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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그날 종일 걸었어. 드라보트는 그날 밤 내내 수염을 물고 혼자서 중얼거리며 눈길을 걸었지.'아무래도 달아날 길이 없을 것 같습니다.' 비리 휘슈가 말했어. '사제들은 부락에 파발을 보내 당신들이 보통 인간이라고 말했을 겁니다. 왜 일이 더 안정될 때까지 신이라고 행세하지 않았습니까? 난 이제 틀렸어요.' 비리 휘슈는 눈 위에 몸을 던져 신에게 기도를 드리더군."
"다음날 아침 우리는 지독한 곳으로 들어갔지. 어디를 봐도 평지는 전혀 없고, 먹을 것도 없었지. 바슈가이 사람 6명은 이상한 표정으로 비리 휘슈를 바라봤지만 말은 한 마디도 없었지. 정오쯤 우리는 눈으로 온통 뒤덮인 평평한 산꼭대기에 도착했어. 그런데 이것 봐라? 거기엔 군대가 진을 치고 우릴 기다리고 있지 않겠어?
'파발들이 엄청 빠르게 다닌 모양이군.' 비리 휘슈가 가늘게 웃으면서 말하더군. '놈들은 우릴 기다리고 있어.'
저쪽에서 서너 명이 총을 쏘아대더군. 그 중 한 발이 다니엘의 정강이에 맞았어. 덕분에 단은 제 정신이 돌아온 것 같았어. 눈 너머로 상대방을 바라보고 놈들이 든 총이 우리가 이 나라에 가져온 총이라는 걸 알게 됐지.
'우린 이제 마지막이야.' 그는 말했어. '저 놈들은 영국인인가? 이봐, 여기 있는 사람들, 너희들이 이 지경에 빠진 것은 내 어리석은 행동 때문이었어. 비리 휘슈, 돌아가게. 부하들을 데리고 돌아가 줘. 넌 나를 위해 최선을 다했어. 이제 내 손을 놓게.'
'그리고 개넌, 나와 악수하고 비리 휘슈와 함께 떠나다오. 아마 놈들은 너를 죽이지는 않을거야. 난 혼자 부닥치겠어. 죄는 내게 있어. 바로 왕인 내게 말이야.'
'빌어먹을!' 난 말했지. '빌어먹을... 단, 난 너와 함께 있겠어. 비리 휘슈, 자네는 피하게나. 우리 둘이 저 놈들을 상대하겠어.'
'난 추장이오.' 비리 휘슈는 침착하게 말했지. '난 당신들과 함께 있겠소. 부하들만 피하게 하면 되오.'
바슈가이 사람들은 두 말 없이 피해 달아나고, 단과 나와 비리 휘슈는 북과 피리를 울려대는 가운데로 걸어갔지. 대단한 추위였지. 너무 추웠어. 지금도 내 머리 꼭대기에 그 추위가 남아 있어, 덩어리처럼 뭉쳐 있지."
신문사 일꾼들은 모두 잠에 골아 떨어져 있었다. 석유 램프 두 개가 편집실 안에서 타고 있었다. 내가 몸을 앞으로 당기자 땀이 얼굴을 타고 압지 위로 흘러 떨어졌다. 개넌은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나는 그가 정신을 잃을까 두려웠다. 나는 얼굴을 닦고 무참하게 짓이겨진 그의 손을 새삼 쥐면서 입을 열었다. "그리곤 어떻게 됐어?"
내 눈이 그의 얼굴에서 조금 벗어난 모양이다. 그의 의식이 갑자기 흐려졌다.
"뭐라고 그랬소?" 개넌은 우는 소리를 냈다. "놈들은 소리 하나 내지 않고 우리 세 사람을 붙들었어. 눈을 따라 걸어가는 동안에도 전혀 소리를 내지 않았어. 처음 손을 댄 놈을 왕이 때려 쓰러뜨려도, 피치가 놈들 한복판에 마지막 총알을 쏘아도 말이야. 그 돼지 새끼들은 끝까지 소리 하나 내지 않았어. 다만 꽉 뭉쳐 있을 뿐. 놈들의 털옷에서 구린내가 났지."
