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혁은 같이 나오던 선수들이 흘끔흘끔 돌아다보고, 무어라고 수군거리며 전차길로 건너가는 것을 보면서 흙투성이가 된 운동복 바지에다, 얼른 손바닥을 문지르고 백씨의 악수를 받았다.
“박동혁이올시다. 백 선생의 선성은 많이 들었습니다.”
하고 체수에 걸맞지 않게 수줍어한다. 백씨가,
“아, 이 미스 채가 자꾸만 구경을 가자구 졸라싸서…”
하고 돌아다보니까, 영신은,
“아이, 선생님도… 제가 언제 졸랐어요?”
하고 백선생의 말끝을 문지르며 살짝 흘겨본다.
“아뭏든 아주 파인플레이를 보여 주셔서 여간 유쾌하지 않았습니다.”
하는 백씨의 칭찬에,
“천만에요, 두 분이 오실 줄 알았더면 꼭 이길 걸 그랬습니다.”
하고 동혁은 허연 이를 드러내며 운동 선수다운 쾌활한 웃음을 웃어 보인다. 그때에 먼저 전차를 탄 선수들이 승강대에서,
“여보게 동혁이…”
하고 소리를 지르며 어서 오라고 손짓을 한다. 동혁은,
“가네, 가!”
하고 손을 들어 보이자, 영신이가 다가서며,
“이따가 꼭 오시죠? 시간은 일곱 시야요.”
하고 재빨리 묻는다. 동혁은,
“네, 가겠습니다.”
한 마디를 던지듯하고, 백씨에게는 인사도 할 사이가 없이 전차 길로 달려가더니, 속력을 놓기 시작한 전차를 홱 집어탔다. 전차가 지나간 뒤에는 두 줄기 선로만 영신의 눈이 부시도록 석양을 반사하였다.
동혁은 약속한 시간에 거의 일 분도 어김없이 백씨의 집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목욕을 하고 교복으로 갈아입고 와서, 중문간까지 나갔던 이 집의 주인은 그를 얼른 알아보지 못하다가,
“어서 들어오세요. 난 누구시라구요. 시간을 썩 잘 지켜 주시는군요.” 하고 팔뚝 시계를 보고 너스레를 놓으며, 동혁을 반가이 맞아들인다.
“댁이 훌륭한데요.”
하고 동혁은 두리번거리며 집안을 둘러본다.
삼천 원이나 들여서 새로 지었다는 집은 네 귀가 반짝 들렸는데, 서까래까지 비둘기장처럼 파란 페인트칠을 하였고, 분합마루 유리창에는 장미꽃 무늬가 혼란한 휘장을 늘여 쳤다. 마당은 그다지 넓지 못하나 각색 화초가 어우러져 피었는데, 그 중에도 이름과 같이 청초한 옥잠화 두어 분은 황혼에 그윽한 향기를 풍긴다.
먼저 온 회원들은 응접실로 쓰는 대청에 모여서 혹은 피아노를 눌러 보고, 혹은 백씨가 구미 각국으로 시찰과 강연을 하러 다닐 때 박은 사진첩을 꺼내 놓고 둘러앉았다.
그가 여류 웅변가요, 음악도 잘 한다는 말은 들었지만 그 집에 피아노까지 있을 줄은 몰랐고, 독신으로 지내는 여자가 이러한 문화주택을 짓고 지낼 줄은 더구나 상상 밖이었다.
그는 대청으로 올라가서, 주인의 소개로 칠팔 명이나 되는 젊은 여자들과 인사를 하였다. 여자들은 입 속으로만 제 이름을 대서 하나도 기억은 할 수 없다. 남자 회원은 아직 한 사람도 안온 모양인데 웬일인지 안내역인 영신은 그림자도 나타내지를 않는다.
'그저 안 왔을 리는 없는데…' 동혁은 매우 궁금하기는 하나, 이 구석 저 구석 기웃거리며 찾을 수도 없고, 채영신이는 왜 보이지를 않느냐고 누구더러 물어보기도 무엇해서, 한 구석 의자에 걸터앉아서 분통같이 꾸며 놓은 마루방 치장만 둘러보았다.
백씨가 조선옷으로 갈아 입고 나오는데, 반쯤 열린 침실이 언뜻 눈에 띠었다. 유리같은 양장판 아랫목에는 새빨간 비단 보료를 깔아 놓았고, 그 머리맡의 자개 탁자는 초록빛의 삿갓을 씌운 전등이 지금 막 들어와서 으스름달처럼 내리비친다.
여자의, 더구나 독신으로 지내는 여자의 침실을 들여다보는 것이 실례인 줄 모르는 것은 아니나 주인이 제가 앉은 바로 맞은 쪽의 미닫이를 열고 드나들기 때문에 자연 눈에 띠는 데야 일부러 고개를 돌릴 까닭도 없었다.
동혁은 그와 똑같이 으리으리하게 치장을 해 놓은 방이 그 웃간에도 또한 이간쯤이나 엇비슷이 들여다보이는 데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왜들 얘기도 안하고 있어요? 자, 이것들이나 들으면서 우리 저녁을 먹읍시다.”
하고 귀중품인 듯 빨간 딱지가 붙은 유성기판을 들고 나오는데, 그 등뒤를 보니까 웃목에 반간통이나 되는 체경이 달려 있다. 동혁은 속으로 '오오라, 체경에 비쳐서 또 다른 방이 있는 것 같은 걸 몰랐구나, 기생방이면 저만큼이나 차려 놨을까' 하면서도, 은근히 영신이를 기다리느라고 고개를 대문편으로 돌리곤 한다. 그러자,
“아 이건 별식을 한다고 저녁을 굶길 작정야?”
