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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곤한 콘스탄틴은 몇 분마다 잠에서 깨어나면서 밤새도록 알 수 없는, 토막토막 끊기는 꿈들을 꾸었다. 느닷없이 깨끗한 고급 옷이 가득 든 슈트케이스를 갖고 있기도 하고, 그런가 하면 갑자기 넥타이 대신 더러운 붕대를 목에 감고 있는 화이트 씨의 모습이 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콘스탄틴은 꿈 속에서 나는 훌륭하다고 자부하고 있었다.다음날 아침 복장을 단정히 한 화이트 씨가 깨웠을 때 콘스탄틴은 깊이 잠들어 있었다. 맑고 찬 광선이 비스듬히 창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콘스탄틴은 언제나 잠에서 깨어날 때는 머리 속이 선명했다. 화이트 씨는 콘스탄틴이 어제 밤 혐오감을 느끼면서 벗어 던진 더러운 옷들이 어지럽게 쌓인 것을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콘스탄틴은 오싹하는 느낌에 휩싸였다. 이 사람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고 콘스탄틴은 일부러 기분 좋고 원기 있는 태도를 지었다. "야, 날씨가 드라이브하기에 괜찮을까요?"
"형편없는 날씨야." 화이트 씨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비가 막 쏟아지는군. 길이 어떠리라는 건 미리 각오해둬야 할 거요."
"아니 이런 야만스러운 중국 땅에 길이 있는 것만 해도 다행이지요."
"길이 없는 편이 낫지. 길이 없으면 이런 엿 같은 여행을 할 생각도 못했을 테니까."
"재빨리 옷을 입고 준비하겠습니다." 벌거벗은 채 침대에서 뛰어내려 화이트 씨 뒤에서 더러운 옷을 입으면서 콘스탄틴은 말했다. 그리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 화이트 씨를 향해서 다시 말했다. "생판 모르는 타인, 그것도 거지나 마찬가지인 사람을 인간을 위해서 이 심한 빗속을 왜 삼 백 마일이나 차를 타고 가시는 겁니까?"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자, 이 친구는 이제 나의 가치를 인정하는 최소한의 발언을 할 수밖에 없다. 무슨 말을 하건 그건 당연히 그런 고백이 되는 거야.'
"그거야 뻔하지. 나는 당신 다리를 잘라낼 수 없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어." 화이트 씨가 우울하게 말했다. 다리를 잘라낸다는 말을 듣고 다시 신경이 날카로워진 콘스탄틴은 더 이상 묻거나 따지고 싶지도 않았다. 손이 덜덜 떨려 단추가 잠겨지지 않을 정도였다. 외인부대 근무는 감수성이 풍부하고 의지할 데 없는 인간에게 적당한 경험은 아니었다. 하지만 거기서는 사람들에게 무시 당하고, 형편없는 음식을 먹고, 바보 취급을 받기는 했어도 그 이상 이렇게 상상도 할 수 없는 끔찍한 일에 부딪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반대로 그곳의 경험은 더욱 자기 자신의 가치에 대한 확신을 강화시켜 주었다.
그러나 이제 자신의 소중한 자아가 쓸 데 없는 육체에게 속수무책으로 좌우된다고 생각하니 이것만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콘스탄틴의 열에 들뜨고 흥분하기 쉬운 마음에 이것은 견디기 힘든 굴욕감을 안겨 주었다. 죽음은 결정적이고 가장 혐오할만한 육체의 승리였다. 죽음은 침묵과 부패 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자존심을 유지할 수 있다면 그 죽음마저도 사나이답게, 그 심연을 마주하고 태연하게 마주 볼 수 있으련만...
흥분하고 창백해진 콘스탄틴이 다리를 끌며 앞문으로 나가자 자갈을 깐 정원 끝에 낡은 포드차가 비 속에 서 있었다. 별로 의식하는 것은 아니었는데 이렇게 다리를 절룩거리게 된 것은 어제 밤부터였다. 다리 전체가 불안한 느낌이었다. 피부가 수축하는 것처럼 쑤셨다. 콘스탄틴은 자동차 속을 들여다 봤다. 화이트 씨의 하인이 뒷 좌석에 가죽 끈이 달린 깨끗한 가방을 꼭 껴안고 앉아 있었다. 어제 밤 넥타이 걸이가 그의 심통을 건드린 것처럼 또 다시 이 여행 가방이 콘스탄틴의 시선을 끌고 자존심을 건드렸다.
