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지 5 / 전체 7
눈을 뜨자 립은 처음 골짜기에서 노인을 발견한 그 푸른 언덕에 누워 있었다. 그는 눈을 비볐다. 어느새 눈부시게 해가 비치는 아침 아닌가. 작은 새가 숲 속을 쫑쫑 날면서 지저귀고 있었다. 매는 하늘 높이 맴돌며 산뜻한 산의 미풍을 안고 날아갔다. "설마, 밤새 여기서 잔 것은 아니겠지." 립은 생각했다. 그는 잠들기 전의 일을 생각해보았다. 술통을 진 낯선 노인네가 오고, 산 골짜기를 걸었다. 바위에 둘러 싸인 자연 깊숙한 곳, 나인핀즈 놀이를 하던 그 슬픈듯한 사람들, 그 술병..."오, 그 술! 그 몹쓸 술병! 집의 마누라한테 뭐라고 말하면 좋담." 그는 자기 총이 어찌 됐나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번쩍번쩍 잘 기름칠이 된 자기 엽총 대신 낡은 화승총이 옆에 굴러다닐 뿐이었다. 총신은 녹슬고 개머리판이 풀어지고 나무에는 벌레가 좀을 먹었다. 못마땅한 얼굴을 하고 있던 그 술꾼들이 장난을 하느라고 그를 취하게 만들어서 총을 훔친 것이 아닐까,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자기 개 울프도 보이지 않았다. 다람쥐 아니면 산 메추라기라도 쫓아서 멀리 갔는지도 모를 일이다. 립은 휘파람을 불며 "울프! 울프!" 불러봤으나 소용이 없었다. 메아리가 그의 휘파람과 외치는 소리를 산울림으로 돌려줄 뿐 개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립은 엊저녁 사람들이 놀던 곳에 다시 한 번 가서 누구든 만나면 개와 총을 돌려 달라고 하리라 결심했다. 그러나 막상 걸으려고 일어서 보니까 어쩐지 몸의 마디마디가 뻑적지근하고 여느 때처럼 힘이 없었다. "산에서 자는 것은 아무래도 내 몸에 맞지 않는군. 이렇게 엉뚱한 짓을 하고 류마치스라도 걸려 들어 눕게 된다면 그 때야말로 마누라한테 단단히 혼날 거야." 립은 생각했다.
그는 간신히 골짜기에 내려가 전날 밤 길 동무와 함께 올라갔던 도랑을 찾았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제 시냇물은 거품을 일으키며 흘러 바위에서 바위로 물을 튕기고 있었다. 촬촬대는 물소리가 골짜기 가득히 울렸다. 그러나 그는 떡갈나무, 시누대, 물싸리 등 갖가지 나무 수풀을 빠져나가고, 나무에서 나무로 그물처럼 얽혀있는 들포도 넝쿨에 발이 걸리기도 하면서 겨우 시냇물 끝까지 기어 올라갔다.
마침내 그는 골짜기가 낭떠러지 사이를 빠져서 둥근 오목지로 된 근처까지 찾아 갔다. 그러나 어제 그 곳은 이제 전혀 보이지 않았다. 도저히 올라갈 수 없을 것 같은 바위가 높은 벽처럼 솟아있고 그 절벽 사이로 물살이 폭포처럼 소리치며 떨어지고 있었다. 그 아래는 넓고 깊은 연못으로, 주위를 둘러싼 무성한 나무들이 그늘을 드리워 어두침침했다.
오자 립은 할 수 없이 발을 멈추었다. 그는 또 휘파람을 불고 개를 불렀다. 그러나 대답하는 것은 양지 바른 낭떠러지에 쌓인 마른 나무 위를 높이 나르는 까마귀의 까 까 까악 하는 소리 뿐이었다. 그 까마귀들은 이만큼 높으면 안심이라는 듯 위에서 내려다 보면서 불쌍한 립의 꼴을 비웃는 것 같았다.
그래,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아침 나절은 벌써 다 가 버렸다. 아침도 먹지 않아서 립은 배가 고팠다. 개와 총을 단념하기가 아까웠고 마누라를 만나는 것도 두려웠다. 그러나 이 산중에서 굶어 죽을 수는 없다. 그는 고개를 흔들고 녹슨 엽총을 어깨에 메고 쓸쓸히 집을 향해서 걷기 시작했다.
마을이 가까워지면서 몇 사람을 만났지만 누구 하나 아는 사람을 만날 수 없었다. 그는 이 근방 사람들을 누구나 다 알고 있으려니 생각했는데 어찌 된 일일까. 사람들이 입고 있는 것도 지금까지 립이 보던 것과는 달랐다. 그리고 모두 다 약속이나 한 듯 놀란 표정으로 그의 얼굴을 훑어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를 본 사람들은 반드시 자기 턱을 만져보는 것이었다. 하도 모두 그러기에 립도 자기 턱을 만져보니 이것이 웬일일까. 그의 턱수염이 한자나 길게 자라 있지 않은가?
