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농사꾼 집에 온 지 어느덧 한 달 반이나 지났다. 내 뺨에도 도톰하게 살이 올랐다. 이제 근처 마을 계집애들이 나를 후리려고 노리게끔 됐다. 밤에 요하나 생각이 치밀어 오르면 나는 살짝 방을 빠져 나와 목장 쪽으로 내려가곤 했다. 그리고 따뜻한 바람을 받으면서 들판을 헤매곤 했다. 그렇게 그녀는 아름다웠다.

그러나 가슴이 설레는 것을 견디기 힘들면 나는 파이프에 불을 당기고 주막집을 찾아갔다.그리고 조국 만세를 외치는 젊은 농사꾼들과 어울려 친구가 됐다. 당시 독일은 분위기가 그랬다. 모두 노래를 부르고, 행복한 날이 오리라는 것을 믿고 있었다.

봄은 어느 새 다가왔다. 나는 말처럼 부지런히 일했다. 이렇게 듬직한 일꾼은 아직 본 적도 없다고, 멍청이는 말하곤 했다. 얼마 안 있어 골짜기는 온통 꽃에 파묻혔다. 목장으로부터 풍겨오는 꽃 냄새로 밤에 잠을 잘 수 없을 정도였다. 멍청이는 매일같이 술을 마셨다. 그는 별로 말을 하지 않았다. 요하나는 방에 들어박혀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그 무렵의 일이었다.

나는 마음속이 무거웠지만 한눈 팔지 않고 일하고 있었다. 그런데 멍청이가 나를 방으로 불렀다. 거기에 요하나도 앉아 있었다. 멍청이는 말했다. "하인리히, 지금 벚꽃이 한창이야. 저 창 밖을 보라구, 저 산 말이야. 벚나무 뿐이지. 저건 내 산이야. 내 재산 목록 일 호인 셈이지. 버찌가 다 익으면 자네하구 요하나 둘이서 츠빙겐베르크 장에 가서 팔아오지 않겠나? 자네는 그 때까지는 여기 있어 주겠지?"

그 때 요하나가 나를 쳐다봤다. 나는 말했다.

"그러지."

벚꽃은 피고 또 피었다. 가지가 부러지도록 열매가 열렸다. 태양은 눈부시게 비췄다. 버찌는 익어갔다.

어느날 아침이었다. 나는 소와 말을 돌보고 있었다. 멍청이는 사람들과 정치 이야기를 할 것이 있다며 오토바이를 타고 집을 나갔다. 그런데 요하나가 마당에서 나에게 말했다. "하인리히, 벚나무 동산에 가요."

우리들은 각자 바구니를 두 개씩 들고 길을 떠났다. 처음엔 산비탈을 오르는 보통 황토 길이었으나 차츰 길이 좁아졌다. 목장을 빠져나가 조그마한 개울을 건너자 거기서부터 온통 벚나무 동산이었다. 눈앞에 나무들이 죽 늘어서고 열매가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요하나는 헛간 문을 열고 나는 사다리를 꺼내 나무 위에 올라가 열매를 따기 시작했다. 두 시간 가량 지난 뒤 그녀가 내려오라고 소리를 쳤다. 나는 내려가 그녀 옆의 젖은 잎새 위에 앉았다. 저 아래 마을이 내려다 보였다. 교회 종이 여섯 시를 쳤다. 산들바람이 풀숲을 빠져 지나갔다.

"하인리히." 조금 있다가 요하나가 말했다. "이 벚나무 동산은 원래 내 것이에요. 결혼할 때 친정에서 받아온 거에요. 그러니까 여기서 나는 것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거에요."

"그래요?" 나는 대답했다. "이걸 당신 마음대로 할 수 있다니 참 좋겠군요."

"그럼요." 요하나는 말했다. "그 멍청이는 돈뿐인걸요. 하지만 나무는 내 것이죠."

우리들은 양철 깡통에 든 찬 커피를 마시고 바구니에 넣어 온 빵을 잘랐다. 그리고 나는 다시 나무에 올라가 버찌를 땄다. 요하나는 아래에서 그것을 주워 모았다. 여덟 시가 되자 바구니 네 개가 꽉 찼다. 그러자 요하나는 집 아래채 쪽을 향해 휘파람을 불었다. 얼마 안 있어 하녀가 마차를 몰고 왔다. 우리는 버찌 바구니를 마차에 싣고 요하나가 고삐를 잡았다. 그리고 우리 두 사람은 츠빙겐베르크 장터를 향해 떠났다.