이 집 주인의 물건은 모두가 손댈 수 없는 억측의 세계에 속하며, 또한 말할 수 없이 균형이 잡힌, 트집 잡을 수 없는 권위와 같았다. 콘스탄틴은 속으로 감탄하면서 그리고 한편 일종의 굴욕감을 느꼈다. 콘스탄틴은 차에 몸을 실으며 "캠프용 침대까지 저렇게 갖추다니, 정말 빈 틈이 없군!"하고 큰 소리로 말했다.
"한 사람 것 밖에 없어." 화이트 씨가 말했다. "그럼, 이걸 나 때문에 가지고 가는 겁니까?" 혼자 멋대로 생각하고 득의양양해진 콘스탄틴은 화이트 씨를 바라보면서 물었다.
"아니 이건 내가 쓸 거야." 근시에 태연한 미소를 지으면서 화이트 씨가 말했다. "외인부대에 있던 사람이면 어떤 침대나 상관 없겠지. 하지만 나는 그렇지 못해. 나는 침대 습관이 완전히 몸에 배어서 중국인들의 방에서 그냥 잠을 잘 수 없어."
이 자의 얼굴을 찰싹 때려주면 얼마나 후련할까 하고 콘스탄틴은 처음으로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한편 이렇게 생각했다. '이 사람은 정신적인 용기가 있는 사람이다. 웬만큼 용기가 없는 사람이면 침대에 대해 물어볼 때 겉치레라도 [물론, 당신 때문이지. 그건 당연한 것 아닌가]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운전대 주인 옆에 앉으면서 콘스탄틴은 두리번거리며 아무렇게나 지껄였다.
"자동차를 운전하는 사람은 정말 대단합니다. 축음기처럼 자기 분수를 넘는 것 말고, 그렇지 않은 기계에는 감탄하게 되죠. 자동차라는 이 기계의 영토는 공간이겠지요. 자동차는 공간을 정복하거든요. 이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가령 이 자동차처럼 볼품 없는 것이라 해도 말입니다. 화이트 씨, 당신 자동차는 보잘 것 없군요. 이게 별 탈 없이 삼 백 마일이나 달릴 수 있을까요?"
"달릴 수 있을 거야." 화이트 씨는 대답했다. "그 때 그 때 휘발유와 기름, 물 따위를 넣어주면 걱정 없네. 나야 기계를 잘 다룰 줄 모르지만." "그럴 리 없지요. 어쨌든 축음기는 걸 줄 아니까." "당신은 계속 내 축음기를 물고 늘어지는군. 나에게 그 축음기는 단순한 기계가 아니야... 나에게 그것은 정말 쇼팡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어."
콘스탄틴은 화이트 씨의 속물 근성이 드러나는 이런 말을 듣고 자부심과 기쁨을 느꼈다. 발을 구르고 싶을 지경이었다. 이런 대답이나 내뱉는 화이트 씨 같은 속물에 비하면 나는 마치 신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자기 만족의 순간 속에서 순간적으로 어떤 무서운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혹시, 화이트 씨의 지붕 밑 방 침대에 벼룩을 옮겨놓지 않았을까... 이런 하는 불안에 사로잡힌 것이다.
침대를 정리할 때 그 침착하고 꼼꼼한 중국인 하인이 반드시 벼룩을 발견하겠지. 그리고 화이트 씨가 집에 돌아가면 틀림없이 "그 외국인 병사가 지붕 밑 방 침대에 벼룩을 옮겨 놨습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방을 나오기 전에 침대를 자세히 살펴보는 건데... 그렇지 않다면 그런 하인의 말을 화이트 씨가 믿지 않게 할 그럴 듯한 거짓말이 어디 없을까... 콘스탄틴은 마음 속으로 간절히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고통과 죽음에 대한 불안에 짓눌린데다, 자기와 함께 가는 이 동행인을 감동시킬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속이 뒤틀려 그는 모든 것이 절망적으로 느껴졌다. 세상에는 인정과 용서가 없다... 그저 모든 것이 암담할 따름이다. 달리 생각해볼 여지가 전혀 없이 모든 것이 절망적이다. 절망만이 확실한 것이고, 희망에 찬 것은 모두가 쓸 데 없는 꿈처럼 느껴졌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벼룩을 옮긴 것이 분명하다. 비는 그치지 않고 언제까지나 계속 내린다. 자동차의 옆 커튼에서는 비가 샌다. 도로는 미끄러지기 알맞다.
