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웃지 못할 사건이 일어난 것은 여름방학을 며칠 앞두었을 때였다. 모두들 시험을 끝내고 식당 앞마당에서 한가롭게 햇볕을 쬐고 있었다. 올빼미를 비롯한 여나문 명의 여학생들은 저희들끼리 한쪽 잔디밭에 앉아 얘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남학생들도 끼리끼리 모여앉아 여름 방학에 대해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학교 근처에 사는 어떤 아주머니가 큰 바구니 하나를 들고 우리 앞을 천천히 지나가고 있었다. 학교를 돌아서 가자면 너무 멀기 때문에 동네 사람들은 흔히 운동장을 가로질러 지름길로 다니곤 했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얼굴이 창백한 니체가 본관 건물 복도에서 불쑥 튀어나와 아주머니 앞으로 빨리 다가갔다.

 

본래 니체는 몸을 약간 옆으로 기우뚱하게 기울고 걷기 때문에 걷는 모습 자체가 아주 특이했다. 그렇지 않아도 니체만 나타나면 사람들 눈길이 그에게 쏠렸는데 그가 이상한 걸음걸이로 갑자기 동네 아주머니에게 다가가니까 그때 마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눈길이 니체에게 쏠릴 건 당연했다. 니체도 분명 그걸 노렸을 것이다.

 

잔디밭에 앉아 재잘거리던 여학생들도 얘기를 멈추고 일제히 이 고독한 철학가를 쳐다보았다. 드디어 아주머니 앞으로 다가선 니체는 여유만만한 표정으로 아주머니의 길을 막아서더니 아주머니의 바구니 안을 들여다봤다. 바구니에는 떡과 과자가 들어 있었다. 니체는 태연하고 당당하게 아주머니에게 말했다.

 

“나 배가 고파서 그러는데 그 떡 좀 내게 주시오. 내가 먹을 만큼 집어갈까요?”

 

그러고는 저쪽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손을 바구니 안에 밀어넣었다. 불의에 습격당한 여인이 니체에게 분노에 가득찬 고함을 질렀다.

 

“이런 미친 놈 봤나. 손 치우지 못해?”

 

그 바람에 니체는 질겁을 하고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아주머니는 이미 한풀 꺾인 니체에게 다시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별 거지같은 자식 다 보겠네. 에이, 재수 없어.”

 

그런 뒤 아주머니는 서둘러 갈 길을 가버렸다. 문제는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있는 철학가였다. 주위 사람들은 일시에 웃음보를 터뜨렸다. 그러다가 갑자기 웃음은 그치고 조용해졌다. 모멸에 가득찬 욕설을 뒤집어쓴 니체는 얼굴빛이 더욱 창백해진 채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아마 갑자기 생각을 멈춰버린 사람 같았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순간적으로 사고체계가 무너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때 어디선가 형준이 바람같이 니체 옆으로 달려왔다. 그는 니체를 부축하고 학교건물 안으로 니체를 데려갔다. 

 

잠시 후 나는 뒷동산에 혼자 앉아 있었는데 형준이 어슬렁어슬렁 올라왔다.

 

“내가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 하지 않았어? 에이, 바보자식 같으니.”

 

형준은 앉자마자 투덜거렸다.

 

“니체 어디로 데려갔지?”

 

“도서관에 앉혀놓고 나왔어. 좀 진정이 됐을걸.”

 

“왜 그런 짓을 했을까? 정말 배가 고파서 그랬다면 아주머니가 너무 야박하지 않아.”

 

“덕수 자넨 그것도 몰라? 올빼미 앞에서 한번 사나이다운 호기를 보여주겠다는 거지. 니체 그 자식은 주머니에 항상 돈은 가지고 다녀. 자기 어머니가 니체 걱정을 얼마나 하는데. 날마다 용돈 없을까봐 주머니에 돈을 넣어준다고. 그때 머리털을 보고 울 때부터 이런 짓을 할 줄 알았어. 자식이 자기도 한정섭이 못지않게 사내답다는 걸 보여준답시고 그런 짓을 한 거야. 그러니 그 기집애가 그 꼴을 보고 어떻게 생각했겠어. 니체 그 자식 자살이나 안할까 걱정인데.”

 

“설마 그럴라구. 올빼미에 관한 니체의 감정은 환상에 불과해. 환상 때문에 자살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걸. 자살은 아주 실제적인 동기에서 행해지지.”

 

형준이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말했다.

 

“가끔 자넨 아주 근사한 말을 잘한단 말야. 굉장한 어른처럼. 환상적 사랑을 이미 겪었다는 얘기 아냐, 자넨.”

 

“그럴지도 모르지. 지금도 환상을 가지고 있어.”

 

“그래? 뭔데. 얘기해 줄 수 있어?”

 

“일년 전 동네 아가씨를 버스 속에서 만났지. 여자대학의 같은 학년이야. 그렇지만 말도 못붙여 봤어. 왠지 겁나고 두려웠다구. 편지를 보낼까 생각했지만 그것도 용기가 안 나서 그만두기로 했어. 이게 환상 아니야.”

 

“자네도 그런 데가 있었군. 그런데 나하곤 영 다른데. 나 같으면 관심 있는 여자가 있다면 가만히 있지 않아. 쫓아가서 만나던지 하지. 그건 그렇고 나 자네에게 한 가지 물어볼 게 있네. 전부터 알고 싶었지. 자넨 정체가 뭐야? 아무리 생각해도 정체를 알 수 없다구.”

 

“무슨 얘기지? 나에 관해 알고 싶은 게 뭔가?”

 

“독일어과엔 왜 들어왔나?”

 

“별다른 뜻은 없어. 대학은 가야겠고 그러니 외국어 하나라도 해두자는 생각을 했었지. 돈을 버는데 지금 세상은 외국어가 유리하지 않을까.”

 

“그냥 돈 벌겠다는 이유 하나뿐인가?”

 

“그뿐이야. 이건 정말이네. 자넨 왜 여기 왔지?”

 

“난 아무런 이유가 없어. 돈 벌겠다는 생각조차 없다네. 법학과엘 가라고 식구들이 그랬는데 내가 그냥 여기 들어왔어. 내가 공부에 흥미 없어 한다는 걸 자네도 알지?”

 

“그래. 형준이 자네 장래 지망이 뭘까 하고 생각한 일이 있었어.”

 

“난 장사나 하고 살 생각이야. 뭐 할 게 있어. 고등학교 땐 판검사니 외교관이니 꿈도 꿨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도 없다구. 왜 그런지 알아? 아냐, 알 필요가 없지. 자네 희망이나 말해봐.”    

 

“난 선생이나 할까? 아냐. 우리 아버지가 시골서 선생노릇 오래 했으니 난 관두겠어. 그러고 보니 할 게 없군. 뭘 하겠다고 해서 그대로 되는 것도 아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