산길을 따라 하얀 교회당 건물이 서 있는 자그마한 시골 읍이 쭉 이어졌다. 길에 햇볕이 내려 쪼이며 피어 오르는 흙먼지가 반짝반짝 빛났다. 울창한 숲을 몇 군데나 빠져 나갔다. 나는 몇 번 고삐를 넘겨받아 마차를 몰았다. 조그마한 말은 빨리 걸었다. 어쩌면 이렇게 평화스러울까. 나는 요하나를 돌아봤다. 그녀는 눈을 반쯤 감고 얼굴에 햇볕이 내려 쪼이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조용히 앉아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가슴이 부풀어오르는 느낌이었다. 나는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다. 작은 말은 딸깍딸깍 달리고, 요하나는 눈을 감고 있었다.

이날 버찌를 판 돈은 대단한 금액이었다. 요하나의 돈 주머니는 가득 차 찢어질 것 같았다. 우리는 장터의 찻집에 들러 커피를 마셨다. 저녁 다섯 시가 되어 집으로 향했다. 말은 왔던 길을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고삐를 쭉 놓고 있었다. 요하나는 내 옆에 앉아 있었다. 길은 숲 속 언덕으로 오르고 있었다.

무슨 망령이 들었을까. 나는 갑자기 요하나의 허리를 팔로 휘어감았다. 그녀는 내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나는 말을 세우고 요하나에게 키스하려고 했다. 그러자 그녀는 미소를 띠고 말했다. "난 당신 마누라가 아니에요, 하인리히." 나는 얼굴이 빨개졌다. 그리고 고삐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

작은 말은 종종걸음으로 달렸다. 숲의 공기는 차가웠고, 마차 뒤쪽에 실린 빈 바구니가 달각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하인리히." 요하나가 말했다. "나는 그 멍청이의 아내에요. 내가 좋아했던 사람은 전쟁에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어요. 그래서 난 그 사람하고 결혼한 거에요. 어쨌든 여자는 결혼해야 하잖아요. 그리고 그 때 그 멍청이는 씩씩한 농사꾼이었죠.

그 사람의 씩씩하고 기운 센 것이 마음에 들었어요. 그래서 결혼해 같이 살게 된 거랍니다. 하인리히, 그러나 그건 좋아했다기보다 분별이란 것 때문이에요. 당신을 이렇게 보고 있으면 난 그것을 정말 똑똑히 알 것 같아요. 한 달 반 넘게 당신을 지켜봐 왔어요. 그래서 난 잘 알게 되었죠. 그 전에는 이런 일은..."

"요하나." 나는 대답했다... 요하나, 단지 그 말밖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난 그저 평범한 시골 여자에요." 그녀는 계속했다. "하지만 마음만은요, 당신과 같이 언제나 나그네 길이에요. 한 달 반 당신을 보아왔지만 당신도 역시 나처럼 외로운 것 같아요."

"요하나" 나는 말했다. 그밖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내 일은 무엇이고 간에 이미 다 결정되어 버렸답니다." 요하나는 말했다. "어린애를 낳게 됐어요. 그 멍청이는 애가 나오는 것을 기다리느라고 안달이에요."

숲은 시원했다. 작은 말은 달렸다. 내 마음은 깊숙이 가라앉아 있었다.

"난 정말 당신이 좋아요, 하인리히!" 요하나는 말했다. "정말이에요. 그건 사실이에요. 사실을 사실대로 말할 뿐이에요. 그렇지만 어린애는 그 멍청이의 자식이고 또 당신도 그냥 우연히 여기 뛰어 들어온 사람은 아니에요."

우리는 천천히 마을로 다가갔다. 요하나는 말했다. "그 멍청이는 좋은 농사꾼이에요. 그이의 희망은 아들을 갖는다는 것, 그리고 내가 그이가 생각하는 그런 마누라가 되는 거에요. 그거면 되는 거에요. 그래서 나는 사실 그대로 하고 있어요.

그렇지만 하인리히, 나도 가끔은 달아나고 싶을 때가 있어요. 이 마을에서, 이 골짜기에서... 하지만 그것은 결국 해보는 이야기일 뿐이에요. 당신은 결국 언젠가 떠나서 떠돌아다니게 될 뜨내기이고... 나는 그럴 수 없어요. 왜냐 하면 나 역시 그 멍청이가 좋고, 어린애는 역시 그이의 자식이니까요..."

이렇게 우리는 집에 도착했다. 멍청이가 문 앞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요하나가 그에게 돈이 든 지갑을 주었다. 멍청이는 소리 내어 웃으며 우리를 방으로 데리고 가서 진을 가지고 왔다. 멍청이와 나는 그렇게 두 시간 동안이나 마셨다. 요하나가 자러 가자 멍청이는 또 웃으며 과실주를 가져왔다. 우리들은 이것마저 마셔 치울 참인었다. 멍청이는 앞으로 세 달만 있으면 아들이 생기는데 그러면 그 때 잔치를 할 생각이니 그 때까지만 있어달라고 졸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