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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막 산을 내려가려 할 때였다. 어딘가 멀리서 "립 밴 윙클! 립 밴 윙클!"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사방을 둘러 보아도 산 위를 한 바퀴 돌고 가는 까마귀 밖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뭔가 잘못 들은 것이겠지 하고 다시 내려가려 하는데 역시 똑같이 부르는 소리가 조용한 저녁 공기를 울렸다. "립 밴 윙클! 립 밴 윙클!"울프는 등을 세우고 낮게 짖으면서 바짝 그에게 붙어서 무서운 듯 아래 골짜기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립도 어쩐지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뭔가 섬찟한 기분으로 골짜기 아래를 살펴 보려니까 이상한 사람 모습이 무거워 보이는 물건을 어깨에 짊어지고 천천히 바위를 넘어오는 것이 보였다.
이렇게 쓸쓸하고 여간해서는 아무도 올라오지 않는 곳에서 사람의 모습을 보자 립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누군가 이 근방 사람이 도움을 받고자 부르는가 싶어 그는 도와주리라 마음 먹고 급히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가까이 가 보니 생전 보지 못한 사람의 모습이 너무 이상해서 그는 다시 놀랐다. 그 사람은 키가 작고 단단한 몸집으로 머리털이 헝클어지고 흰 털이 섞인 턱수염을 하고 있었다. 입고 있는 옷은 옛날 홀랜드 식으로 허리 둘레를 띠로 묶고 헝겊으로 된 자켓을 걸치고 있었다. 오래 입어서 낡은 반바지의 겉은 품이 너무 넓고 그 양쪽에 장식 단추가 달려 있으며 무릎께는 나비묶음으로 되어 있었다.
이 사나이는 어깨에 단단해 보이는 작은 통을 메고 있었는데 그 속에는 술이 가득 차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립을 향해 가까이 와 짐을 좀 받아달라는 몸짓을 했다. 립은 처음 만나는 사람이라 약간 겁도 났지만 여느 때처럼 선뜻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교대로 짐을 운반하면서 시냇물이 말라 버린 골짜기 바닥 좁은 계곡을 함께 기어 올라갔다.
함께 올라가면서 립은 멀리서 천둥 같은 소리가 길게 나는 것을 들었다. 그 소리는 그들이 올라 가는 울퉁불퉁한 길의 앞쪽, 높은 바위 사이의 틈같이 생긴 깊은 골짜기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립은 잠깐 멈추었지만, 산 위에서 흔히 있는 천둥과 함께 오는 소낙비려니 생각하고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골짜기를 빠져나가자 땅이 푹 들어가 오목한 지대에 이르렀다. 그 곳은 칼로 벤 듯한 낭떠러지로 둘러싸이고 다시 빙 둘러 빽빽한 나무들이 가지를 뻗치고 있어서 푸른 하늘과 빛나는 저녁 구름이 약간 엿보일 뿐이었다. 그 때까지 립과 그 일행은 줄곧 아무 말이 없이 묵묵히 걸었다. 립으로서는 이렇게 험한 산에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 따위 술통을 메고 올라가는지 이상해 못 견딜 지경이었지만 처음 보는 이 사나이의 거동이 어쩐지 의아해 선뜻 말을 붙이기가 무서웠다.
그런데 그 둥근 오목 지대에 들어가 보니 이번에는 또 지금까지 보지 못한 이상한 광경이 나타났다. 한 복판 평평한 곳에 괴상한 모습을 한 사람들이 모여 나인핀즈(병 모양 기둥 아홉 개를 세우고 공을 던져 쓰러뜨리는, 볼링과 비슷한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 사람들은 외국인처럼 기묘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다브렛, 어떤 사람은 자킨 같은 옛날식의 몸에 착 달라붙는 저고리를 입고 허리 띠에 긴 칼을 달고 아주 큰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 생김도 묘했다. 어떤 사람은 수북하게 턱수염을 기르고 옆으로 퍼진 얼굴에 눈이 돼지처럼 가늘었다. 그러나 어떤 이는 얼굴에 코 뿐인 것 같고 조그맣고 빨간 수탉 꽁지를 꽂은 하얀 뾰족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리고 모두들 턱수염 모양과 색깔이 제각각이었다.
그 중의 한 사람 우두머리처럼 보이는 건장한 노인은 햇볕에 그을린 얼굴에 끈으로 묶은 다브렛을 입고, 폭이 넓은 띠를 둘렀으며 단검을 찼다. 또 깃을 단 산고 모자를 쓰고, 길고 빨간 양말에 꽃무늬가 달리고 뒤꿈치가 높은 구두를 신고 있었다. 이들을 보고 있으려니 립은 마을의 목사 도미니크 반 샤이크 씨 댁 사랑방에 걸려 있는 플랑드르 풍 그림 속의 인물이 떠올랐다. 그 그림은 이 지방이 처음 개척될 무렵 홀랜드에서 건너 온 것이었다.
립이 특히 이상하게 생각한 것은 이들이 모두 나인핀즈 놀이를 하면서도 아주 무뚝뚝한 얼굴로 시무룩하게 말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아직까지 이렇게 슬픈 얼굴을 하고 노는 사람들을 본 일이 없었다. 공이 뒹구는 소리 외에 이 자리의 고요를 깨뜨리는 것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다만 공이 뒹굴 때 천둥이 쿠르릉 하는 것 같은 소리가 메아리 치는 것이었다.
립 일행이 가까이 가자 모두들 갑자기 놀이를 그만두고 마치 동상같이 언짢은 멍한 얼굴로 그를 노려봤다. 립은 간이 콩알만 해져서 무릎이 떨렸다. 그의 길 동무는 통의 술을 커다란 병 속에 붓고 모두에게 술을 따르도록 립에게 눈짓했다. 립은 무서워 벌벌 떨면서 시키는대로 했다. 그들은 잠자코 술을 들이키곤 다시 놀이를 시작했다.
립의 무섭고 불안한 기분도 차츰 가라앉기 시작했다. 아무도 보지 않는 틈을 타서 그는 술을 슬쩍 입에 대보기도 했다. 그런데 그 맛이야말로 아주 희한하게 좋은 홀랜드 산 진(Gin) 그대로였다. 태어날 때부터 술을 좋아했던 립은 금방 다시 마시고 싶었다. 한 모금 마시고 나면 또 한 모금을 마시고 싶어 연신 몇 번이고 술병 곁에 가는 동안에 마침내 눈이 빙빙 돌고 취해 오자 머리가 수그려지면서 어느새 깊은 잠에 빠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