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는 또다시 이틀 동안을 질금질금 오다가, 씻은 듯 부신 듯이 개이고 날이 번쩍 들었다. 보리 해갈이나 바라던 것이 장마 때처럼 원둑이 넘치도록 흐뭇하게 와서, 초목이란 초목, 생물이란 생물이 온통 죽음에서 소생한 듯 청신한 공기가 천지에 가득 찼다.
이른 아침 물 속에서 닦여 나온 듯이 선명한 태양이, 바다 저편에 봉긋이 솟아오를 때, 동리 한복판의 두 아름이나 되는 은행나무가 선 언덕 위에서 나팔 소리가 들린다.
도또 도또 미또 도또
쏠도 도미도 -
밈미 밈미 쏠미 쏠미
도미 쏠쏠 도 -
새된 기상 나팔 소리는 황금빛 햇살이 퍼지듯이 비 뒤의 티끌 하나 없는 공기를 찢으며, 온 동리의 구석구석에 퍼진다. 배추빛 노동복을 입은 청년들이 여기 저기서 납작한 초가집을 튀어나오더니 언덕 위로 치닫는다.
나팔 소리가 난 지 오 분쯤 되어 그들의 운동장인 잔디밭에는 중년, 청년, 소년 할 것 없이 한 오십여 명이나 되는 조기회원(早起會員)들이 그득히 모여 섰다.
학교에서 군사 교련을 받을 때에 곡호수였던 동혁은 힘차게 불던 나팔을 놓고 앞으로 나섰다.
“차렷!”
“우로…나라닛!”
우렁찬 호령 소리에 따라 회원들은 이 열로 벌려선다.
“하나, 둘, 셋, 넷!”
“둘, 둘, 셋, 넷!”
정말 체조(丁抹體操)가 시작되는 것이다
.
동혁이가 서울서 강습을 해 가지고 시작한 뒤에 이 체조를 금년까지 줄곧 계속해 왔다. 바지 저고리를 퉁퉁히 입은 낫살이나 먹은 사람과, 나팔 소리에 어깻바람이 나서 모여든 아이들은 다 각각 제멋대로 팔다리를 놀려서 보기에 어색하고 우습기도 하다. 그러나 호랑이라도 두드려 잡음직한 한창 기운의 청년들이 동시에 목청껏 내지르는 고함은 조금 허풍을 친다면 앞산이라도 물러 앉을 듯이 기운차다.
십 오 분 동안에 체조를 마치고 동녁 하늘을 향해서 산천의 정기를 다 마셔 들일 듯이 심호흡을 한 뒤에 청년들은 동그랗게 원(圓)을 그리고 서로 손을 잡고 둘러섰다.
이번에는 건배가 한가운데 가 우뚝 나서며,
“자, 애향가(愛鄕歌)를 부릅시다!”
하고 뽕나무 막대기를 지휘봉 대신으로 내젓기 시작한다.
이 노래는 동혁이와 건배의 합작으로 청년들의 정신을 통일시키고 활기를 돋우기 위해서 아침마다 체조가 끝나면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그 곡조는 너무나 애상적이라고 템포를 빠르게 해서 짧고 쾌활하게 부른다.
건배의 두 팔이 올라갔다가 허공을 힘있게 가르자 청년들은 정중한 태도로 애향가를 부르기 시작한다.
1. **만(灣)과 **산(山)이
마르고 닳도록
정들고 아름다운
우리 한곡(漢谷) 만세!
(후렴) 비바람이 험궂고
물결은 사나와도
피와 땀을 흘려가며
우리 고향 지키세!
2. 우리들은 가난하고
힘은 아직 약하나
송백(松栢)같이 청청하고
바위처럼 버티네!
첫 절과 같이 후렴까지 부른 뒤에,
“자 - 삼 절!”
하고 건배는 더한층 힘차게 팔을 내젓는다.
3. 한 줌 흙도 움켜쥐고
놓치지 말아라
이 목숨이 끊지도록
북돋우며 나가세!
날마다 한 번씩 부르는 노래언만, 이 노래를 지은 사람이나 받아서 합창을 하는 청년들은 아침마다 새로운 흥분을 느낀다.
얼굴에 혈조(血潮)를 띠우고 목에 힘줄을 세우며 부르고 난 뒤에도 한참 동안이나 묵묵히 서 있었다.
오늘 아침에는 은행나무에 몸을 반쯤 가리고 서서 이 노래를 듣다가 감격에 흐느끼는 여자가 있었다.
그는 영신이었다.
조기회가 파하기 전에 동혁은,
“자, 아침 뒤에 우리 공동답 못자리를 만드세. 한 사람도 빠지면 안되네.”
하고 여러 회원에게 일렀다. 건배와 동화는 몇몇 회원과 함께 영신이가 홀로 서 있는 언덕 위로 올라갔다. 회원들은,
“일찍 일어나셨군요?”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춥지나 않으셨에요?”
하고 번차례로 인사를 한다. 영신은 머리만 숙여 답례를 하고 그 말에는 얼른 대답을 못한다. 아침 볕을 눈이 부시도록 온몸에 받으며, 눈물 흔적을 보이지 않으려고 바다 저편을 바라다보고 섰었기 때문이다.
그는 조금 뒤에야,
“나팔 소릴 듣구 뛰어 올라왔어요.”
하고 같이 운동을 하고나서 혈색 좋은 여러 사람의 얼굴을 둘러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