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자는 아까보다도 더 정중한 태도를 짓고 동혁이가 섰던 자리로 가서, 장내가 정숙해지기를 기다려,

 

“박동혁군의 말은 개념적이나마 누구나 존중해야 할 좋은 의견으로 압니다.”

 

하고는,

 

“그러나, 현재의 정세로 보아서 어느 시기까지는 계몽 운동과 사상 운동을 절대로 혼동해서는 아니됩니다. 계몽 운동은 계몽 운동에 그칠 따름이지 부질없이 혼동해 가지고 공연한 데까지 피해를 끼칠 까닭은 털끝만큼도 없습니다.”

 

하고 단단히 주의를 시킨다. 그때에 한 구석에서,

 

“에그 추워 - ”

 

하고 일부러 어깨와 목소리를 떠는 학생이 있었다.

 

동혁의 뒤를 이어 서너 사람이나 판에 박은 듯한 경과 보고가 지루하게 있은 후, 사회자는,

 

“이번에는 금년에 처음으로 참가한 여자 대원 중에서 제일 좋은 성적을 나타낸 ○○여자 신학교에서 재학 중인 채영신(蔡永信)양의 감상담이 있겠습니다.”

 

하고 회장 오른편에 여자들이 모여 앉은 데를 바라다본다. 남학생들은 그 편으로 머리를 돌리며 손뼉을 친다. 채 영신이라고 불리운 여자는 한참만에 얼굴이 딸기빛이 되어 가지고 일어서더니,

 

“전 아무 말도 하기 싫습니다!”

 

하고 머리를 내저으며 야무지게 한 마디를 하고는 펄썩 앉아 버린다. 사회자는 영문을 몰라서 눈이 둥그래졌다.

 

뜻밖에 미리 약속까지 하였던 여자가 말하기를 딱 거절하는 데는, 사회자와 청중이 함께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이유를 말합시다.”

 

“그대신 독창이래두 시키세.”

 

상대자가 여자인 까닭에 더욱 호기심을 가진 남학생들이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다. 음악회에서 억지로 끌어내어 재청이나 시키는 것처럼, 짓궂게 박수를 하며 야단들이다.

 

“간단하게나마 말씀해 주시지요.”

 

사회자는 좀 무색한 듯이 채 영신이가 앉은 편으로 몇 걸음 다가오며 어서 일어나기를 권한다.

 

그래도 영신은 꼼짝도 아니하고 앉았다가 곁에서 동지들이 옆구리를 찌르고 등을 떠다밀어서, 마지못해 일어났다.

 

서울 여자들은 잠자리 날개처럼 속살이 하얗게 내비치는 깨끼 적삼에 무늬가 혼란한 조세트나, 근래에 유행하는 수박색 코로나프레프 같은 박래품으로 치마를 정강마루까지 추켜 입고 다닐 때연만 그는 언뜻 보기에도 수수한 굵다란 광당포 적삼에 검정 해동치마를 입었고, 화장품과는 인연이 없는 듯 시골서 물동이를 이고 다니는 과년한 처녀를 붙들어다 세워 놓은 것 같다.

 

그러나 얼굴에 두드러진 특징은 없어도 청중을 둘러보는 두 눈동자는 인텔리(지식계급) 여성다운 이지(理智)가 샛별처럼 빛난다. 그는 사회자를 쏘아보며,

 

“첫째, 이런 자리에서 남자와 여자를 구별하는지는 모르지만, 남이 다 말을 하고 난 맨 끄트머리에 언권을 주는 것이 몹시 불쾌합니다.”

 

샛되고 결곡한 목소리다.

 

“흥, 엔간한걸.”

 

“여간내기가 아닌데.”

 

남학생들은 혀를 내두르며 수군거린다. 제자리에 돌아와 이제껏 흥분을 가라앉히느라고 눈을 딱감고 있던 동혁이도, 얼굴을 쳐들고 채영신의 편을 주목한다.

 

두 사람은 매우 가까운 거리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영신은 말을 이어,

 

“둘째는 제 속에 있는 말씀을 솔직하게 쏟아 놓고는 싶어두요, 사회하시는 분이 또 무어라고 제재를 하실 테니깐, 구차스레 그런 속박을 받아가면서까지 말을 할 필요가 없을 줄 압니다.”

 

하고 다시 앉아 버린다. 이번에는 여자석에서 손뼉치는 소리가 생철지붕에 소낙비 쏟아지듯한다.

 

사회자는 그만 무안에 취해서 얼굴을 붉히며 매우 난처한 표정을 짓다가,

 

“아까 박동혁군이 말할 때는, 시간이 없다고 주의를 시킨 것이지, 말의 내용을 간섭한 것은 아닙니다.”

 

하고 뿌옇게 발뺌을 한다. 그러자 동혁이가 벌떡 일어나 나치스식으로 팔을 들며,

 

“사회!”

