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혁은 구수한 보리밥 숭늉을 훌훌 마시고 앉았다가,
“회관을 짓는 게 그다지 시급할 것 같지 않지만 회원들이 무시로 모여서 신문 잡지나 돌려 보며 무슨 일이든지 서루 의논해 하려면, 아무래도 집합할 장소가 필요하겠어요. 야학만 해두 사철 한데서 할 수는 없으니까요.”
하고는 눈을 아래로 깔고 무엇인지 생각하더니,
“하지만 공동답을 짓거나 또는 이용조합을 만들어, 씨앗이나 일용품을 싸게 사다가 쓰거나, 하다못해 이발 조합같은 것을 만들고 우리가 술 담배를 끊고 그 절약한 돈을 저축하는 것은 반드시 회관 하나를 짓기 위한 게 아니지요.”
“그럼 일테면 어느 비상시기(非常時期)에 한몫 쓰실려는 건가요?”
“아니요. 우린 언제나 비상시를 당하고 있는 게니까, 우선 조그만 일이래두 여러 사람이 한 몸 한 뜻이 돼서 직접 벗어부치구 나서서 일을 하는데, 정신적으로 통일을 얻고, 또는 육체적으로 단련을 받으려는 데 있어요. 무엇버덤두 우리한텐 단결력이 부족하니까요.
제각기 뿔뿔이 헤어져 눈앞에 뵈는 조그만 이익을 위해서 다투는 것버덤은 그렇게 팔다리를 따로따로 놀리질 말구서 너 나 할 것 없이 한 몸뚱이로 딴딴히 뭉쳐서 그 뭉친 덩어리가 큼직하게 움직이는 것이 얼마나 위력이 있다는 것과 모든 일에 능률이 올라가는 것과 또는 땀을 흘리면서두 유쾌하게 일할 수 있다는 것을 실지로 체험을 해서 그 이치를 자연히 터득하도록 훈련을 시키는 데에 있죠.
조기회만 해두 그렇지요. 지금 동리 늙은이 축에선 밥 지랄을 한다구 여간 반대가 아닌데, 실상 진종일 그 괴로운 일을 하고도, 먹을 것이 없어서 쩔쩔매는 우리들한테는 영양분이 필요할지언정, 정말 체조같은 운동이 필요하지는 않으니까요.
하지만 아침마다 떨어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비비면서 은행나무 밑으로 치닫는 것은 일이 있으나 없으나 하루 한 번씩 깨끗한 정신으로 한 장소에 모이자는 거지요. 그 모인다는 것, 한 사람의 호령 아래에 여러 사람의 몸이 똑같이 움직이고 한맘 한뜻으로 애향가를 부르는 데서 우리가 살아 있다는 의식을 찾고, 용기를 회복하려는 거예요.”
동혁은 고개만 끄덕이며 듣는 영신의 얼굴에서 '나도 동감이야요'하는 표정을 보며 말 구절마다 힘을 들인다. 건배는 물론, 영신이도 매우 긴장한 태도로 무엇보다도 단결이 필요하다는 말을 되풀이하고 식전에 느낀 감상을 이야기하는데 동화가 와서 문밖에서 헛기침을 칵칵 하더니,
“형님 회원들이 벌써 와서 기다리구 있수.”
하고 나오기를 재촉한다.
한 백 평쯤 되는 못자리는 논둑이 찰찰 넘치도록 물이 잡혔다. 가벼운 아침 바람에 주름이 잡히는 잔물결을 헤치며 칠룡이는 쟁기를 꼬느고 소를 몰아 갈기를 시작한다. 못자리 논은 적어도 한 열흘 전에 갈아 두어야 벼끝도 썩고 땅도 골라지는데 가뭄 때문에 이제야 갈게 된 것이다.
“이 - 러, 이놈의 소.”
“어디어, 쩌쩌쩌쩌”
연골에 상일이 몸에 박힌 칠룡이는 여자 손님이 논둑에 앉아서 내려다보는 바람에 연방 혀를 차가면서 소 모는 소리를 멋지게 내뽑는다. 개량 보습이 논바닥을 무찌르고 나가는 대로 물과 함께 시꺼멓게 건 흙이 솟아올랐다가는 한 쪽으로 착착 엎친다.
