬 정도였다.

던캐스터의 경마가 있으면 그는 언제나 득의양양했다. 뱃심 좋게 적지 않은 돈을 걸고 또 대개의 경우에 으레 이겼다. 쟁쟁한 사람들이 참여하는 요크셔의 닭싸움에도, 장사에 지장이 없는 한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가 없었다. 아주 서글서글한 젊은이로 놀기 좋아하고 노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얼굴을 내미는 그런 사나이었으나 본래는 착실하고 장사의 이해관계에서는 세심한 로빈 오이그보다도 오히려 밝았다.

그는 쉴 때는 철저히 쉬는 반면 일하는 날은 열심히 끈기 있게 일했다. 그는 심신이 함께 그 옛날의 명랑한 잉글랜드 시골 농부의 전형이었다. 헤아릴 수 없이 많던 전쟁터에서 조국에 영광과 패권을 가져다 주고 지금도 역시 조국의 호위를 다하는 잉글랜드 농민의 전형이었던 것이다. 간단하게 금세 쾌활해지는 성격이었다. 신체가 건강하고 환경이 좋으니까 주위의 것이 모두 즐겁기만 했다. 때로 곤란한 일이 생겨도 그에게는 두통거리라기보다 한낱 재미있는 여흥이었다. 그만큼 그는 단단한 사람이었다.

만사가 이렇게 유쾌한 인간이었지만 결점도 있다. 그것은 화를 잘 낸다는 것이었다. 때로 싸움꾼 같은 인상을 주기도 한다. 또 걸핏하면 직접 완력으로 해결하려 했다. 권투 솜씨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웨이크필드와 로빈 오이그가 처음에 어떻게 친해졌는지는 잘 모른다. 그러나 이 두 사람, 소의 이야기 말고는 서로 통하는 화제나 관심이 없을 것 같은 이 두 사람에게 여하튼 아주 진한 우정이 싹텄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송아지 이야기, 카이로 소의 이야기 외에 로빈의 영어는 반편이었고 해리의 심한 요크셔 말투는 겔 언어 한 마디도 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언젠가 민치무어의 습지대를 횡단할 때 로빈은 거의 한나절 걸려 겔 말로 송아지라는 단어의 정확한 발음을 가르쳐주려 했지만 허사였다.

트라게야에서 마더케인에 이르는 동안 근방의 언덕은 몇번을 되풀이해도 잘 안되는 해리의 굵은 목소리와 실패할 적마다 뱃속에서 터져나오는 웃음 소리로 진동하곤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공감하는 것이 있었다. 해리에게는 몰이라든가 스잔 등 여러 처녀들을 반하게 했던 노래 재주가 있었고 로빈은 로빈대로 스코틀랜드 고유의 피보로크 곡을 실로 약약하게 휘파람으로 부는 재주가 있었던 것이다.

잉글랜드인 해리를 더욱 기쁘게 한 것은 그가 북방의 노래, 경쾌한 것이든 슬픈 것이든 참으로 많이 알게 됐고, 어느새 그것을 베이스로 맞춰서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해리가 경마나 닭싸움, 여우 사냥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로빈은 잘 알아듣지 못했고, 반대로 하일랜드의 요정, 유령 이야기, 민족전쟁, 약탈 행위 같은 옛 전설이 해리에게는 뚱딴지 같은 소리였겠지만, 그렇더라도 둘은 같이 있으면 즐거웠던 것이다.

이 3년 내내 둘은 항상 단짝이었고 여행도 방향만 같다면 꼭 함께 다녔다. 그것은 서로 편리하기도 했다. 하일랜드로 갈 때 잉글랜드 사람으로서는 로빈 이상의 길 안내자를 얻기란 불가능한 일이었고, 또 일단 해리가 말하는, 국경 안쪽으로 한 발 디디면 해리의 얼굴과 지갑이 로빈에게는 매우 유용했던 것이다. 사실 그는 뱃심이 좋아 한 두 번 크게 은혜를 입은 것이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