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문발차(開門發車)

 

 

공중부양을 아십니까? 그것도 평지가 아닌 달리는 차 위에서의 공중부양말입니다. 처음 버스에 탔을 땐 비록 비좁은 틈새였지만 완강한 두 다리로 버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정류장, 두 정류장 사람이 늘 때마다 아구구구 비명소리와 함께 내 몸이 내 맘대로 움직여지지 않았습니다. 이제 더 이상 사람을 실을 수 없겠지라는 생각이 들 때 쯤 수용연대 특무상사처럼 생긴 버스 운전사가 급브레이크를 밟았습니다. 아구구구 몸뚱이들이 뒷쪽으로 쏠리며 순간적으로 생긴 공간에 또 십여 명의 몸뚱이들이 채워집니다. 만원 버스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경직을 풀고 몸의 유연성을 최대한 살려야 합니다. 급브레이크의 파도가 밀려올 때마다 그 급물살에 몸을 맡겨야 합니다. 좁은 틈새를 따라 팔은 팔대로, 다리는 다리대로, 몸통은 몸통대로 따로 놀려야 합니다. 때론 관절 꺾기나 빗장 뽑기 같은 비장의 묘수도 사용해야 합니다. 내릴 때를 위하여 바닥에 간신히 까치발이라도 딛고 있어야 하지만 그 욕심마저도 버리면 여러분은 가볍게 공중부양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길게 거의 수영하는 자세로 내 몸이 들려 있었습니다. 몸비벼오는 여자의 살냄새 때문에 알 수 없는 곳에 가 있는 내 무죄한 성기는 발기해 있었고 뒤틀린 팔목의 검지 손가락은 가방을 놓치지 않으려고 꼬불려져 있었습니다. 이제는 비명소리마저 짓이겨져 들리지 않고, 몸뚱이들은 잘 밀착되어 어떤 충격에도 더 밀리지 않을 만큼 요지부동일 때, 이제는 송곳으로 찔러도 더 이상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고 장담할 수 있을 때, 버스는 내리는 사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또 한 정류장에 멈춰 섰습니다. 입김으로 얼룩진 창을 내다보니 십여 명의 사람들이 아귀떼처럼 출입구로 몰려들고 있었습니다. 누군가는 제발 좀 그만 태우라고 운전사에게 사정하고 있었고, 누군가는 만만한 버스 차장을 마구 나무래고 있었습니다. 열대엿 살이나 먹었을까, 쬐끄만 버스 차장은 당찼습니다. 어떤 욕설을 퍼부어도 아무리 많은 사람이 몰려와도 끄뗙도 하지 않았습니다. 막차에선 항상 졸고 있던 그 버스 차장, 출근길엔 용감하기 그지 없습니다. 꾸역꾸역 마지막 한 사람까지 다 태웁니다. 운전사는 안으로 더 들어가라고 소리지르고 입구의 사람들은 비집고 들어가기 위하여 안간힘을 씁니다.그러나 버스문은 끝내 닫기지 못하고 출발합니다. 닫기지 않는 문 대신 버스 차장이 두 팔로 여나문 명을 안고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개문발차(開門發車)입니다. 개산원조(開山元祖)도 아닌 개안공양(開眼供養)도 아닌 개문발차입니다. 개발독재도 아닌 빈부격차도 아닌 개문발차입니다. 개문발차의 그 버스 지금도 어는 언덕길 힘겹게 오르고 있는지, 팔벌려 그 시대의 고통을 한아름 안고 가던 그 소녀, 지금은 아줌마거나, 과부거나, 혹은 망자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그 소녀, 벌린 두 팔로 하늘을 우러러보며 지금은 무엇을 안고 가고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