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렌까(올리가의 애칭)는 퇴직한 팔등관 쁘레만니꼬프의 딸이다. 지금 올렌까는 자기 집 정원으로 내려가는 조그마한 계단에 앉아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날씨가 덥고, 파리가 성가시게 달라붙었다. 그러나 이제 곧 저녁이 온다고 생각하면 무척 기뻤다. 동쪽에서 검은 비구름이 몰려오고 이따금 습기찬 바람도 불어왔다.
안뜰 한가운데에는 '띠보리 유원지(로마 근교에 있는 명승지의 이름을 딴 것)'의 지배인인 꾸낀이라는 남자가 서서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꾸낀은 올렌까 집의 별채를 세를 얻어 살고 있었다.
"빌어먹을, 또야?" 그는 내뱉듯이 말했다. "또 비가 올 모양이군! 매일매일 하루라도 비가 오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는 모양이군. 마치 일부러 그러는 것 같아! 이래서야 차라리 목이라도 매서 죽으라고 하지 그래! 파산하라는 얘기나 똑같아! 매일 엄청난 손해를 보고 있으니 말이야!"
그는 두 손을 탁 치더니 올렌까를 향해 말을 이었다.
"바로 이런 겁니다, 올리가 쎄묘노브나. 우리가 살아간다는 게 말입니다. 정말 울고 싶은 심정입니다! 별 고생을 다하고 정성을 들이죠. 끙끙거리며 밤잠을 못 자면서 말입니다… 조금이라도 나은 것을 만들어 올리려고 온갖 머리를 다 짜내죠… 그런데 결과는 뭡니까? 무엇보다 우선 저 구경꾼들 말씀이죠… 저 사람들은 교육을 제대로 못 받은 야만인들이다, 이 말씀입니다.
이쪽은 온갖 정성을 다해서 고르고 골라 고상한 오페레타니, 무언극이니, 훌륭한 가수들이 부르는 가요곡이니, 준비를 다해서 보여주지만 과연 그들이 그걸 원할까요? 그 작자들한테 그걸 보여주면 그게 뭔지 알기나 하는 줄 아세요? 그 작자들이 정말 원하는 것은 그저 광대를 요구할 뿐입니다. 저속한 유랑극단의 신파극 말이죠! 그리고 또 이 날씨 좀 보세요. 밤에는 반드시 비가 내리죠.
오월 십일부터 비가 오기 시작하더니 오월과 유월 내내 비가 내리다니 정말 이렇게 기가 막히는 일이 어디 있겠어요! 구경꾼은 얼씬도 하지 않는데 나는 장소 사용료를 꼬박꼬박 물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배우들에게 주는 급료도 빼먹을 수 없지요!"
다음날도 저녁 무렵에 또 비구름이 몰려왔다. 꾸낀은 신경질적으로 웃으며 말했다.
"그래, 어쩌겠다는 거야? 쏟아지려거든 맘대로 쏟아지려무나! 차라리 극장을 아예 물바다로 만들어 버려라! 차라리 나를 물 속에 집어 넣어다오! 이 세상의 내 행복, 아니 저 세상의 행복 따위도 어떻게 되건 알게 뭐람! 배우들이 고소하려면 고소하라지! 법원 따위가 뭐 말라 비틀어진 수작이야? 시베리아로 유형을 보내도 난 상관없어! 단두대도 두렵지 않아! 하하하!"
그 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올렌까는 아무 말도 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꾸낀의 말을 듣고 있었다. 가끔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이기도 했다. 마침내 그녀는 꾸낀의 불행에 감동하여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는 키가 작고 비쩍 마른 사나이였다. 얼굴 색이 누렇고, 조금밖에 남지 않은 귀밑 털은 산뜻하게 다듬어 붙이고 있다. 음성은 가느다란 테너였다. 말할 때는 입을 실룩거렸고 얼굴에는 언제나 절망의 빛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녀의 가슴에 진정한 깊은 감동을 불러 일으켰던 것이다.
그녀는 언제나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었고, 사랑이 없이는 견디지 못하는 여인이었다. 어렸을 때는 아버지를 몹시 따랐으나 지금 아버지는 병이 들어 어두컴컴한 방안의 팔걸이 의자에 걸터앉아 괴로운 숨을 몰아쉬고 있을 뿐이다. 한때 숙모를 몹시 좋아하기도 했으나 그녀는 어쩌다 이 년에 한 번 정도만 브리안스끄에서 나올 뿐이었다. 그보다 훨씬 전 여학교 시절에는 프랑스어를 가르치는 남자 교사를 몹시 좋아한 적도 있었다.
