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헤센 지방에서 일 주일 동안 붙들고 있던 일도 끝났다. 호주머니에는 아직 삼 마르크가 남아 있고, 배낭에는 작은 포도주 병도 하나 있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마인츠를 향해 떠났던 것이다.

부둣가의 어느 목노 주점에서 나는 동료 한 사람을 만났다. 그는 그라트바하 출신 배관공으로, 나와 마찬가지로 역시 일거리 없이 그 모양으로 독일 일대를 싸돌아다니고 있었다. 우리는 우선 작은 컵으로 한 잔 했으나 어느 사이에 네 잔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서로 신세타령을 하다 보니 이것이 여덟 잔이 되었으며 내 돈을 몽땅 털어넣어야 했다. 그리고 동료는 오랫동안 바지 주머니를 뒤지고 있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일까. 주인이 작은 걸로 두 잔 더 보내오지 않는가. 우리는 감격해서 서로 껴안고 형제 같은 기분으로 술을 들이키고 잔을 비웠다. 동료가, 옛날 그가 얼마나 여러 가지 일을 했는지, 그리고 세상이 얼마나 살벌했던가 하는 데 이르러서는 나도 입을 다물고 그냥 있을 수 없었다. 몸을 일으켜 조립 작업을 하며 독일이나 루마니아, 스웨덴 땅을 돌아다녔던 얘기를 신나게 떠들어댔다. 동료는 입을 딱 벌리며 말했다. "여보게 정말 그때는 멋진 시대였지 않나..."

나는 슬픔이 가슴에 괴어 올라서, 귀여운 최후의 술잔을 흔들며 노래를 불렀다. "어찌하련가 아름다운 정원, 서로 스치고 지나가는 속절없는 인간들이여. 장미꽃도 처량하게 꺾어져 버리고..."

이 때 주인이 다가와서 우리들 테이블에 앉았다. 그리고 우리의 대화는 금방 전쟁에 관한 것 일색이 되어 버렸다.

"칸브레 근처에서 말이야..." 동료는 소리를 높여 말했다. 주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아예 술통을 들고 왔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마저 마저 비우고 말았다. 아아, 그리고 우리들의 영혼은 어느 먼 평야, 에느 강가, 바포옴, 그리고 또 알곤느 산맥을 날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도 잊어버리지 않지만, 동료는 갑자기 우울한 눈빛으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여보게들, 그 때 어떤 평화가 올지 알았더라면..."

우리들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시계 소리만 째깍거리고, 포도주가 컵 속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거리에 나와 있었다. 목노집에서는 동료가 테이블 위에 두 팔을 뻗고 엎드려서 끙끙거리고 있었다. 아무리 잘 있으라고 인사를 해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늘 속으로" 하며 그는 소리치고 있었다. "그늘 속으로 들어가는 거야, 모두... " 그는 몸도 가눌 수 없을 정도였기 때문에 나는 그냥 떠났다. 주인은 문간까지 배웅을 나왔다.

햇볕이 비추는 곳에서 그는 내게 말했다. "용기를 내게나. 독일도 곧 좋아질 걸세."

나는 그와 악수를 하고, 이미 서로 몇 번씩 되풀이했던 그 말에 대답했다.

"그렇게 되길 기원하네, 전우여."

처음에는 집들이 기울어진 것처럼 보이고 거리를 달리는 자동차는 마치 나의 얼굴을 향해 뛰어드는 것 같았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단숨에 차도를 건너갔다. 차들이 급히 멈추고, 나는 승객들에게서 욕을 얻어먹었다. 이것은 유쾌한 일이었다. 나는 고함을 치는 그 사나이에게 소리를 질러 주었다. "뭐라고 그러는 거야, 이 못난 녀석아!" 이렇게 말하다 나는 뱃속의 것을 왈칵 토하고 그 자리를 물러났다.

그러면서 점차 나의 눈에도 인생은 평상시 같이 또렷한 모습으로 보이게 되었다. 뒤에 두고 온 옛 시가지의 초라함이나 동료 배관공, 옛 전우인 술집 주인, 작은 컵에 내려주신 신의 위안, 포도주 통 속의 유쾌한 거품까지도 모두 사라져 버렸다. 나는 똑바로 걸어갔다. 그러니 어찌 된 셈인가. 얼마 걷지도 않아서 나는 라인 다리에 이르렀던 것이다.

오, 그 강물을 보았을 때 내 마음은 얼마나 뛰었던가.

녹색으로 칠한 난간에 몸을 기대려니까, 삼월의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와 나를 포근히 감싸주었다. 강물 위를 멀리 바라보았으나 떠가는 배는 하나도 눈에 뜨지 않았다. 배들은 항구에 닻을 내리던가 밧줄로 묶여 있을 뿐이었다... 배들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실업 상태였던 것이다.