"우리와 제일 친했던 비리 휘슈란 친구가 있었는데, 놈들은 그 자리에서 돼지처럼 그 친구의 목을 끊어 버렸어. 그러자 왕이 피투성이 눈밭을 발로 걷어차며 말했어. '우리는 이제 이 꼴이 됐다. 다음엔 무슨 일이 생길까?' 그런데 피치, 피치 다리아페로 이 친구는 선생, 정말 털어놓고 말하지만, 그는 정신이 돌아버린 거야. 아니, 머리가 돈 게 아니지. 왕이 정신이 이상해진 거야. 그렇게도 정성 들여 만든 그 다리 위에서 말이야. 그 종이 베는 칼 좀 빌려주시오, 선생."
"놈들은 1마일 정도 그들을 끌고 와서는 밑에 강물이 흐르는 절벽에 걸린 다리로 왔어. 그렇게 걸린 다리를 본 적 있나요? 놈들은 마치 소라도 쫓는 것처럼 몰아댔소. '너희들, 잘 봐둬!' 왕이 말했지. '내가 사내답게 죽을 수 없다고 여기는 모양이지?' 그는 피치 쪽을 돌아봤지. 귀신처럼 울부짖는 피치 쪽을 본 거야.
'피치, 내가 널 이렇게 만들었어.' 그가 말했어. '가피리스탄에서 행복하게 잘 지내는 너를 끌어내, 이런 꼴을 당하게 만들었어. 네는 가피리스탄 황제군의 총사령관을 하고 있었는데 말이야. 용서한다고 말해 줘, 피치.'
'괜찮아.' 피치가 말했지. '난, 자네를 진심으로 용서하네, 단.'
'악수해줘, 피치.' 그가 말했어. '잘 있어.'
그는 오른쪽이나 왼쪽을 돌아보지 않고 똑바로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흔들리는 다리 한복판까지 걸어갔어. 그리곤 '이 거지 같은 새끼들아, 자 이제 끊어라!'하고 외치더군. 놈들은 다리를 탁 끊었어. 단은 2만 마일 깊이 저 아래로 빙빙 돌면서 떨어져 갔지. 물에 부딪힐 때까지 반 시간이나 걸렸으니까. 내겐, 그의 몸이 바위에 부딪히는 것이 보였어. 금관이 그 옆에 굴러 떨어지더군."
"그리고 나서 놈들이 소나무 사이에 피치를 넣고 어떻게 한 줄 알겠어? 피치의 손을 보면 알겠지만, 선생, 놈들은 피치를 찢어 죽이려고 했어. 손발에 나무 못을 박았지. 그래도 죽진 않았어. 그는 거기 매달린 채 가쁜 숨을 쉬고 있었지. 다음 날 놈들은 피치를 끌어내리곤 '죽지 않았군, 기적이야' 하더군. 놈들은 그를 죽이지 않고 끌어 내렸어. 놈들에게 조금도 나쁜 짓을 하지 않은 그 피치, 불쌍한 피치를 말이야."
그는 몸을 흔들면서 울기도 하고 상처 자국이 있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곤 하면서 어린애처럼 십 분 가량 탄식을 거듭했다.
"이 놈은 다니엘보다 오히려 더 신에 가깝다고 하면서, 놈들은 그를 사원에 가두었지. 엄청나게 그를 괴롭힌 다음엔 눈밭으로 쫓아내면서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지. 그래서 피치는 별수 없이 줄곧 구걸을 하면서 일 년쯤 걸어 돌아온 거요. 다니엘 드라보트는 피치 앞에서 '이쪽이야, 피치. 우리들이 하는 일은 엄청난 거야.'하면서 길을 안내해줬기."
