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 같은 반 여학생 두 사람이 본관건물에서 나와서 식당쪽으로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둘 가운데 반에서 제일 미인이라는 ‘올빼미 눈’이 있었다. 나는 그 여학생 이름도 제대로 몰랐다.
‘올빼미 눈’이란 별명은 눈이 유난히 크다고 해서 남학생들이 붙여준 별명이었다. 어찌되었건 그녀는 남자들 사이에 인기가 좋았다. 그녀는 아직도 여고생처럼 머리를 두갈래로 땋아내리고 다녔고 옷차림은 언제나 단정하게 주름이 잘 잡힌 투피스를 입고 다녔다. 형준이 피식 웃으면서 내게 엉뚱한 말을 했다.
“자네도 저 올빼미에게 관심 있어?”
“나 같은 촌뜨기가 관심 있으면 뭘해? 내가 자기와 한 반이란 것도 모를 텐데.”
“그럴지도 모르지. 강명혜 저 기집애 아주 새침떼기라고. 자기가 인기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지.”
“자네도 좋아해?”
형준은 내 물음에 펄쩍 뛰었다.
“난 아니야. 난 친구란 놈 때문에 괜히 저 기집애에 관심을 갖게 됐지. 난 저런 타입 좋아 안해. 내가 좋아해봤자, 강명혜가 나 따위를 좋아할 리도 없지만. 난 저 기집애 머리털을 몇개 뽑아 본 일이 있었지.”
“뭐야? 머리털을 뽑다니. 뭣 때문에 그런 짓을 하지?”
나는 형준의 말에 적지 않게 놀랐다.
“놀랄 것 없네. 자네 니체 알어?”
“알지. 요즘 며칠 안보이더군.”
“몸이 약해서 며칠 쉬는 모양이야. 자기 어머니가 그 친구 걱정을 굉장히 하고 있다네.”
니체란 어떤 학생의 별명이었다. 그는 키가 작고 안색이 파리한 학생인데 보통 괴짜는 넘는 수준의 괴짜였다. 언제나 철학책을 끼고 다니고 특히 니체의 철학에 통달해 있다고 알려졌다. 니체는 복도를 걸을 때나 운동장을 지날 때도 늘 혼자 머리를 숙이고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곤 했다. 물론 좀처럼 다른 사람에게 말을 걸지 않고 누가 말을 걸어도 모른 척하고 그냥 지나치기 일쑤였다. 반에서 니체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형준이 말했다.
“니체 그 새끼가 나하고 고등학교 동창이야. 고등학교 땐 친했지. 그땐 그렇게 심하진 않았는데 대학교 와서 아주 달라졌어. 그런데 그 새끼가 하루는 나를 찾아와서 사정하는 거야. 자긴 올빼미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금방 미칠 것 같은데 그렇다고 용기가 없으니 강명혜에게 직접 고백할 수도 없다 이거야. 그러면서 강명혜 머리털을 몇 개만 뽑아줄 수 없겠냐는 거야. 그거나마 갖고 있으면서 위안을 삼겠다는 거겠지. 친구가 죽겠다는데 모른 척할수 있어? 그래서 교양철학 시간에 그 기집애 뒷자리에 앉았다가 시침 뚝 따고 몇개 슬쩍했지. 의외에도 둔한지 반응이 전혀 없던데.”
“설마 몰랐겠나. 창피해서 가만히 있었겠지. 니체는 좋아하던가?”
“나 정말 미치겠어. 이 새끼가 그 머리털을 들고 눈물이 글썽해서 어쩔 줄 모르는 거야. 그 정도가 되면 그건 사랑이 아니야. 미친 거지. 요즘 니체가 학교 며칠 안나오니까 마음이 아주 편해. 그 새끼가 나오면 꼭 무슨 일 저지를 것만 같아 마음이 조마조마하다구.”
“그럴 게 아니라 친구를 위해 강명혜에게 자네가 사정을 솔직하게 말하면 어떨가? 도움이 되지 않겠어?”
“자넨 장님인가 본데. 소식이 깡통이야. 올빼미가 요즘 누굴 좋아하는지 눈치도 못챘나?”
“누구야? 상대가.”
“물론 자네도 나도 아니지. 우리 같은 두더지는 여학생들의 관심 밖이니까. 거 수업시간에 늘 여학생 꽁무니에 붙어 앉고 독일어 공부는 저 혼자 하는 것처럼 질문을 도맡아 하는 놈 있잖아? 기골도 좋고 목소리가 요란한 놈 말이야. 한정섭이 그 새끼 말야. 그 새끼랑 강명혜랑 비원 뒷담길을 오붓하게 걸어가는 걸 본 사람이 있다는 거야. 그 얘길 듣고 두 사람 눈치를 봤더니 틀림없더군. 강명혜 그 기집애 우리 앞에서는 새침떼기 노릇을 하지만 알고 보면 보통내기가 아니야.”
한정섭은 체격이나 용모가 사내답고 공부도 열심히 하는 모범생이었다. 뭘로 봐도 니체는 한정섭의 적수가 아니었다. 니체는 키도 작고 안색도 병자처럼 파리하고 게다가 용기도 없다. 나는 니체가 갑자기 불쌍하게 여겨졌다.
오징어를 나누어 먹은 그날부터 형준과 나는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교실에서는 우리는 매일 붙어 살다시피했다. 나는 독일어를 못해서 수업시간에 딴전을 피웠고 형준은 공부에 아예 관심이 없어서 딴전을 피웠다. 교수 입장에서 보면 우리는 영락없이 불량학생들이었다. 수업 시간에 우리는 뒷자리를 독차지하고 앉아서 계속해서 잡담을 했다.
앞줄에 앉아 있는 여학생들의 용모에 대한 평가, 행동 평가, 그리고 맘에 썩 안드는 모범생들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곤 했다. 교수님들 험담도 즐겨 지껄였다. 키가 작은 교수가 굽이 높은 구두를 신었다던가 멋쟁이로 자부하는 어떤 교수가 얼굴에 화장을 하고 다니는 것 같다는 등의 험담이었다. 모범생이나 멋쟁이 교수에 대한 험담을 유난히 즐긴 건 그들에 대한 질투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들이야말로 여학생들의 관심을 독점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었다.
형준이나 나는 여러 가지로 불리했다. 우선 학구파가 못되어서 수업시간만 되면 쥐구멍에 숨은 듯 쪽을 못펴고 옷차림도 반에서 제일 처지는 편에 속했다. 형준은 늘 검게 물들인 군대 작업복을 입고 다녔고 나는 고물 옷 시장에서 불과 몇 푼 주고 구한 싸구려 헌옷만 입고 다녔다. 그래도 형준에게서 가난뱅이 냄새는 좀처럼 나지 않았다. 그건 아마 녀석이 의젓하고 좀처럼 비굴한 행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