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튿날 학교로 내려간 뒤에, 동혁은 며칠 동안 마음의 안정을 잃고 지냈다. 개학초가 되어서 기숙사 안이 뒤숭숭한 탓도 있지만, 영신의 첫인상이 앉으나 서나 눈앞에 떠돌아서 공연히 들썽거리는 마음을 가라앉히기에 여간 힘이 들지 않았다.
상학 시간에는 노오트 위에 펜을 달리다가도, 손을 멈추고 칠판 위에 환등처럼 나타나는 영신의 환영을 멀거니 바라보기도 하고, 운동장에 나가서는 축구부의 선수로, 골키퍼 노릇을 하여 왔는데 상대편에서 몰고 들어와서 힘없이 질러 넣는 공도 어름어름하다가 발길이 헛나가서 막아내지 못하기를 여러 번이나 거듭하였다. 마침 서울법전(法專)과 시합을 하려고 맹렬히 연습을 하는 판이라, 축구부 감독으로부터,
“여보게 박군, 요새 며칠은 왜 얼빠진 사람 같은가? 이러다간 우승기를 빼앗기고 말겠네.”
하는 주의까지 받았다. 그럴수록 동혁은 '내가 정말 왜 이럴까?' 하고 평소에 자제심이 굳센 것을 믿어오던 제 자신을 의심하리만큼 침착해지지 않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그 수수한 차림 차림… 조금도 어설픈 구석이 없는 그 체격… 그리고 혈색 좋은 얼굴에 샛별같이 빛나던 눈동자…또 그리고 언권을 먼저 주지 않았다고 말하기를 딱 거절하던 그 맺고 끊는 듯하던 태도… 그나 그뿐인가? 남학생들에게 정면으로 일장의 훈계를 하던 정열적이면서도 결곡한 목소리!
그 어느 한 가지가 머리 속에 사진 찍혀지지 않은 것이 없고, 말 한 마디조차 귀밖으로 사라진 것이 없다.
'처음 보는 여자다. 외모가 예쁜 여자는 길거리에서도 더러 본 일이 있지만, 채 영신이처럼 의지가 굳어 보이는 여자는 처음이다. 무엇이든지 한번 결심하면 기어이 제 손으로 해내고야 말 것같은 여자다'
이런 생각을 하느라고 필기를 하지 못하고, 헛발길질만 자꾸 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박동혁씨의 의견과 전적 동감입니다'
하던 한 마디를 입 속으로 외우고 또 외우고 하다가는,
'오냐, 나는 비로소 한 사람의 동지를 얻었다! 내 사상의 친구를 찾았다!'
하고 부르짖으며 저 혼자 감격하는 것이었다.
아직까지 고학을 하여 온 늙은 총각으로 이성과 접촉할 기회도 없었지만, 틈틈이 여러 가지 모양의 여성을 머리 속에 그려 보고 장래를 공상해 본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간담회 석상에서 채 영신이란 여자를 한번 보고 밤거리를 몇십 분 동안 같이 걸어 본 뒤에는 눈앞에서 아른거리던 그 숱한 여자들의 그림자가 한꺼번에 화다닥 흩어져 버렸다. 그리고 그 대신으로 굵다란 말뚝처럼 동혁의 머리 속에 꽉 들어와 박힌 것은 '채 영신' 하나뿐이다.
'그날 무사히 들어가 잤나? 학교서 말이나 듣지 않았나?'
몹시 궁금은 하였건만, 규칙이 까다로운 여학교로 편지는 할 수 없었다. 그만한 용기야 못낼 것이 아니지만, 받는 사람의 처지가 곤란할 것을 생각하고 또다시 만날 기회만 고대하면서 한 일주일을 지냈다. 그러다가, 하루는 천만뜻밖에 영신에게서 편지가 왔다. 글씨는 남필 같으나 피봉 뒤에는,
'○○여자 신학교 기숙사에서 채영신 올림'
이라고 버젓이 씌어 있는 것을 보니, 동혁의 가슴은 울렁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날 밤은 여간 실례를 하지 않았습니다. 미안한 말씀은 형용하기 어렵사오며, 충분히 의견을 교환하고 좋은 말씀을 듣지 못한 것도 여간 유감이 되지 않습니다. 그날 밤 백선생도 늦게야 한강에서 들어오셔서 같이 자면서 간접으로나마 동혁씨를 소개하였더니 좋은 동지라고 꼭 한번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토요일 저녁마다 농촌 운동에 뜻을 둔 청년 남녀들이 모여서 토론도 하고 간담도 하는 모임이 백 선생 댁에서 열리는데 돌아오는 토요일에 올라오셔서 참석하시면 백 선생은 물론이고요, 여러 회원들이 여간 환영을 하지 않겠습니다. 꼭 올라와 주실 줄 믿사오나 엽서로라도 미리 회답을 하여 주시면 더욱 감사하겠습니다.'
동혁은 두 번 세 번 읽으며 편지를 손에서 놓을 줄 몰랐다.
영신은 그날 밤 그가 숭배하는 백씨에게 백 퍼센트로 동혁을 소개하였다. 어쩌면 동혁이가 영신에게 대한 것보다 그 이상으로 '박동혁'이란 인물의 첫인상이 깊었는지도 모른다.
