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그 행복도 그리 오래 가지는 못했다. 연대가 다른 곳, 시베리아처럼 먼 곳은 아니지만 아무튼 아주 먼 곳으로 이동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수의사도 연대와 함께 결국 영영 떠나버린 것이다. 그래서 올렌까는 다시 혼자만 남겨지게 되었다.
이제 그녀는 말 그대로 외톨이가 되고 말았다. 아버지도 이미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나셨다. 아버지가 앉아 있던 의자는 다리가 하나 부러진 채로 지붕 밑 다락방에 처박아 두어서 먼지만 가득 뒤집어 쓰고 있었다. 복스럽던 그녀의 얼굴도 이제 살이 빠지고 귀엽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도 예전처럼 그녀에게 미소를 보내거나 그러지 않았다.
이제 젊고 아름답던 시절은 분명히 다 지나가 버렸다. 이제 젊음은 두 번 다시 그녀에게 돌아올 수 없다. 그리고 이제 행복 따위는 꿈에도 그려볼 수 없는 그늘지고 우울한 생활이 새로 시작된 것이다. 해가 저무는 무렵이면 올렌까는 현관 계단에 나와 앉아 있었다. 그 자리에서는 예전처럼 야외 극장에서 연주하는 음악 소리와 폭죽 터뜨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지금 올렌까는 그런 소리를 들어도 아무 감흥도 생기지 않았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그리고 아무런 욕망조차 없이 그저 멍하게 텅 빈 정원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그러다가 밤이 깊으면 잠자리에 들어가 꿈속에서도 마치 폐허나 마찬가지인 자기 집 정원의 모습을 보는 것이었다. 먹는 것도 그저 마지못해 먹는 시늉만 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녀가 불행했던 것은 이제 무슨 일에나 자기의 의견이란 것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물론 자기 주위의 사물은 여전히 눈에 띄었고, 또 주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일들에 대해 자기 의견을 전혀 가질 수 없었고, 무슨 얘기를 해야 좋을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자기 의견을 가질 수 없다는 것 - 이것이 그녀에게 얼마나 무서운 일이었는지 모른다.
병이 하나 놓여 있다. 비가 오기도 한다. 농부가 수레에 올라타서 길을 간다... 이런 것들을 보아도 그녀는 도대체 그 병이 왜 있는 것인지, 무슨 이유로 비가 오는 것인지, 그 농부는 무엇 때문에 수레를 타고 가는지 자기 생각을 갖고 얘기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마 1천 루블을 주면서 뭔가 얘기를 해보라고 해도 그녀는 입을 뗄 수 없었을 것이다.
꾸낀이나 뿌스또발로프나 그 다음엔 수의사와 함께 지낼 때만 해도 그녀는 그런 모든 일에 대해 설명할 수 있었고, 자기 나름대로 의견을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녀의 머리 속과 가슴은 그녀의 집 정원만큼이나 텅 비어 있었다. 그것은 정말 소름끼치도록 무섭고 괴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도시가 점점 커지면서 그녀가 사는 마을도 이제는 번화한 거리가 되었다. 띠보리 극장과 제재소가 있던 자리에는 이제 집들이 즐비하게 들어서서 이리저리 골목길이 뻗어 있었다. 정말 세월이 빠르기도 하다. 올렌까의 집은 연기에 그을리고 지붕에는 녹이 슬었다. 헛간은 한쪽으로 기우뚱하게 기울었고, 뜰에는 잡초와 가시나무 따위만 잎이 무성했다. 집 주인인 올렌까의 얼굴에도 보기 싫은 주름이 늘어만 갔다.
올렌까는 여름철에는 하릴없이 허전한 마음으로 층계에 나와 시름없이 앉아 있었다. 겨울에는 눈이 내리는 모습을 지켜보며 창문께에 앉아 있었다. 훈훈한 봄 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그 봄 바람을 타고 멀리 교회의 종소리가 들려오면 그녀는 문득 지난날의 추억이 한꺼번에 되살아나서 가슴이 미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 눈물도 그리 오래 가지는 않았다. 그녀의 가슴 속에는 다시 무엇 때문에 자신이 살고 있는 것인지, 이유를 알 수 없다는 공허감이 자리를 잡는 것이다. 브리스까라는 이름의 새까만 고양이가 야옹야옹 하면서 곁에 와 재롱을 부리곤 했지만 그런 고양이 따위의 재롱이 올렌까의 마음을 달래줄 수는 없었다. 그녀에게 고양이의 재롱 따위가 도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사람이었다. 자기의 모든 존재, 자기의 이성과 영혼을 꽉 틀어쥐고 생각할 수 있는 힘과 생활의 방향을 제시해주는 그런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식어가는 그녀의 피를 다시 한 번 따뜻하게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옷자락에 매달리는 고양이를 떼 내 저리 밀어내며 짜증 섞인 소리를 냈다.
