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에서는 형준이 웃고 있었다. 니체가 그래도 정색하며 말했다.
“언제 시간이 있을 때 우리 둘이 조용히 얘기하고 싶다. 네가 쓴 글을 읽고 나서 얘기해도 좋아. 자, 그럼 안녕.”
니체는 식당 저쪽으로 멀리 가버렸다.
“벌써 집에 갈 건가?”
니체가 내게 안녕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내가 형준에게 물었다.
“미친 자식. 대꾸 말게. 복도에서 지나칠 때도 금방 다시 볼 건데 안녕이라고 하는 놈이야. 아무래도 저 녀석 병원에 입원하게 될 것 같은데. 보라구. 가장 친하다는 내겐 지금 모른 척하지 않아.”
“그렇군. 난 또 내게 어찌나 정중하게 말하던지 깜빡 속았지.”
“자네 오늘 우리집에 안갈 거야?”
갑자기 형준이 말했다. 그런 말은 처음이었다. 나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사실은 형준이 어떤 집에 사는지, 그리고 가족들은 어떤 사람인지 몹시 궁금했던 것이다. 수업을 끝내고 우리는 일단 시내로 나가서 어떤 음악 감상실에 들렀다. 종로에 있는 감상실인데 재즈음악과 컨트리송을 주로 들려주는 감상실이었다. 나는 그런 곳엔 처음 가봤다.
“고등학교 때부터 자주 오던 곳이야. 어때 분위기가?”
“좋군. 난 여태 다방 구경도 못했다구. 이런 곳이 있는 줄은 처음 알았어.”
그러고 보니 더벅머리 고등학생들도 책가방을 옆에 끼고 드문드문 앉아 있었다. 조숙한 학생들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형준도 조숙한 학생인 셈이었다.
음악실에서 재즈를 실컷 듣고 저녁이 되자, 우리는 형준의 집으로 향했다. 형준의 집은 돈암동 언덕배기에 있었다. 이전까지 나는 막연하게 형준이 어쩌면 부잣집 아들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었다. 부잣집 아들이 반드시 사치를 하고 돈을 마구 뿌린다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형준은 얼마간 거만하고 당당했다. 꾸민 것이 아니라 그의 태도는 아주 자연스러웠다. 그래서 나는 형준이 거의 틀림없는 부잣집 아들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막상 형준이 나를 데리고 들어간 집은 울타리도 없는 판잣집이었다. 그의 방은 퀴퀴한 냄새가 났고 가구라곤 볼품없는 책상 하나뿐이었다. 그의 저녁밥을 둘이서 사이좋게 나눠먹었다. 형준은 어디서 소주 두병, 오징어 한 마리, 날계란 두 개를 구해왔다. 술을 한잔 마시더니 형준이 내게 말했다.
“이봐. 나도 왕년에 좋아하는 여자가 있었네. 이걸 좀 읽어 보겠나?”
그는 책상 서랍 속에서 두툼한 노트묶음 하나를 꺼내 내 앞에 던졌다.
“이게 뭔데?”
“그냥 읽어 봐. 다 볼 수는 없고 대충 서두만 보라구. 자넨 서두만 봐도 무슨 글인지 금방 알 거야.”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그걸 읽느라고 새벽까지 꼼짝하지 못했다. 그만큼 그 내용은 감동적인 데가 있었다. 그건 형준이 좋아하는 여학생에게 보낸 장문의 연서였다. 그 여학생은 첼로를 켜는 학생이었고 편지 속에 형준이 그녀의 첼로연주장에 들어갔던 얘기도 자세히 나와 있었다.
“이게 주인한테 있지 않고 왜 여기 있는 거지?”
드디어 편지를 다 읽은 뒤 내가 형준에게 물었다.
“돌려보냈더군. 그 망할 계집애가 뜯어보지도 않고 속달로 보냈어.”
“아깝군. 정말 명문인데. 지금 그 여자 어디 있나?”
“여기 없어. 고등학교 3학년 때 미국으로 가버렸지.”
“그러니까 자넨 고등학생 때 이런 편지를 썼단 말인가?”
“그래. 고등학교 때야. 고등학교 때 사랑을 졸업한 셈이랄까? 그 뒤론 여자에게 관심을 안 갖기로 했어. 모두가 허위고 감정 유희야.”
“그건 좋은데 그렇다고 장래 희망까지 포기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자네가 뭐라고 해도 이것 역시 환상적 사랑에 지나지 않아. 자네가 아무런 희망도 없다고 한 까닭을 이제 알았어. 그러나 이건 실제적 사랑은 아니야. 환상 때문에 자포자기하는 자넨 니체를 나무랄 자격이 없어. 그렇지 않은가?”
형준은 화가 난 얼굴로 나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괜히 자네에게 그걸 보였군. 자네 말이 정확해. 그게 내가 아파하는 점이구. 환상이지 실제는 아냐. 가난뱅이가 신데렐라를 꿈꾸는 환상이었지. 그래서 요즘 고민이라네. 학교를 당분간 쉬고 군대에나 나갈까 생각중이야. 갔다오면 생각이 조금 달라질지 모르지.”
“자네랑 헤어지고 싶지 않은데. 자네 가버리면 뒷자리엔 나만 남지 않나.”
“그렇군. 그래도 자넨 혼자 잘 버틸 거야. 나도 자네랑 헤어지고 싶진 않다구.”
“일찍 군에 다녀오는 것도 자네에겐 현명한 생각이야. 환상이 아닌 현실을 배워 올 수 있을 거야.”
겨울방학이 끝났을 때 형준은 학교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니체 역시 보이지 않았는데 그가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개학한 며칠 뒤 형준은 내게 엽서 한 장을 보내왔다. 전방에서 보낸 엽서였다. 그 무렵에 학보에 내 글도 발표되었다. 나는 두 장의 학보를 따로 구해서 하나는 병원의 니체에게 보냈고 하나는 전방의 형준에게 보내줬다. 나는 그 친구들이 내겐 스승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을 그때 했었다. 왜냐하면 환상의 유혹이 그 나이엔 얼마나 무섭다는 걸 그들은 내게 생생하게 가르쳐줬기 때문이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