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형준이를 안 것은 입학초기였다. 그를 그렇게 빨리 알게 된 까닭은 우리가 지닌 미묘한 공통점 때문이다. 독일어라곤 문자도 모르고 독일어과에 입학한 나는 초기에 몹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전공이긴 해도 신입생에겐 문자부터 친절하게 가르칠 줄 알았는데 어떤 교수는 첫 시간부터 대뜸 토마스 만의 저 유명한 소설 <토니오 크뢰거>를 들고 와서 강독을 하는 것이었다.
용케도 다른 학생들은 고등학교에서 이미 독일어를 배운 탓인지 독일말로 된 그 소설을 잘도 읽어냈다. 촌뜨기인 나는 너무 겁을 집어먹은 나머지 처음부터 강의실의 앞자리를 피해 맨 뒷자리를 단골삼아 차지하곤 했다. 앞자리에 앉았다가 교수님 눈에 띄어 질문을 받을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지날수록 앞자리에 앉는 것은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대체로 앞자리는 새침떼기 여학생들과 공부를 못해서 열병이라도 난 것처럼 언제나 원서와 사전을 옆구리에 끼고 다니는 학구파 남학생들 차지였다.
물론 뒷자리를 단골로 삼는 학생이 나뿐만 아니었다. 형준이도 이른바 두더지에 속했다. 그는 키가 크고 얼굴이 호남형인데 너무 과묵해서 나이가 실제보다 몇 살쯤 많아 보였다. 우리는 늘 뒷구석에 서로 가까이 앉아 있었기 때문에 말을 트기 전부터 상대방에게 서로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녀석도 과묵하고 나는 또한 촌뜨기답게 어눌하고 소심해서 한동안은 서로 말을 건네지 못했다.
내가 녀석에게 유독 관심을 갖게 된 이유가 따로 있었다. 녀석은 언제 봐도 책이나 노트 따위를 들고다니지 않았다. 강의실에 들어오면서 빈손을 건들거리며 들어서는 녀석을 볼 때마다 나는 몹시 녀석에게 흥미를 느꼈다. 학교를 다 뒤져봐도 마치 소풍이나 오는 놈처럼 맨날 빈손으로 다니는 사람은 그 녀석 한사람뿐이었던 것이다. 공부시간에는 녀석은 당연히 딴전을 피웠다. 교수님 얼굴 따위는 한번도 응시하는 법이 없고 멍하니 창밖을 보거나 호주머니 속에서 오징어나 땅콩을 꺼내서 줄곧 입을 쉬지 않고 우물거렸다.
그날도 나로서는 골치 아픈 <토니오 크뢰거> 시간이었다. 이미 수업이 시작된 지 십분이나 지났는데 키가 멀대 같이 큰 녀석이 어슬렁어슬렁 뒷구석 자리로 와서 앉았다. 그는 시간이 늦어 뛰어왔는지 손수건을 꺼내 이마의 땀을 닦았다. 그런 뒤 내쪽을 자꾸 흘끔거렸다. 한참 뒤에 내 필기대 위에 구운 오징어 한 조각이 툭 떨어졌다.
“그거 자네 먹어.”
걸걸한 남자 목소리가 곁에서 들렸다. 나는 너무 갑작스런 선물에 놀라 옆을 돌아봤다. 형준은 모른 척하고 오징어를 우물우물 씹으면서 창밖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저 녀석도 내가 공부시간에 심심해하는 걸 알고 있나 보군. 우린 동병상련일까. 형준에 대해 나는 갑자기 친밀감을 느꼈다. 수업이 끝나자, 이번엔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오징어 고마웠어. 자넨 오형준이지?”
“그래. 자넨 김덕수 아냐?”
복도로 걸어나오면서 우린 자연스럽게 통성명을 했다. 마침 점심시간이라 도시락을 가져왔거나 주머니에 돈이 있는 학생들은 뒷동산 기슭에 있는 식당으로 부지런히 몰려갔다. 나도 형준도 식당파가 아니었다. 무슨 얘기냐 하면 고지식하게 도시락을 챙겨오는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식당에 가서 돈을 내고 돈까스나 오무라이스를 사먹을 형편도 아니란 말이다.
점심을 안 먹는 학생들은 그 시간에 뒷동산에 올라가서 혼자 사색에 잠기거나 운동장 가에 앉아서 운동부 아이들이 농구나 야구경기 하는 걸 물끄러미 구경하곤 했다. 나는 뒷동산을 즐겨 올라갔고 형준은 아마 주로 운동장에서 어슬렁거렸던 것 같다. 교실에서 나온 우리는 약속이나 한듯 뒷산으로 올라가서 풀밭에 나란히 주저앉았다.
“난 독일어에 취미가 없어서 말야.”
앉자마자, 형준이 묻지도 않은 말을 했다. 자기가 책도 없이 다니고 늘 뒷자리에 앉는 걸 내게 변명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나도 그래. 독일어가 처음이거든”
나 역시 내 처지를 변명하고 싶긴 마찬가지였다.
“고등학교 때 안 배웠어? 난 배웠는데.”
형준이 내게 물었다.
“고등학교를 걸렀거든.”
“그래? 따라가려면 한참 고생해야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