내 앞에는 마을이 보였다. 집들의 초라한 정면이 나란히 줄을 지어 서 있고, 그 지붕 위로 성당이 솟아 있다. 햇볕은 모든 것 위에, 지붕 위에, 뻗어가는 라인 강 위에 남김없이 비치고 있었다. 그리고 갈매기는 다리 주위를 유유히 날고, 하늘에는 자그마한 하얀 구름이 몇 조각... 네덜란드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입을 다물고 정신을 차려 앞을 쏘아 보았다. 어쩐지, 조국에 이만큼 빛이 있는 이상 내 자신도 결코 버림을 받지는 않을 인간처럼 느껴졌다.

나는 용기를 내어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한산한 공장들이 늘어서 있는 지루한 교외를 지났다. 그러나 그것도 마침내 끊어지고, 아스팔트가 깔리지 않은 길이 시작되었다. 호두나무가 늘어선 가로수 길이었다.

아스파라거스 밭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내 앞에 노란 먼지를 휘감아올렸다. 멀리 지평선을 줄달음치는 푸른 산들의 모습이 보였다. 바로 오덴 산맥이다. 나는 그곳을 향해 걷고 있었다.

다름슈타트에 다달은 것은 밤이 거의 다 되어서였다. 여관에 찾아갔으나 대번에 거절을 당했다. 몸에서 아직 술 냄새가 물씬물씬 풍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 따위 일은 전혀 두렵지 않았다. 이미 오던 길에 마을 끝에 있는, 마른 풀을 넣어두는 움막을 하나 눈 여겨 봐 두었기 때문이다. 거기에서라면 따스하고 좋은 꿈을 꿀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마른 풀을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어둠 속에 내 몸을 맡겼다.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에 나는 눈을 떴다. 으스스 한기가 돌기에 또 작은 술병 신세를 졌다. 포도주가 언제나 마음 좋게 베풀어 주는 그 기적이 이번에도 역시 나의 불쌍한 수족에 퍼져 왔다. 세수는 근처 연못에서 했다. 연못엔 보트가 한 척 흔들거리고 있었다. '엘프리데' 호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나는 천천히 길 위로 올라와 위쪽 숲으로 들어갔다. 새들이 날아다니고 아네모네 잎사귀 위에서 아침 이슬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두 시간 남짓 걸었을까, 이젠 배가 고파왔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 보아도 마을은 보이지 않았다. 공기는 맑고, 햇빛은 잎사귀 사이로 무수히 많은 얼룩처럼 듬성듬성 내리고 있었다. 나뭇가지 끝에서 바람이 울었다. "불쌍하게 됐군." 나는 생각했다. "자연이 아무리 평화스럽다고 해도 무슨 소용이야. 지금 네 밥통이 평화를 지키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야."

반 시간 정도 더 걷자 다리가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주저앉아 심호흡을 했다. 차츰 가슴은 가라앉았다.

"그래, 이렇게 하는 게 좋겠어..." 나는 생각했다. "배가 고플 때는 잠을 자야지... 잠은 가난한 자의 빵이니까 말이야."

그런데 꿈 속에서 내 양심이란 놈이 벌떡 일어나 내 가슴을 누르고 앉았다.

"이봐, 하인리히" 그 녀석은 말했다. "네가 그 삼 마르크로 술을 마셔 버렸겠지. 그래서 하인리히, 너는 지금 배가 고파 헐떡이는 거야." 나는 그 녀석이 하는 말이 조목조목 옳아서 추위를 느낄 지경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나의 반대 양심이란 놈이 벌떡 일어나 앉아 말했다. "뭐라구? 뭘 그리 까다롭게 구는 거야? 대체 이 불쌍한 녀석의 한심한 인생을 보라구! 술도 없이 어떻게 버텨나가라는 거야?"

양심은 내 가슴에서 뛰어내려 반대 양심을 향해 돌진해 그것을 때려 죽이려고 했다. 그러나 이 상대방은 갑자기 어떤 낭랑한 목소리로 변했다.

그 소리는 나무들이 흔들리는 덤불 속으로 높이 뛰어 올라갔다. 그리고 햇빛 속에 녹아 들었다. 그리고 나서 그것은 또 이슬이 되어 내렸다.

그것은 모든 곳에 나타나면서 어느 곳에도 보이지 않고 마침내 킬킬거리는 웃음 소리로 변하는 산울림으로 변했다. 산울림은 저기 멀리 채석장 쪽으로 자취를 감췄다.

나는 이렇게 양심의 갈등 따위는 멀리한 채 두 발을 뻗고 자연의 대지에 가로 누워 있었다. 여신들의 질투를 끄는 파리스처럼 마냥 성스러운 잠을 즐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