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답변은 부분적으로 맞기도 했고 그렇지 않은 점도 있었다. 어쨌든 완전히 정직한 대답은 아니었다. 형준 역시 내게 정직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는 걸 나는 알았다. 우리는 서로가 그 부분에서 뭔가 감추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 까닭은 뭘까? 불확실한 미래와 불확실한 사회상황 때문이었을까? 사회에서 우리를 받아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장래에 관해 정직한 답변을 할 수 없었던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것을 나는 그해 겨울에야 알게 되었다.
그해 겨울 나는 난생 처음 단편소설 한 편을 완성했다. 정말 처음 써본 소설이었다. 막상 써놓고 보니 이게 소설이 될 수 있는지 의문이 가득했다. 스승도 없고 조언을 들려줄 친구도 없었던 것이다. 문득 <토니오 크뢰거>를 강의하던 멋쟁이 교수가 떠올랐다. 그분은 학교 부근의 관사에서 자기 아내와 단둘이 살고 있었다. 그 교수에게 작품을 보여보자고 생각했다. 어느 날 교수실로 작품을 들고 나는 들어갔다. 교수는 작품을 받아들고 내게 말했다.
“자네가 독일어과 학생인가?”
“그렇습니다.”
“나는 자넬 처음 보는 것 같은데. 그동안 학교에는 자주 안 나왔나 보군.”
“그게 아니라 제가 공불 못해서 항상 맨 뒷자리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교수님께서 저를 못보셨을 겁니다.”
교수는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뒤 말했다.
“그렇군. 하여간 내가 이걸 읽으려면 시간이 걸리니까 다음 주에나 내게 들러주게.”
나는 인사를 하고 교수실에서 나왔다. 일주일이 바람처럼 지나갔다. 그리고 다시 <토니오 크뢰거>시간이 다가왔다. 이윽고 수업이 시작되었는데 멋쟁이 교수님이 책을 펼치기 전에 뒷구석 자리를 열심히 찾아봤다. 물론 풋나기 작가가 거기 앉아 있나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나와 눈이 마주친 교수님은 빙긋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나는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늘 그렇듯이 내 옆에는 형준이 앉아 있었다. 교수님이 입을 열었는데 전혀 엉뚱한 얘기를 꺼내는 게 아닌가.
“이 교실에 앉아 있는 김덕수란 학생이 지난주에 내게 가져온 소설을 읽어봤는데 난 아주 재미있게 봤습니다. 정말 특출한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이런 말을 내가 여러분에게 하는 것은 우리가 외국 문학작품을 공부하는 것도 결국은 우리 문화, 나아가서 우리 문학을 살찌우게 하기 위한 것임을 강조하기 위해섭니다. 자, 책을 펼치고 공부 시작합시다.”
앞줄의 모범생들이 뒤를 힐끗힐끗 돌아보았다. 나는 불량학생에서 갑자기 공부를 제일 보람있게 한 모범생으로 탈바꿈한 셈이었다. 나는 얼굴이 뜨거워 고개를 떨구고 어찌할 줄을 모르고 있었다. 형준이 잠자코 앉아 있을 턱이 없었다.
“저건 자네 얘길 하는 거지? 맞지?”
나는 고객만 끄덕였다.
“대단한데. 자넨 어쩐지 그럴 것 같더라구. 저 멋쟁이가 어지간해선 칭찬하는 법이 없는데 저렇게 말하는 걸 보니까 굉장히 놀랐던 모양이군. 나한텐 왜 그런 걸 감췄어?”
친구 입장에서 섭섭하다는 표정이었다.
“감추긴. 뭐가 대단해서 떠벌리겠어. 처음 쓴 거야. 뭐가 뭔지도 모르면서 그저 써본 거라구. 난 칭찬이 믿어지지 않아. 멋쟁이가 반대로 얘기했을지도 모르지.”
“아냐. 학생을 놓고 농담하는 교수가 어디 있어. 축하해 아뭏든.”
수업이 끝났을 때 교수님이 나를 불렀다. 그는 내게 악수까지 청하며 말했다.
“아주 재미있더군. 훌륭한 솜씨야. 그래서 내가 대학신문에 추천을 했어. 신문에 발표해 보라구. 찾아가서 원고료를 받아오면 될 거야. 내가 괜한 짓을 했나?”
“아닙니다. 교수님 감사합니다.”
“열심히 해보게. 자넨 재능이 있어.”
교수는 복도 저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형준과 학보사로 찾아갔다. 돈을 준다는 건 눈이 번쩍 뜨이는 얘기였다. 나는 언제나 돈이 없었다. 돈이 없어서 학교식당에 들어간 게 손가락을 꼽아볼 지경이었다. 그나마 남을 따라 들어가서 얻어먹은 기억뿐이었다. 형준으로부터도 물론 몇 차례 얻어먹었다.
학보사에서 기자 하나가 이름을 확인하더니 돈이 든 봉투를 내게 줬다. 뜯어봤더니 학교 식당에서 돈까스 스무 그릇은 사먹을 수 있는 액수였다. 나는 형준을 데리고 기세 좋게 학교식당으로 들어가서 돈까스를 시켜 먹었다. 밥을 먹고 나오는데 니체가 책을 끼고 걸어오다가 나와 마주치자, 잠시 그 자리에 멈춰섰다. 그는 내게 말을 걸까 말까 망설이는 눈치였다. 그러다가 맘을 정한 듯 돌아서서 내게 다가오더니 정중하게 말했다.
“학보에 자네 글이 나오면 내가 읽어보겠다. 자넨 죽음과 신에 관해서 어떻게 생각하지?”
“뭐 별로 말할 게 없는데. 신이라는 게 있는지 없는지도 현재로는 알 수가 없고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