하고 백씨가 분합 끝으로 나서며 외치니까,
“네, 다 됐어요.”
하는 귀에 익은 목소리가 부엌 속에서 나더니, 뒤미처 에이프런을 두른 영신이가 양식 접시를 포개 들고 이마에 땀을 흘리면서 나온다. 동혁이가 온 줄은 벌써 알았지만 음식을 만들다 말고 내달아 번잡스러이 인사를 하기가 싫어서 이제야 나온 것이다. 동혁은 영신과 눈이 마주쳐 '오, 부엌 속에 있었구나' 하면서 말 대신 웃음을 띠우고, 머리만 숙여 보인다.
유성기를 틀어 오케스트라(交響樂)를 반주 삼으며, 여러 사람은 영신이가 만든 라이스카레와 오믈렛 같은 양식을 먹으면서 이야기판이 벌어졌다.
이야기판이 벌어졌대도, 영신은 이 집의 식모와 함께 시중을 드느라고 부엌으로 들락날락하고, 농민수양소(農民修養所) 여자부에서 초대를 받아 온 시골학생들은 처음으로 먹는 양식을 잘못 먹다가 흉이나 잡힐까 보아 포오크를 들고 남의 눈치들만 보는데, 백씨 혼자서 떠들어댄다.
동혁과 영신을 번갈아 보면서, 그 동안에 몇십 번이나 곱삶았을듯한 정말(덴마크)의 시찰담으로부터 구미 각국의 여성들의 활동하는 상황 같은 것을 풍을 쳐가며 청산유수로 늘어놓았다.
청년회의 농촌지도부(農村指導部) 간사로 있는 얼굴이 노란 김씨라는 사람이 늦게야 참석을 해서 인사를 하였을 뿐이요, 남자는 단 두 사람이라, 동혁은 잠자코 제 차례에 오는 음식만 퍼넣듯하고 앉았다.
영신이가 모박아서 두둑이 담아 준 라이스카레 한 접시를 게눈 감추듯 하고는 점직하니 앉았는 동혁을 보고 백씨는,
“여봐 영신이, 이 미스터 박은 한 세 그릇 자셔야 할 걸.”
하고 더 가져오라고 눈짓을 한다. 영신은 저도 그런 생각을 했다는 듯이 카레 건더기를 담은 것을 남비째 들고 들어와서,
“첫 번 솜씨가 돼서 맛은 없지만, 남기시면 안돼요.”
하고 귓속말하듯 한다. 동혁은,
“허, 이건 나를 밥통으로 아시는군요.”
하며 이 집에 와서 처음으로 영신이와 말을 주고 받았다.
식사가 끝난 뒤에는 차가 나오고 실과가 나왔다.
백씨는 잠시도 입을 다물 사이가 없이 '우리의 살 길은 오직 농촌을 붙드는 데 있다'는 것과 '여러분들과 같은 일꾼들의 어깨로 조선의 운명을 짊어져야 한다'는 등 열변을 토한다.
여러 사람들이 매우 감동이 된 듯 머리를 숙이고 있는 것을 보고, 백씨는,
“미스터 박, 그동안 많이 활동을 하셨다니 그 얘기를 좀 들려주시지요. 많은 참고가 될 줄 믿습니다.”
하고 농촌 운동에 관한 감상을 묻는다. 동혁은,
“나는 여러분의 말씀을 들으려고 왔으니까요…”
하고 사양을 하여도, 무슨 말이든지 해달라고 굳이 조르다시피 하니까, 동혁은 못이기는 체하고 찻잔을 입에서 떼며, 뒤통수를 긁적긁적하더니,
“그럼 한 마디 하지만, 들으시기가 좀 거북하실는지도 모를 껄요.”
하고 뒤를 다진다.
“온 천만에, 좋은 말은 귀에 거슬리는 법이라는데요.”
사교에 능란한 백씨라, 낯을 조금 붉히는 듯하면서도 그만한 대답쯤은 예사로 한다. 동혁은 실내의 장식과 여러 사람의 얼굴을 다시 한번 둘러 본 뒤에,
“나는 뒷구멍으로 남의 흉을 본다든지 당자가 듣지 않는데 뒷공론을 하는 걸 싫어하는 성미예요.”
하고 화두를 꺼내더니 목소리를 떨어뜨려,
“이런 모임이 고적하게 지내는 백 선생을 가끔 위로해 드리는 사교적 회합이라면 모르지만 농촌을 지도할 분자들이 장래에 할 일을 의논하려는 모임 같지는 않은 감상이 들었어요.”
하고 눈도 깜짝거리지 않고 쳐다보는 영신을 향해서 말하듯이,
“나는 이런 정경을 눈앞에 그려보고 있었는데…들판의 정자라고 할 수 있는 원두막에서 우리들이 모였다고 칩시다. 몇 사람은 밭으로 내려가서 단내가 물큰하고, 코를 찌르는 참외나, 한아름이나 되는 수박을 둥둥 두드려 보고는 꼭지를 비틀어서 이빨이 저리도록 찬 샘물에다가 흠씬 담가 두거든요. 그랬다가 해가 설핏할 때 그놈을 꺼내설랑 쩍 뻐개 놓고는 삥 둘러앉아서 어적어적 먹어가며 얘기를 했으면, 아마 오늘 저녁의 백 선생이 하신 말씀이 턱 어울릴 겝니다.”
하고 의미 깊게 듣는 듯이 고개만 끄덕여 보이는 주인을 흘낏 본다. 영신은,
“아이, 말만 들어도 침이 괴네.”
하고 재미있는 옛날 이야기를 듣는 어린애처럼 다가앉는다. 동혁은 물끄러미 영신을 보다가, 말을 계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