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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고 긴 턱수염을 기르고, 녹슨 엽총을 들고, 보지도 못하던 옷을 입었으며 그 뒤에 여자와 아이들이 줄지어 따라오는 립의 모습은 마침내 여인숙에 있던 이들 정치가들의 주의를 끌게 됐다. 그들은 립의 주위에 모여들어 이상한 듯 머리 끝에서부터 다리 끝까지 훑어보았다. 연설가는 립의 곁에 다가와 그를 조금 옆으로 끌어내고는 "당신은 어느 당에다 투표하겠습니까?"하고 물었다. 그러나 립은 그저 멍청한 얼굴로 눈만 치켜뜰 뿐이었다.그러자 또 하나 약삭빠른 작은 사나이가 그의 팔을 잡아 당기고 발돋음하면서 그의 귀에다 속삭였다. "당신은 연방당입니까, 아니면 민주공화당입니까?" 립은 이 질문에도 역시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러자 제 딴에 아는 체하는 얼굴을 하고 삼각모를 쓴 노인이 사람들을 좌우로 밀어 내고 한 팔은 허리에 또 한 팔은 지팡이에 올려놓고 그의 앞에 나섰다. 그리고 날카로운 눈초리와 뾰족한 모자로 마치 그의 마음 속을 꿰뚫기라도 하려는 듯 엄숙한 소리로 물었다.
"어째서 당신은 총을 메고 여러 사람을 뒤에 이끌고 이런 선거장에 나왔소? 이 마을에서 무슨 소동이라도 일으킬 작정이오?" 립은 얼떨결에 외쳤다. "천만에요, 저는 이 마을에서 태어난 아무 죄 없는 사람, 국왕 폐하의 충성스러운 신민입니다. 오, 임금님 만세!"
그러자 옆에 섰던 사람들이 모두 일제히 소리쳤다. "왕당파다, 왕당파! 스파이다! 감옥에서 도망쳐 온 놈이야! 때려라! 죽여라!"
이 야단을 진정시키기 위해 삼각모의 의젓하게 굴던 노인도 한참 애를 써야 했다. 그리고 먼저보다 더 의젓한 표정으로 어디에서 온 것인지 모르는 이 죄인 립을 향해서 물었다. "도대체 당신은 무엇 때문에 여기 왔소? 도대체 누구를 찾고 있는 거요?" 가련한 립은 자기는 아무 것도 나쁜 짓을 할 생각이 없고 다만 언제나 여인숙에 모이던 이웃 사람들을 찾으러 왔을 뿐이라고 대답했다.
"그래, 그건 누구를 말하는 거요? 이름을 대 보시오."
립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물어 보았다. "니콜라스 베다는 어디 있습니까?"
한동안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지만 곧 한 노인이 가늘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니콜라스 베다라고? 그 사람은 벌써 죽은 지 십팔년이나 되지. 교회의 묘지에 나무 비석이 세워져 거기에 그 사람의 일이면 뭐든지 써 있었지만 그것도 벌써 썩어 없어졌어."
"그러면 브롬 다챠는 어디 있습니까?"
"아, 그 사람은 전쟁이 시작될 무렵 군사로 나갔지. 스토니 포인트의 공격 때 죽었다는 사람도 있고... 앤소니 노즈 고지 근처에서 폭풍을 만나 익사했다는 사람도 있소. 난 모르겠지만, 아무튼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았어."
"학교 선생인 밴 브멜씨는 어디 있지요?"
"그 사람도 전쟁에 나갔지만 독립군 장군이 됐고, 지금은 국회의원이야."
자기의 가정과 벗들이 이렇게 변해 버리고 이 세계에 자기 혼자 단 한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을 안 립은 맥이 탁 풀렸다. 뭣을 물어봐도 꽤 오랜 세월이 흘렀다는 것, 전쟁과 국회와 스토니 포인트 같은 도무지 모를 말만 들려와 립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이 이상 친구에 대해 물을 용기조차 잃고 속이 상한 김에 외쳤다.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 아무도 립 밴 윙클을 모릅니까?"
"립 밴 윙클!" 두세 사람이 소리쳤다. "알고 말고! 저기 저 나무에 기대어 있는 작자가 립 밴 윙클이야."
립 밴 윙클이 그 쪽으로 눈을 돌려 보니 꼭 산으로 올라갈 때의 자기 모습 그대로 한 사나이가 보였다. 보아하니 자기와 똑 같은 누더기 옷을 입고 자기와 똑같이 털털한 것 같았다. 가엾게도 립은 점점 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도대체 나는 누구일까? 내가 내 자신일까, 아니면 다른 사람인가. 어안이 벙벙한데, 삼각모의 노인이 당신은 도대체 누구며 이름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전혀 모르겠습니다." 립은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다. "나는 내가 아닙니다. 딴 사람입니다. 저기 있는 사람이 납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 저 누군가가 내 몸을 대신했습니다. 엊저녁까지만 해도 나는 바로 나 자신이었는데 산에서 실컷 잠자는 동안 그들이 내 총을 바꿔치고 모두 온통 뒤바뀌어서 이 나까지도 바뀌었습니다. 내 이름을 뭐라고 하는지 내가 도대체 누구인지도 전혀 모르겠습니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는 듯 눈짓을 하며 손가락으로 이마를 두들기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이 늙은 미치광이의 총을 빼앗아 위험한 짓을 못하게 하자고 소근댔다. 이 말을 듣자 삼각모의 의젓하게 굴던 노인은 살짝 뒤로 물러나 몸을 감추었다. 바로 그 때였다.
한 젊은 여인이 사람들을 헤치고 이 턱수염이 센 늙은이를 보려고 앞으로 나왔다. 이 여인은 통통하게 살찐 사내 아이를 팔에 안고 있었는데 아이는 이 늙은이의 모습에 놀라 앙하고 울어댔다. "립, 조용히 해. 바보처럼 우는 게 아니야. 저 할아버진 나쁜 짓은 않으니까"라고 여인은 말했다. 이 아이의 이름, 또 그 어머니의 거동, 그리고 또 그 말투, 그런 것들이 립에게 뭔가 생각을 불러 일으켰다.
"부인, 당신의 이름이 뭐요?" 립은 물었다.
"주디스 가드너예요." "그럼 당신 아버님의 이름은?"
"불쌍한 제 아버지는 립 밴 윙클이라고 했는데, 총을 메고 나가서 벌써 20년 동안 어떻게 되셨는지 한 번도 소식이 없답니다. 개만이 돌아왔어요. 총으로 자살을 하셨는지 토인에게 잡혀가셨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나는 그 때 아직 어린아이였어요."
립은 한 가지 더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그는 약간 더듬으며 물었다. "그럼 당신 모친은 어디 계시오?"
"어머니는 요 얼마 전에 돌아가셨어요. 뉴잉글랜드 행상에게 화를 내시면서 발끈하는 통에 혈관이 터지셨지요."
그 말을 듣고 립은 어쩐지 마음이 놓였다. 정직한 립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는 딸과 아이를 두 팔에 안았다.
"내가 네 애비다." 그는 외쳤다. "예전에 젊은 립 밴 윙클이었지만 지금은 늙은 립 밴 윙클! 누구 혹시 이 립 밴 윙클을 아시는 분 없소?"
모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놀라고 있는데 한 할머니가 사람들 속에서 엉금엉금 기어나와 손을 이마에 대고 잠시 립의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외쳤다. "어쩜 정말 립 밴 윙클이야. 정말 그렇군! 참 잘 돌아오셨소. 글쎄 20년 동안 어딜 갔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