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대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밤바람은 여간 시원하지가 않다. 영신은 앞 머리카락이 자꾸만 이마를 간지려서, 물동이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손등으로 뿌리듯 한다. 한 발자국쯤 앞에 선 동혁의 안반 같은 잔등이에서는 교복에 절은 땀 냄새가 영신의 코에까지 맡힌다.

 

그러나, 한여름 동안 머리도 감지 않은 촌 여편네들과 세수도 변변히 하지 않은 아이들 틈에 끼어 지내서, 시크므레한 땀 냄새가 코에 밴 영신은 동혁의 몸에서 풍기는 냄새가 고개를 돌리도록 불쾌하지는 않았다. 전차가 '감영' 앞에 와 정거를 하자, 영신은 앞을 비비고 나서며,

 

“전 여기서 내립니다.”

 

하고 공손히 예를 한다.

 

동혁은 목을 늘이고 창 밖을 내다보더니,

 

“나도 여기서 내려야겠는데요.”

 

하고 영신의 뒤를 따라 내렸다. 안전 지대에서 두 사람은 즉시 헤어지지를 못하고 서성서성하다가,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동혁이가 물었다.

 

“학교 기숙사로 가서 잘 텐데, 문 닫을 시간이 지나서 걱정이야요. 여간 규칙이 엄해야죠. 시간이 급해서 사감한텐 말도 못하고 나왔는데.”

 

“그럼 쫓겨나셨군요. 물론 객지시지요?”

 

“네!”

 

두 사람은 방향을 정하지 못하고 아현리(阿峴里) 쪽으로 나란히 서서 걷는다.

 

“그럼 어떻게 하나요? 나는 이 근처서 통학하는 친구 집이 있어서 그리로 자러 가는 길이지만…”

 

“전 서울 사는 동지라곤 친한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

 

하고 영신은 다시 돌아서며,

 

“아뭏든 기숙사로 가보겠어요.”

 

하고 잘 가라는 듯이 인사를 한다. 동혁은 우연히 같은 전차를 탔으나, 여기까지 같이 왔다가 혼자 보내기가 안돼서,

 

“그럼 내 보호병정 노릇을 해 드리지요.”

 

하고 영신이가 사양하는 것을 금화산 밑에 있는 여신학교 기숙사 앞까지, 멀찌감치 걸어서 따라 올라갔다.

 

기숙사는 불을 끈 지도 오래인 모양인데, 대문을 잡아 흔들고 초인종을 연거푸 누르고 하여도 감감소식이다.

 

“이를 어쩌나. 이젠 숙직실로 전화를 걸어 보는 수밖에 없는데 전화나 어디 빌릴 데가 있어야죠.”

 

하며 영신은 발을 구르면서 어쩔 줄을 모른다.

 

두 사람은 하는 수 없이 다시 앞서거니 뒤서거니 언덕길을 더듬으며 감영 네거리로 내려왔다.

 

깊은 밤 후미진 구석으로 여학생의 뒤를 따라 다니는 것부터 부질없는 노릇인데, 더구나 아는 사람의 눈에 띄든지 해서 재미없는 소문이 퍼지는 날이면 영신에게 미안할 것도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동혁은 밤중에 길거리로 헤매게 된 젊은 여자를 내버려두고, 저 혼자만 휘적휘적 친구의 집으로 자러 갈 수는 없었다.

 

영신이도 건장한 남자가 뒤를 따라 주는 것이 정말 보호병정이나 데리고 다니는 것처럼 든든히 여기는 눈치를 살피고 동혁은,

 

“아뭏든 전화나 걸어 보시지요.”

 

하고 길가 포목전의 닫힌 빈지를 두드려서 간신히 전화를 빌려 주었다.

 

영신은 학교의 전화번호를 불렀다. 마지못해서 문은 열어 주고서도 귀찮은 듯이 눈살을 찌푸리고 돈을 세고 앉은 주인을 곁눈으로 보면서 두 번 세 번 걸어도 귓바퀴에서 이잉이잉 소리만 들릴 뿐 나와 주는 사람이 없다.

 

“도오시데모 오이데니 나리마센까라 마다 네가이마스.”