그 구리빛같은 얼굴…황소처럼 건장한 체격…거기다가 조금도 꾸밀 줄은 모르면서도 혀끝으로 불길을 뿜어내는 듯한 열변…그리고 비록 처음 만났으나마 어두운 길거리로 제 뒤를 따라다니며 보호해 주면서도, 조그마치도 비굴하거나 지나친 친절을 보이지 않던 그 점잖은 몸가짐…
영신이가 입에 침이 말라서 동혁의 외모와 행동을 그려내니까, 백씨는,
“오우 그래? 온 저런. 매우 좋은 청년이로군.”
하고 서양 여자처럼 연방 감탄사를 늘어 놓았다.
그는 팔베개를 하고 자리 위에 비스듬히 누워 곁눈길로 흘끔흘끔 영신의 눈치를 살피더니,
“아아니, 영신이가 대번에 그 남자한테 홀딱 반한 게 아냐?”
하고 거침없이 한 마디를 하고 사내처럼 껄껄껄 웃는다.
영신의 얼굴은 금새 주황물을 끼얹은 것처럼 빨개졌다. 머리를 폭 수그린 채,
“아이 선생님도…”
하고 얼굴을 들지 못하는 것을 보고, 능갈친 백씨는 나이찬 처녀의 마음 속을 뚫고 들여다보는 듯이,
“그렇지? 별안간 앙가슴 한복판에 화살이 콱 들어와 박힌 것 같지? 난 못 속이지, 난 못 속여.”
하고 사뭇 놀려댄다. 영신은 그렇지 않다는 표시를 하느라고 억지로 얼굴을 쳐들며,
“제가 그렇게 경솔한 여잔 줄 아세요?”
하고 가벼이 뒤받듯하였다. 그러면서도 고개는 다시금 부끄러움에 눌려, 익은 곡식의 이삭처럼 저절로 수그러진다. 백씨는 한참이나 쌍꺼풀이 진 커다란 눈을 꿈벅꿈벅하며 무엇을 생각하다가, 손등으로 하품을 누르면서,
“그렇지만, 지금 와서 맘에 맞는 남자가 나타났더라도…”
하고는 주저주저하더니,
“벌써 약혼해 논 사람은 어떻게 하려누?”
하고 혼잣말 하듯 하며 돌아 누워버렸다.
…영신은 사흘 뒤에 동혁의 답장을 받았다. 제 모양과 같이 뭉툭한 철필 끝으로 꾹꾹 눌러 쓴 글발은 굵다란 획마다 전기가 통해서 꿈틀거리는 듯 피봉을 뜯는 영신의 손은 가늘게 떨렸다.
'주신 글월은 반가이 받았습니다. 그날 저녁에 실례한 것은 이 사람이었소이다. 남자끼리였으면 하룻밤쯤 새우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겠지만, 영신 씨의 사정을 보느라고 충분히 이야기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나 같은 사람을 그러한 의미 깊은 모임에 청하여 주신 것은 감사하지만, 오는 토요일에는 교우회의 책임 맡은 것이 있어서 올라가지 못하니 미안합니다. 그러나 그 다음 토요일에는 경성운동장에서 '법전'과 축구시합이 있어서 올라가게 되는데, 시합이 끝나면 시간이 늦더라도 백 선생 댁으로 가겠으니, 그때 반가이 뵙겠습니다.'
하는 사연이었다.
영신은 그 편지를 백씨에게까지 가지고 가서 보이고 침상 머리의 일력을 하루에 몇 번씩 쳐다보면서 그 다음 토요일이 달음박질로 돌아오기만 고대하였다.
시합하는 날, 동혁은 연습할 때와는 딴판으로 컨디션이 매우 좋았다. 신문사 같은 데서 후원을 하는 것도 아니요, 아직도 늦더위가 대단해서 그런지 넓은 운동장에 구경꾼은 반쯤밖에 안 찼다. 중학교끼리 대항을 하는 야구와도 달라서 응원도 매우 조용하게 진행이 되었다.
전반전까지는 골키퍼인 동혁이가, 적군이 몰고 들어와서 쏜살같이 들이지르는 볼을 서너 번이나 번갯불처럼 집어던지고 그 큰 몸뚱이를 방패삼아서 막아내고 한 덕으로 승부가 없다가, 후반에 가서는 선수 중에 두 사람이나 부상자가 생긴데 기운이 꺾여서 고농이 세 골이나 졌다.
그러나, 최후까지 딱 버티고 서서 문을 지키다가 볼을 막아 내치는 동혁의 믿음성 있고 민활한 동작에는 박수를 보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동혁은 풀이 죽은 다른 선수들과 섞여서 운동장으로 나왔다. 나오다가, 정문 곁에 비켜서서 저를 기다리고 있는 두 여자를 발견하였다.
“구경 오셨어요?”
동혁은 발을 멈추며, 뜻밖인 영신에게 인사를 하였다. 그 곁에 초록색 양장을 하고 서서 저를 주목하는 나이가 한 사십이나 되어 보이는 여자를 보자, '백현경이로구나' 하고 즉각적으로 깨달았다. 영신은 가벼이 답례를 한 뒤에,
“중간에 왔지만, 참 썩 잘 막아내시더군요.”
하고 흙과 먼지를 뒤집어쓰고 땀으로 뒤발을 한 동혁의 몸과 얼굴을 훑어보면서,
“백 선생님하고 인사하시죠.”
하고 양장 부인을 소개한다. 백씨는 동혁이가 모자를 벗을 사이도 없이 다가서며,
“오우, 미스터 박!”
하고 손을 내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