그녀는 조용하고 마음씨가 착한, 다정다감한 처녀였다. 눈매가 부드럽고 다정했으며 몸도 무척 건강했다. 뺨은 토실토실한 장미빛이며 목덜미에는 까만 점이 하나 붙어 있었다. 뭔가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들을라치면 그녀의 얼굴에는 상냥하고 귀여운 미소가 떠오르곤 했다. 사내들은 으레 그 미소를 바라보며 속으로 "거 참 괜찮군…"하면서 덩달아 미소를 짓기 마련이었다. 상대방이 여자 손님일 경우엔 이야기 도중에 갑자기 마음이 밝아져서 그녀의 손을 부여잡고 이렇게 말하곤 했다.
"정말 귀여운 아가씨로군!"
그녀의 집은 도시의 끝 집시 마을에 있었고, 띠보리 유원지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그녀는 태어나서부터 줄곧 이 집에서 살아 왔고, 아버지의 유언장에도 이 집은 그녀 앞으로 되어 있었다. 매일 밤 초저녁부터 밤늦게까지 유원지에서는 음악을 연주하는 소리와 펑 펑 하고 불꽃놀이 터뜨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에게는 그 소리가 마치 꾸낀이 자신의 운명과 싸우는 소리처럼 들렸다. 그가 자신의 가장 큰 적인 저 냉담한 구경꾼들을 상대로 돌격하고 쳐부수는 소리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그럴 때면 그녀의 마음은 달콤하게 저려오고, 잠은 저만치 달아났다. 이른 새벽에 그가 집으로 돌아오면 그녀는 자기 침실의 창문을 안에서 조용히 두들겨 커튼 사이로 얼굴과 한쪽 어깨만을 내밀면서 정답게 쌩긋 웃어주곤 했다.
꾸낀이 청혼하여 두 사람은 결혼했다. 그리고 그는 그녀의 목덜미와 터질 듯이 건강한, 토실토실한 어깨를 보면서 저도 모르게 두 손을 번쩍 쳐들며 치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당신은 정말 귀여기 짝이 없어!"
그는 행복했다. 그러나 하필이면 결혼한 그날 낮에도 비가 왔고, 밤이 이슥해서도 또 비가 내렸다. 그의 얼굴에서는 그래서 결국 절망의 빛이 사라지지 않았다.
결혼 후 두 사람은 즐겁게 살았다. 그녀는 남편의 사무실에 앉아서 입장권을 팔기도 하고, 지출을 장부에 기록하거나, 급료 주는 일을 하곤 했다. 그녀의 장미 빛 뺨과 사랑스럽고 귀여운, 티없이 맑은 미소가 방금 사무실 창구에 나타나는가 하면 다음 순간에는 무대 뒤에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그런가 하면 가설 극장의 식당에도 모습을 보였다. 그녀는 이렇게 언제나 그 부근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그녀는 이제 자기와 친해진 이 사람 저 사람들에게 말을 걸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것, 가장 소중하고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연극이라는 얘기였다. 연극을 통해서만 인간은 진정한 위안을 얻으며, 교양이 있고 인격적인 사람이 되는 길은 연극을 제외한 다른 것에서는 찾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과연 구경꾼들이 그걸 알아줄까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그 사람들이 정작 원하는 것은 그저 싸구려 유랑 극단의 광대극이란 말이에요! 어제 우리는 <파우스트>를 고쳐서 무대에 올렸답니다. 그랬더니 자리가 거의 텅텅 비고 말았겠지요. 하지만 만약 우리 주인 바니치까하고 내가 뭔가 저속한 광대극을 공연했다면 틀림없이 극장은 만원사례, 미어터졌을 테지요. 내일은 바니치까하고 둘이서 <지옥의 오르페우스>를 공연한답니다. 꼭 보러 오세요, 네?"
이렇게 그녀는 연극이나 배우에 대해서 꾸낀이 말한 의견을 그대로 흉내냈다. 남편과 마찬가지로 그녀 역시 관객들이 예술에 대해 냉담하고 무식하다는 얘기를 그대로 하면서 업신여겼다. 또 무대 연습에 끼어들어, 대사나 포즈를 고쳐주는가 하면 악사들의 행동거지를 단속하기도 했다. 어쩌다 지방 신문이 자기들의 연극을 혹평하기라도 하면 그녀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러다가 결국 그 신문사에 직접 해명하러 가기도 했다.
귀여운 여인 - 1. 비극조차 사랑하는...
- 세부
- 주동식에 의해 작성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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