"그 고약한 산들이 요란을 떨었지만, 금방이라도 피치를 떨어뜨릴 것처럼 요란을 떨었지만, 단이 손으로 지켜 주어서 피치는 기다시피 해서 돌아온 거요. 그는 결코 단의 손을 놓지 않았어. 단의 목을 놓지도 않았어. 놈들은 내가 두 번 다시 올 생각을 못하도록 단의 목에 왕관을 씌워 내게 주었어. 그 왕관은 순금이지. 그러나 피치는 굶어죽을 지경이었어도 그걸 팔지 않았어. 여보 선생, 당신은 드라보트를 알고 계셨지. 당신은 우리 형제 드라보트 각하를 알고 있었지! 자, 그 친구를 만나 보시오."
그는 구부린 허리 아래 누더기 옷을 더듬어 은실 장식이 있는 검은 말총 주머니를 꺼냈다. 그 안에서 내 테이블에 내놓은 것은, 다니엘 드라보트의 메마르고 쭈글쭈글해진 머리였다. 좀 전부터 램프의 빛을 희미하게 만들고 있던 아침 태양이 그 붉은 수염과 움푹 꺼져 들어간 눈을 비추고 있었다. 그 빛은 연마하지 않은 터어키 구슬을 점점이 박은 무거운 황금 왕관도 함께 비추고 있었다. 개넌은 박살이 난 드라보트의 관자놀이에 왕관을 살짝 얹어 주었다.
"지금 당신이 보는 것이 살아 있을 때의 장신구를 걸친 왕이오." 개넌이 말했다. "머리에 왕관을 쓴 가피리스탄의 왕입니다. 한 번 왕이 되어 봤던 불쌍한 옛 친구 다니엘이오!"
나는 몸이 떨렸다. 용모는 완전히 변했지만, 그 머리에서 마와 환승역에서 만났던 그 사나이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개넌은 일어나서 가려고 했다. 나는 그를 말렸다. 그가 바깥을 돌아다닌다는 것은 무리였다. "위스키를 좀 갖고 가게 해 주시오. 그리고 돈도 좀 주지 않으려오?" 그는 헐떡이며 말했다. "난 그래도 한때 왕이었소. 군수한테 가서 몸이 좋아질 때까지 의료원에 입원시켜 달라고 부탁해볼 생각이오. 아니, 고맙지만 나를 위해 차를 부르지는 마시오. 난 다른 급한 용무가 있어요. 남부, 그 마와에서..."
그는 휘청거리며 편집실을 나가 군수 저택 쪽으로 떠났다. 그날 낮, 눈이 멀어버릴 것처럼 무더운 거리의 가로수 그늘 아래로 나가니 허리가 구부러진 한 사나이가 모자를 손에 들고, 영국의 구걸 노래를 부르며 먼지 속을 돌아다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부근에는 사람 그림자도 없고, 노래 소리가 들리는 근처에는 집도 없었다. 그래도 그는 머리를 좌우로 흔들면서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왕자의 싸움 그 피 젖는 깃발에
따라서 나아가는 용사는 누구뇨
나는 노래를 계속 듣지 않고 몰락한 사나이를 차에 싣고 제일 가까운 선교사 집으로 데려갔다. 정신병원에 입원시켜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나와 함께 있으면서 그 노래를 두 번 정도 되풀이해 불렀지만, 내가 누군지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나는 노래를 부르고 있는 그 사나이를 선교사에게 맡기고 물러났다.
이틀 뒤 나는 정신병원의 사무장에게 그의 병세를 물어봤다.
"그 남자는 입원했을 때 일사병에 걸려 있었습니다. 어제 아침 일찍 죽었어요. 그 남자가 대낮에 두 시간 동안이나 머리를 햇볕에 드러내고 있었다는 게 사실입니까?" 사무장이 물었다.
"그렇습니다." 나는 대답했다. "그런데, 그 남자가 죽을 때 혹시 머리에 뭔가 얹고 있지 않았습니까?"
"제가 알기론,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사무장이 대답했다.
이 사건은 이것으로 끝났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