보지도 못한 아이들이 떼를 지어 그의 뒤를 따라 오면서 떠들어대고 그의 희고 성성한 턱수염을 손가락질하였다. 그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개들이 짖어댔지만 어느 한 마리 전에 보던 개는 보이지 않았다. 마을도 그 모습이 아주 달라졌다. 그 전보다 커지고 사람들도 많아졌다. 여태껏 보지 못한 집들이 늘어서 있고 그 전에 자주 찾아 가던 집들은 자취를 감추었다.
대문에 써 붙인 이름도 모두 모를 이름이며 창에서 내다 보는 사람의 얼굴도 모를 얼굴들 뿐이었다. 모두가 새로웠다. 립은 어쩐지 걱정이 되었다. 자기만이 아니라 주위의 세계까지 모두 마법에 걸린 것 같았다. 그러나 여기는 분명히 어제 나간 고향 마을이다. 저기 캐츠킬 산맥이 솟아 있다. 앞에는 은빛 허드슨 강이 흐른다. 어느 산이건 어느 골짜기건 모두 옛날 그대로였다. 립은 어리둥절했다. '엊저녁 술이 내 머리를 흐트러 놓았다'고 립은 생각했다.
립은 간신히 자기 집을 찾아갔지만 마누라의 앙칼진 소리가 금세 들리지나 않을까 두려워 소리도 내지 못하고 가까이 다가갔다. 그런데 집은 부숴지고 지붕은 헐고 창도 부숴졌으며 대문은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울프를 닮은, 굶어서 다 죽어가는 개 한 마리가 집 주위를 엉금엉금 기어다녔다. 립이 "울프!"하고 불렀으나 강아지는 으르렁거리며 이빨을 드러내고 그대로 지나가 버렸다. 이건 너무한다... '강아지까지 나를 잊어버리다니!' 립은 중얼대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마누라는 언제나 집안 만큼은 알뜰하게 꾸며 놓았다. 그런데 지금 집은 텅텅 비어있고 어수선한 품이 아무도 살지 않는 것 같았다. 너무 황량해서 립은 그만 마누라를 두려워하는 마음조차 잊고 큰 소리로 마누라와 아이들을 불러보았다. 쓸쓸한 방들로 일순 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곧 다시 조용해졌다.
립은 급히 밖으로 나와 전에 자주 다니던 마을의 여인숙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이 여인숙도 없었다. 그 대신 커다란 목조 건물이 서 있고 큰 창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 몇 개는 부숴지기도 하고 헌 모자와 여자 속치마 같은 것이 누덕누덕 붙어 있었다. 대문에는 '조나단 둘리틀 경영, 유니온호텔'이라고 페인트로 써 있었다.
조용한 홀랜드 식 그 여인숙을 뒤덮고 있던 커다란 나무 대신 지금은 길고 밋밋한 장대가 서 있고, 그 꼭대기에는 뭔지 빨간 나이트캡 같은 것이 씌워져 거기에 깃발이 펄럭이는 것이었다. 그 깃발에는 별과 줄무늬가 가득 그려져 있었다. 여하튼 모조리 변해서 전혀 까닭을 알 수 없었다. 다만 여인숙 간판에는 전처럼 조지 폐하의 붉은 얼굴이 보였다.
그 아래에서 그는 몇 번이나 한가로이 파이프를 빨았는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이 간판 그림조차 괴상하게 그 모습이 달라졌다. 빨간 웃옷은 노란 실로 누빈 푸른 웃옷으로 바뀌었고, 손에는 홀 대신 칼을 쥐고 있으며 머리엔 삼각모를 쓰고 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커다란 글씨로 '워싱턴 장군'이라고 페인트로 쓰여 있었다.
대문에는 여느 때처럼 사람들이 모여 있기는 했지만 립이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의 성질까지 달라진 것 같았다. 언제나 멍하게 졸리는 듯한 그런 늘어진 데가 없고 초조하게 말다툼이라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혹시 그 넓적한 얼굴에 이중턱을 하고 있던 만물박사 니콜라스 베다가 멋진 긴 파이프를 물고 쓸데없는 소리 대신 담배 연기라도 자욱하게 뿜어내지나 않을까, 그렇지 않으면 학교 선생인 밴 브멜이 묵은 신문 기사를 조금씩 읽어 들려주지나 않을까 하고 찾아 보았으나 허사였다.
그 대신 신경적으로 보이는 여윈 사나이가 주머니에 비라를 잔뜩 넣고 격한 어조로 시민의 권리, 선거, 국회의원, 자유, 뱅커스힐(미국 독립전쟁 당시의 전쟁터), 1776년의 영웅 등 여러 가지 말들을 섞어 연설을 하고 있었지만 넋잃은 밴 윙클에게는 뭐가 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