 

'암만해도 안 나오니 다시 걸어 주시오'

 

하고 교환수의 맵살스러운 목소리를 듣고야 영신은 하는 수 없이 전화를 끊고, 한숨을 내쉬면서 다시 길거리로 나왔다.

 

“이젠 여관으로 가실 수밖에 없군요.”

 

동혁이도 입맛을 다셨다. 영신은,

 

“저 때문에 너무 걱정을 끼쳐서 미안합니다.”

 

하고는 구둣부리로 길바닥을 후비듯하다가 고개를 외로 꼬고 무엇을 생각하더니,

 

“이젠 백선생님 집으로 갈까 봐요.”

 

한다.

 

“백선생이라니요?”

 

“왜 여자기독교연합회 총무로 있는 백현경씨를 모르세요?”

 

“이름은 익숙히 들었지만… 그이 집이 이 근천가요?”

 

영신은 전등불이 드문드문 보이는 송월동(松月洞) 쪽을 가리키며,

 

“네, 바로 저 언덕 밑이야요. 그 선생님이 농촌 문제를 강연하느라고 우리 학교에도 오시는데, 저를 여간 사랑해 주시지 않으셔요. 요새 새로 설립한 농민 수양소로 실습도 하러 같이 다녔는데, 사정을 하면 하룻밤쯤이야 재워 주시겠지요.”

 

그 말을 듣고 동혁은 매우 안심한 듯이,

 

“그럼, 진작 그리로 가시질 않고…”

 

하고는 그만 헤어지려는 것을,

 

“이왕 여기꺼정 와 주셨으니, 그 집까지만 바래다 주세요, 네?”

 

하고 영신이가 간청하다시피 해서, 동혁은 '아무려나' 하고 다시 뒤를 따랐다.

 

동혁이도, 조선 사회에서 누구나 모르는 사람이 없이 유명한 백현경이란 여자를 간접으로나마 알고 있었다. 말썽 많던 그의 과거로부터 최근에 세계 일주를 하고 돌아와서, 또다시 개인 문제로 크나큰 이야깃거리를 제공하였고, 한편으로는 농촌 사업을 한다고 강연도 다니고 저술도 하여서 '무슨 주의를 가지고 어떠한 방법으로써 조선의 농촌 운동을 지도하려나?'하는 점이 고등농림의 상급생인 동혁의 주의를 끌어왔었다.

 

그의 사사로운 생활에는 아무런 흥미도 느끼지 않으나, 그가 신문이나 잡지에 내는 논문이나 감상담 같은 것은 빼어 놓지 않고 읽어 오는 중이었다. '과연 어떠한 인물일까?' 동혁은 적지 않은 호기심을 가지고, 여자 중에는 호걸이라고 여간 숭배를 하지 않는 영신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에, 백씨의 집까지 당도하였다.

 

그러나 동혁은 밤중에 여기까지 여자의 뒤를 따라온 것이 새삼스러이 멋적은 것 같고 또는 백씨까지도 초면에 저를 어떻게 볼는지 몰라서, 모자를 훌떡 벗으며,

 

“자, 난 그만 실례합니다. 기회 있으면 또 만나뵙지요.”

 

하고는 발꿈치를 홱 돌린다.

 

“왜, 그렇게 가셔요? 잠깐만 기다려 주시면 제가 소개를 잘할 테니, 문간에서라도 백선생을 만나 보고 가시죠, 네? 여간 환영하지 않으실 걸.”

 

좁다란 골목 안을 환하게 밝히는 외등 밑에서 영신은 길목을 막아서면서 조르듯한다.

 

“아니요. 다음 날이나 만나게 해 주세요.”

 

하고 한 마디를 남기고, 동혁은 구두징 소리를 뚜벅뚜벅 내며 골목 밖으로 나가 버린다. 영신은 어찌하는 수없이,

 

“그럼 안녕히 가세요.”

 

하고 큰길로 사라지는 동혁의 기다란 그림자를 서운히 바라다보다가 돌아섰다. 대문을 흔들면서,

 

“백선생님! 백선생님!”

 

하고 커다랗게 불렀다. 모기장을 바른 행랑방 들창이 열리더니, 자다가 일어난 어멈이 얼굴을 반쯤 내밀며,

 

“한강으로 선유 나갑셔서 여태 안 들어오셨는뎁쇼.”

 

한다. 영신은 고만 울상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