 

하고 회장이 찌렁찌렁하도록 부른다.

 

“밤을 새우는 한이 있더라도, 이런 기회에 우리는 충분히 의견을 교환하고 싶습니다. 우선 지도 원리를 통일해 놓고 나서 깃발을 드는 것이 일의 순서가 아니겠읍니까.”

 

하고 톡톡히 항의를 한다. 사회자는 시계를 꺼내 보고 사교적 웃음을 띠우며,

 

“채영신씨, 그럼 내년에는 맨 먼첨 언권을 드릴 테니 그렇게 고집하지 마시고 말씀하시지요.”

 

하고는 장내의 공기를 완화시키려고 슬쩍 농친다.

 

영신은 다시 망설이다가, 이번에는 대접상으로 간신히 일어났다.

 

“저는 금년에야 참가를 했으니까, 이렇다고 보고를 할만한 재료가 없고요, 고생을 좀 했다고 자랑할 것도 못될 줄 압니다. 그저 앞으로 이 운동을 꾸준하게 해 나갈 결심이 굳을 뿐이니까요.”

 

하고는 그 영채가 도는 눈을 사방으로 돌리더니,

 

“그렇지만, 저 역시 여러분께 우리 계몽대의 운동이 글자를 가르치는 데만 그치지 말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 민족의 거의 전부라고 할만한 절대 다수인 농민들의 갈 길을 열어 주기 위해서 우선 그네들에게 희망의 정신을 넣어 주자는…”

 

하다가 상막해서 잠시 이름을 생각해 보더니,

 

“…박동혁씨의 의견은 저도 전적 동감입니다!”

 

하고 남학생 편으로 고개를 돌린다.

 

“여러분은 학교를 졸업하면 양복을 갈아 붙이고 의자를 타고 앉아서, 월급이나 타먹으려는 공상부터 깨뜨려야 합니다. 우리 남녀가 총동원을 해서 머리를 동쳐매고 민중속으로 뛰어들어서 우리의 농촌, 어촌, 산촌을 붙들지 않으면, 그네들을 위해서 한 몸을 희생에 바치지 않으면, 우리 민족은 영원히 거듭나지 못합니다!”

 

그는 무슨 말을 더 하려다가, 북받쳐 오르는 흥분을 스스로 억제하지 못하고 고만 쓰러지듯이 앉아 버린다. 장내는 엄숙한 기분에 잠겼다. 말썽을 부리던 남학생들도 머리를 수그리고 있다. 그네들의 머리 속에도 감격의 물결이 출렁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매우 긴장된 중에 K보육학교 학생들의 코러스로 간친회는 파하였다. 동혁은 여러 학생들 틈에 섞여서 서대문행 전차를 탔다. 전차가 마악 떠나려는데, 놓치면 큰일이나 날듯이 뛰어오르는 한 여학생이 있다. 그는 동혁에게 생후 처음으로 깊은 인상을 준 채 영신이었다.

 

영신은 승객들에게 밀려서 동혁이가 걸터앉은 데까지 와서는 손잡이를 붙들고 섰다. 두 사람은 아직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검붉은 얼굴을 서로 무릎이 닿을 듯한 거리에서 대하게 되었다.

 

그들은 저도 모르는 겨를에 서로 목례를 주고받았다. 비록 오늘 저녁 공석에서 처음 대면을 하였건만, 여러 해 사귀어 온 지기와 같이 피차에 반가왔던 것이다.

 

동혁은 앉아 있기가 미안해서,

 

“이리 앉으시지요.”

 

하고 일어서며 자리를 내준다. 영신은 머리를 숙이며,

 

“고맙습니다. 전 섰는 게 시원해 좋아요.”

 

하고 사양하면서 도리어 반 걸음쯤 물러선다.

 

동혁은 아직도 애티가 남아 있어, 귀염성스러운 영신의 입모습을 보았다. 그 입모습을 스치고 지나가는 미소를 보았다.

 

“창에서 들어오는 바람이 더 시원한데요.”

 

동혁은 엉거주춤하고 자꾸만 앉기를 권한다.

 

“어서 앉아 계세요. 전 괜찮아요.”

 

“그럼 나도 서겠습니다.”

 

동혁이가 반쯤 몸을 일으키기가 무섭게 다른 승객이 냉큼 뚱뚱한 궁둥이를 들이밀었다. 동혁은 '어지간히 고집이 세구나' 하면서도, 영신이가 저를 연약한 여자라고 자리를 사양하는 그런 대우가 받기 싫어서 굳이 앉지 않는 줄은 몰랐으리라.

 

차 속이 붐벼서 두 사람은 손잡이 하나를 나누어 쥐고 옷이 스치도록 나란히 섰건만,

 

“되려 미안합니다.”

 

“천만에요.”

 

하고 한 마디씩 주고 받은 다음에는 말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