"저리 가! 귀찮단 말이야!"
날이면 날마다 아무 기쁨도, 아무 자기 주관도 없이 이렇게 세월은 한 해 한 해 흘러갔다. 살림은 하녀 마브라가 하고싶은 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었다.
무더운 6월의 어느 날 저녁이었다. 교외로 나갔던 가축들이 돌아오며 내는 먼지가 온통 집안에 가득 차는 그런 시간이었다. 누군가 대문을 두드렸다. 올렌까는 나가서 문을 열었다. 그리고 밖을 보았을 때, 그녀는 하마트면 기절할 뻔했다. 문밖에는 벌써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그 수의사가 민간인 복장을 한 채 서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 그녀는 잊고 있었던 과거가 그대로 되살아났다. 그녀는 어쩔 줄 몰랐다. 한 마디 말도 입밖에 꺼내지 못하고 그녀는 그의 가슴에 머리를 파묻고 마냥 흐느꼈다. 걷잡을 수 없는 흥분에 사로잡혀, 그녀는 두 사람이 어떻게 집으로 들어오고 어떻게 식탁에 가서 마주앉아 차를 마셨는지조차 기억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당신이 돌아오셨군요!" 기쁨에 목소리를 떨며 그녀는 속삭이듯 말했다. "블라디미르 쁠라또니치! 그 동안 어디 계시다 이렇게 찾아오신 거예요?"
"이젠 아주 이 고장에 와서 살 생각입니다." 수의사가 입을 열어 말했다. "군대도 그만 뒀지요. 이제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마음껏 해서 생활의 자리를 잡고 싶어요. 그리고 아들 녀석도 이제 학교에 보낼 때가 됐습니다. 많이 컸지요. 나는... 알고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내와 화해를 했습니다."
"그럼 부인은 지금 어디 계셔요?" 올렌까가 물었다.
"지금 아들 녀석과 함께 여관에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셋방을 얻으러 다니는 길입니다."
"아니 셋방이라니, 그게 도대체 무슨 말씀이에요? 우리 집에 와서 계시면 되잖아요? 여기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러세요? 방 값은 한 푼도 받지 않을 테니 아무 걱정 마시고 우리 집에 와서 있어요, 네?"
올렌까는 다시 흥분해서 눈물을 흘렸다. "이 방을 쓰시도록 하세요. 저는 건넌방 하나면 충분하니까요. 그렇게 해주시면 전 너무나 좋을 거예요."
이튿날, 지붕에는 벌서 페인트를 새로 칠하고 벽도 하얗게 새로 바르도록 했다. 올렌까는 가슴을 쫙 펴고 두 손을 허리에 얹고, 집안을 이리저리 다니며 여러 가지 일을 감독하고 있었다. 얼굴에는 예전의 그 미소가 다시 떠올랐다. 마치 오랜 잠에서 깨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의 온몸에는 활기가 넘쳐흘렀다.
수의사의 아내가 아들과 함께 이사를 왔다. 못생긴 얼굴에 머리는 짧게 자르고, 성미가 까다로울 것 같은, 비쩍 마른 여인이었다. 아들 사샤는 열 살 먹은 어린아이치고는 키가 작고 똥똥한 편이었다. 눈은 파랗고, 볼에는 보조개가 오목하게 패어 있었다. 아이는 뜰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고양이를 쫓아 달려갔다. 그리고 곧 이어 명랑하고 즐거운 웃음소리가 집안을 울렸다.
"아줌마, 이거 아줌마네 고양이 맞아?" 사샤가 올렌까에게 물었다. "새끼를 낳으면 우리도 한 마리 줘요. 우리 엄마는 쥐새끼를 세상에서 제일 싫어해요."
올렌까는 차를 따라주며 사샤와 이야기를 하노라면 가슴이 훈훈해졌다. 마치 이 아이가 자기 자식이기라도 한 것처럼 사랑스럽게 여겨졌던 것이다. 저녁에 사샤에 책상에 앉아 학교에서 배운 것을 복습이라도 하고 있으면 그녀는 그 모습을 대견스럽게 바라보며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참, 귀엽기도 하지... 어쩌면 어린 아이가 저렇게 똑똑하고, 저렇게 깔끔하게도 생겼담..."
"섬은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육지의 일종이다."
'섬은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육지의 일종이다...' 올렌까도 사샤가 읽는 글을 마음 속으로 따라서 읽었다. 여러 해 동안 침묵 속에서 살아오며 자기의 의견이라는 것을 입밖에 낸 적이 없던 그녀에게는 이것이 오래간만에 자신을 갖고 입 밖으로 소리내어 말한 최초의 의견이었다. 이제 올렌까도 비로소 자기의 의견이란 걸 가지게 된 것이다.
귀여운 여인 - 4. 외톨이 여인
- 세부
- 주동식에 의해 작성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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