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모두 잠든 깊은 밤이면 인어 공주는 넓은 대리석 계단을 걸어 내려와 차가운 바닷물에 발을 담갔습니다. 그러면 타는 듯 쑤시던 발이 시원해지는 것 같았어요. 그러면서 인어 공주는 저 바다 아래 깊은 곳에 있는 언니들을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밤이었습니다. 이 날도 인어 공주는 뜨거운 발을 바닷물에 담그고 있었어요. 이 때 귀에 익은 노래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바로 언니들이었어요.
인어 공주는 언니들에게 손짓을 했습니다. 언니들은 다가와 막내 공주 때문에 다들 얼마나 가슴아파 하는지를 얘기했습니다.
그 뒤로 언니들은 매일 밤 인어 공주를 찾아왔습니다. 한 번은 늙은 할머니와 아버지까지도 올라왔답니다. 할머니는 여러 해 동안 한 번도 바다 위로 올라온 적이 없었어요. 하지만 아버지와 할머니는 멀리서 인어 공주에게 손을 흔들기만 하고 육지 가까이로 오지는 못했습니다.
왕자님은 인어 공주를 무척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인어 공주를 왕비로 맞아들일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인어 공주는 꼭 왕자님과 결혼을 해야 했습니다. 그렇지 못하면 인어 공주는 영혼도 얻지 못한 채 바다의 물거품이 되어야 하니까요.
'왕자님, 나를 가장 사랑하실 수는 없나요?'
왕자님이 인어 공주의 이마에 입을 맞추면 인어 공주의 두 눈은 이렇게 묻는 것이었어요.
"그래요, 당신은 나에게 누구보다 사랑스러운 사람이라오. 당신은 이 세상 누구보다 마음씨가 곱고 아름다워요. 그리고 언젠가 내가 보았던 그 아가씨와 너무 닮았습니다. 그 때 나는 배를 타고 있다가 그 배가 난파하는 바람에 파도에 휩쓸려 바닷가로 밀려왔지요. 그리고 어떤 아리따운 아가씨가 나를 살려주었어요. 그래서 나는 아직도 그 아가씨를 잊을 수 없답니다. 그런데 당신은 그 아가씨를 꼭 닮았어요. 아마 행운의 여신이 당신을 내게 보낸 모양이지요? 우리 절대 헤어지지 말아요."
'아, 제가 바로 왕자님을 구한 사람이랍니다.'
인어 공주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입으로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왕자님이 말하는 그 아가씨는 바로 왕자님을 교회로 옮겼던 바로 그 아가씨였어요.
'그래, 나는 바위 뒤에 숨어서 그 아가씨를 보았어. 왕자님을 교회로 옮긴 아리따운 그 처녀 말이야.'
인어 공주는 깊이깊이 한숨을 쉬었습니다.
'그래, 그 처녀는 성스러운 수도원에 있다고 했어. 그 아가씨는 절대 이 세상에 나와서 살지 않을 거고, 두 번 다시 왕자님을 만나지도 못할 거야. 하지만 난 이렇게 늘 왕자님 곁에서 지켜보고 있어. 내가 왕자님을 돌볼 거야. 왕자님을 위해 내 생명까지 바칠 수 있어.'
그런데 어느 날 왕자님이 이웃 나라의 공주님과 결혼한다는 소문이 인어 공주의 귀에 들려왔습니다. 인어 공주는 고개를 저으며 미소를 지었습니다. 왕자님의 마음속은 자기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믿었으니까요.
"전 이제 떠나야 합니다." 왕자님은 말했습니다.
"부모님이 저에게 결혼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저는 그 아가씨를 사랑할 수 없어요. 그 아가씨는 너와 그 아리따운 교회의 처녀와도 닮지 않았을 테니까요. 만약 내가 내 뜻대로 신부를 선택한다면 당신을 고를 겁니다."
왕자님은 인어 공주의 붉은 입술에 키스했습니다.
"혹시 바다를 무서워하는 건 아닙니까?"
이웃 나라로 가기 위해 화려한 배에 오른 왕자님이 인어 공주에게 물었습니다. 그리고 왕자님은 인어 공주에게 폭풍우, 바람이 잔잔해진 바다, 바다 깊은 곳에 있는 이상한 물고기들에 대해 얘기해 주었습니다. 인어 공주는 왕자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잠자코 미소만 지었습니다. 바다 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인어 공주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거든요.
모두 잠든 밤이었습니다. 인어 공주는 배의 난간에 앉아 맑은 바닷물 속을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마치 바다 속 궁전이 들여다보이는 것 같았어요. 그렇습니다. 머리에 은관을 쓴 할머니가 인어 공주가 타고 있는 배를 올려다보고 있었어요. 그리고 언니들이 물 위로 떠올랐어요. 언니들은 하얀 손을 내밀며 슬픈 눈으로 인어 공주를 바라보았습니다.
인어 공주는 언니들에게 손을 흔들며 자기가 얼마나 행복하게 지내고 있는지 알려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때 어떤 선원이 갑판으로 나왔습니다. 그러자 언니들은 서둘러 물 속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다음 날 아침, 배는 이웃 나라의 화려한 도시에 도착했습니다. 배가 도착하자 교회들이 일제히 종이 울렸습니다. 깃발이 나부끼고, 번쩍거리는 칼을 찬 군인들이 줄지어 서 있었습니다. 높은 탑에서 나팔 소리가 울리면서 사람들이 왕자를 맞이했습니다.
그 도시에서는 매일 밤 무도회가 열렸습니다. 하지만 주인공인 그 나라의 공주님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공주님은 멀리 떨어진 어느 수도원에서 왕비가 갖추어야 할 미덕을 배우고 있다고 하는 것이었어요.
드디어 그 나라의 공주님이 돌아왔습니다.
그렇습니다. 인어 공주는 아름다운 그 공주님을 보았습니다. 공주님은 정말 아름다웠어요. 길고 검은 속눈썹, 검푸른 눈... 그렇게 미소를 짓는 그 공주님의 모습은 이 세상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이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바로 당신이군요! 그 바닷가에서 저를 구해주셨던 분이..." 왕자님은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왕자님은 얼굴을 붉히며 서 있는 공주님을 껴안았습니다.
"아, 나는 너무 행복한 사람이야!"
왕자님은 인어 공주에게도 자신의 기쁨을 감추지 않고 그대로 말했습니다.
"이제 내 소원이 이루어졌어요. 당신도 나의 이 행복을 기뻐해 주겠지요? 당신은 이 세상 누구보다도 나와 생각이 같으니까요."
인어 공주는 왕자님의 손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하지만 인어 공주는 무척 슬펐어요. 이제 왕자님이 저 공주님과 결혼을 하면 자신은 바다 위의 물거품으로 변하고 마는 것입니다.
교회의 종들이 울리고, 심부름꾼들이 여기저기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왕자님과 공주님의 결혼식을 알렸습니다.
도시는 온통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습니다. 신랑 신부는 나란히 손을 내밀고 주교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인어 공주는 아무 것도 듣지 않고, 아무 것도 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곧 물거품이 되고야 말 자신의 모습, 그리고 그 죽음의 밤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