“다른 일은 거의 다 흉내를 내겠는데, 아직 논 가는 건 서툴러서 저 사람들한데 흉을 잡히는 걸요. 학교서 실습이라구 할 때 어디 쟁기질이야 해 봤어야지요.”
동혁은 논둑 위에서 치맛자락을 날리는 영신의 곁으로 오며 말을 건넨다.
'선전부장'이 논을 다 갈기 전에는 아직 할 일이 별로 없는데도 넓적다리까지 걷어붙이고 공연히 흙탕물을 텀벙거리며 돌아다닌다. 흰 저고리에 검정 바지를 입었는데, 아랫도리가 껑충한 것이 물고기를 찍으러 다니는 황새와 흡사하다. 영신은 그 꼴을 보고는 웃다가 손등으로 입을 가리고,
“남 하는 일이 보기엔 쉬운 것 같지만, 제가 실지루 해 보니까 사뭇 다르더군요. 청석골은 부인 친목계(婦人親睦契)가 있는데요. 여편네들이 모두 나와서 벗어부치구 일을 하길래 남한테 지긴 싫어서 하루종일 목화밭을 매지 않았겠어요. 아 그랬더니만 아 이튿날은 허리가 빳빳허구 오금이 떨어지질 않아서 꼼짝두 못했어요.”
하면서 남들은 다 꿈지럭거리는데, 저 혼자 구경을 하고 섰는 것이 매우 미안쩍게 여기는 눈치다.
“그러길래 힘드는 일을 하는데두, 저 사람네와 똑같이 할 수 있도록 단련을 받아야만 하겠어요. 책상물림들이 상일에 잔뼈가 굵은 사람들처럼 그 세찬 일을 진종일 하구두, 배겨낼 만큼 되려면 첨엔 코피를 폭폭 쏟아야지요.”
“그럼요. 그게 좀 어려운 노릇이야요? 서양선 소나 말이 하는 일을 우린 사람이 하니까요. 그럴수록 소위 우리같은 지도분자버텀 나서서 직접 일을 해야만 그게 모범이 돼서 남들이 따라오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잠시두 쉴 새가 없을 수밖에요.”
하는데 눈앞에서 소머리를 돌리던 칠룡이가 종아리에 커다란 거머리를 잡아 떼더니,
“이 경칠놈 벌써부텀 붙어 댕기나?”
하고 논두덕에다 힘껏 메어 붙인다. 굶다란 지렁이가 기어올라가는 듯 힘줄이 불뚝불뚝 솟은 종아리에서는 검붉은 피가 줄줄이 흘러내린다.
영신은 씻지도 않고 내버려 두는 그 피를 바라보다가, 서울 백 선생이 말쑥한 양장에 비단 양말을 신고, 학교 실습장으로 나돌아다니던 것을 연상하였다. 파리라도 낙성을 할 듯이 매끈하던 그 종아리와 거머리에 빨려 논물을 시뻘겋게 물들이는 칠룡의 종아리 -
“그렇구 말구요. 지도자라구 무슨 감독이나 십장처럼 힘든 일은 남에게 시키구서 뻔뻔스레 놀구 먹으려는 건 아니니까요. 남녀의 구별꺼정두 없이 다 함께 덤벼들어서 일을 해야지요.”
영신은, 그제야 그전에 백씨의 집에서 들은 동혁의 말을 되풀이하듯 하였다. 그러나 오늘 이 경우에 있어서는 저 역시 피를 흘려가며 일을 하는 사람들을 편히 앉아 바라다보는 처지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불안한 것뿐 아니라, 일종의 수치를 느끼며 일어섰다 앉았다 한다.
갈아 놓은 논바닥을 다시 써레로 썰고 여러 회원들이 덤벼들어서 잡아 놓은 물을 바가지로 혹은 두레질을 해서 퍼내느라니, 거의 점심 때가 되었다. 회원들은 우스운 소리를 해가며 자못 유쾌한 듯이 일을 하는데 그네들의 이마에는 구슬같은 땀이 숭숭 내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