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이 콤파스는 지금 몹시 비위가 상하는 모양이었다. 마치 업신여기는 듯한 표정으로 마치 나폴레옹도 모르는 프랑스 사람이나, 워싱턴도 모르는 미국 사람을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냉소에 가득 찬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잊었다고? 하긴 정말 귀한 양반들은 워낙 눈이 높으시니..."

"설마 그럴 리가... 전 그저..."

"그럼 내 도련님한테 할 얘기가 있소. 도련님네는 부자가 됐고, 또 이렇게 무거운 짐들을 일일이 운반하기도 거추장스러울 테니, 내게 주지 그래요. 이런 낡고 하잘 것 없는 물건들을 어디다 쓰겠소. 우리 같은 가난뱅이에겐 그래도 이런 물건이 쓸모가 있을 테니까 말이오."

"난 부자가 아닙니다. 또 이걸 팔아야 그 돈으로..."

"아이구 참! 지사 벼슬까지 하고서도 부자가 아니라고? 당신은 지금 소실이 셋이나 되고 문밖에만 나서면 여덟 사람이 떠메는 큰 가마를 타면서도 부자가 아니란 말이야? 흥! 그런 말로 날 속일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이제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그저 입을 다물고 묵묵히 서 있었다.

"원 세상에! 부자가 될수록 지갑 끈을 죄고, 지갑 끈을 죌수록 더욱더 부자가 된다더니 정말 그 말 그대롤세."

콤파스는 화가 나서 돌아서더니 투덜대면서 밖으로 걸어나갔다. 그러나 나가면서 슬쩍 어머니의 장갑 한 켤레를 허리춤에 쑤셔 넣고 사라져버렸다.

그 다음에는 또 근처의 친척들이 나를 찾아왔다. 나는 그들을 상대하면서 틈틈이 짐을 꾸려야 했다. 이렇게 사나흘이 지나갔다.

날씨가 몹시 춥던 어느 날 오후에 나는 점심을 먹고 차를 마시며 앉아있었다. 그러다가 나는 밖에서 사람이 들어오는 인기척에 머리를 돌려 바라보았다. 그를 보고 나는 그만 놀라서 부랴부랴 몸을 일으켜 맞으러나갔다.

이번에 들어온 사람은 바로 룬투였다. 보자마자 나는 그가 룬투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기억하고 있던 그 룬투는 아니었다.

키는 갑절이나 커졌고, 옛날 발그스름하던 둥근 얼굴은 누렇게 윤기가 없어졌다. 얼굴에 깊은 주름이 패여 있고, 눈도 그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언저리가 온통 벌겋게 부어 올라 있었다. 바닷가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은 하루 종일 불어닥치는 바닷바람 때문에 대개 이런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었다.

그는 너덜너덜한 털모자를 쓰고, 몸에는 얇은 솜옷을 걸치고 있었다. 초라한 온몸이 추위 때문에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손에는 종이봉지 하나와 기다란 담뱃대를 들고 있었다. 그 손 역시 내가 기억하고 있던, 통통하고 혈색이 좋은 손은 아니었다. 거칠고 금이 가고 여기저기가 터져서 마치 소나무껍질 같았다.

나는 이 때 너무 흥분하여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아, 룬투 형 이제... 오셨구료..."

이렇게 말했을 뿐이었다.

나는 하고 싶은 많은 말들이 꿰어 놓은 구슬같이 계속 터져나올 것 같아다. 꿩이며, 날치며, 조개껍질, 오소리... 그러나 어쩐지 무언가에 가로막힌 듯 그 말들은 머리 속에서만 빙빙 돌 뿐,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그는 그 자리에 우뚝 섰다. 얼굴에는 기쁨과 처량함이 섞인 표정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는 뭐라고 입술을 달싹이긴 했지만 그래도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마침내 그는 더욱 공손한 태도를 취하더니 분명히 이렇게 불렀다.

"나으리!"

나는 오싹 소름이 끼치는 것 같았다.

우리 둘 사이에는 이미 두꺼운 장벽이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다. 그 슬퍼해야 할 장벽 말이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뒤를 돌아다보며 말했다.

"쉐이성(水生)아! 나으리께 인사를 드려라."

그는 자기 등뒤에 숨어 있던 어린 아이를 앞으로 끌어냈다. 그 아이야말로 20년 전의 룬투 그대로였다. 단지 안색이 나쁘고 비쩍 마른데다 목에 은 목걸이가 없을 뿐이었다.

"이놈이 다섯째 놈입니다. 아직 세상 구경을 못해서 그런지 비실비실 낯만 가리고..."

어머니와 흥얼이 이층에서 아래로 내려왔다. 아마 룬투의 말소리를 들은 모양이었다. 룬투는 어머니께 말했다.

"마나님, 보내주신 편지는 벌써 받았습죠. 정말 어찌나 기뻤는지, 나으리께서 돌아오신다는 것을 알고..."

"룬투 자네 왜 이렇게 서먹서먹하게 인사치레를 하나. 자네들 옛날에는 서로 너, 너 하고 부르지 않았나? 옛날같이 그냥 쉰이라 부르게나."

어머니는 기뻐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참, 마나님두 무슨 말씀을... 그게 될 법이나 한 얘깁니까. 그땐 철없는 어린 아이여서 아무 것도 모르고..."

룬투는 이렇게 얘기하면서 또 쉐이성에게 이리 와 인사를 드리라고 했다. 하지만 아이는 여전히 부끄러하면서 저의 아버지 등뒤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그 애가 쉐이성인가? 다섯째랬지? 모두 낯선 사람뿐이니 겁을 내는 것도 당연하지. 얘 훙얼아, 네가 쉐이성이랑 같이 밖에 나가 놀아라."

훙얼은 이 말을 듣고 쉐이성에게 손짓을 했다. 쉐이성은 그제서야 한결 가벼운 걸음으로 훙얼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어머니는 룬투에게 자리에 앉으라고 권하셨다. 그는 한참 동안 망설이다가 겨우 자리에 앉았다. 그는 자리에 앉아 긴 담뱃대를 탁자 옆에 기대 놓더니 종이봉지를 앞으로 끌어당기면서 말했다.

"겨울이라서 변변한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건 푸른 콩을 말린 것인데, 정말 변변찮지만 그래도 저희 집에서 말린 것이라서 나으리께서 맛이라도 보시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