발이 쑤시고 외과의사의 수술용 톱이 머리에 떠오른다. 뒷좌석에는 뭐라고 형언하기 곤란한 심정을 자아내는 그 여행 가방이 의젓하게 놓여 있다. 담배 상자로 만든 발라라이카가 그 옆에서 빙빙 소리를 내고 있다. 괴로울 때의 구원의 신 같은 화이트 씨는 지나치게 침착하고 지나치게 훌륭하다. 콘스탄틴은 함정에 빠진 것 같은 슬픈 마음을 버릴 수 없고, 즐거운 생각은 전혀 찾아낼 수 없었다.
포드 자동차는 점잖은 소나 겨우 빠져나갈 것 같은, 그렇게 거친 길을 달리고 있었다. 차 바퀴가 미끄러져 물 웅덩이에 빠지면 고생스럽게 빼내야 했다. 콘스탄틴이 "정말 엿 같은 길이군"하고 말을 걸자 화이트 씨가 점잖게 말을 가로막았다. "미안하지만, 나는 운전 중엔 이야기를 못하오. 운전이 서툴러 주의해야 하니까. 게다가 길마저 이렇게 엉망이니..."
"대답은 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저는 오히려 그게 가장 이상적인 대화 방법이라고 생각하니까. 왜 내가 외인부대에 들어갔는가 그 얘기를 하지요. 당신도 그것이 궁금할 테니까. 얘기를 열심히 하고 있으면 자신의 불행도 잊어버릴 수 있을 것 같소."
"미안하지만 얘기를 듣고 싶지 않군." 화이트 씨는 조용히 말했다.
'이 늙은 구렁이 같은 놈.' 콘스탄틴은 화가 나서 가슴이 멈춰버릴 것 같았다. '정나미 떨어지는 놈이다.분명하고, 차갑게 도와줄 뿐... 다정한 얼굴도 없고, 상냥한 태도도 없다. 과연 영국인다운 방법이다. 러시아 사람이라면 똑 같은 일을 하더라도 좀더 따뜻하고 친절한 태도를 보일 텐데...'
자동차는 계속 달렸다. 콘스탄틴은 벼룩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자동차 밖으로는 중국 남부 지방의 녹황색 대지가 비에 젖어 높아졌다 낮아졌다 하며 스쳐 지나갔다. 단정하면서도 복잡한 논밭의 무늬가 흩어지고 또 새로 모이면서 복잡한 모양을 그려 보이는 것이 마치 마을에서 사람들이 떼를 지어 춤이라도 추는 것 같았다. 빗발이 무늬를 그리며 내리는 계곡 밑의 평지 저 멀리 뿔처럼 솟아난 바위가 보이기 시작했다.
산으로 접어드는 길 저편에 언덕들이 구비치고 좁은 계곡 입구의 마을에는 병정들이 깔려 있었다. "이제부터 귀찮게 되는군." 화이트 씨가 침착하게 말했다. 오합지졸처럼 어슬렁거리는 그 병정들은 아무렇게나 생겨먹은 볼품 없는 놈들이었다. 그러나 쓸쓸한 마을 길에 여기저기 모기가 다리를 벌린 것처럼 놓여 있는 기관총은 음산하고 긴장된 인상을 주었다.
자동차가 물을 튕기며 그 사이를 지나갈 때 콘스탄틴은 기관총이 무서운 눈초리로 자기의 소중한 심장을 노려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중국 놈들 싸우는 곳을 이렇게 지나가도 괜찮겠습니까?" 콘스탄틴이 물었다. "100% 안전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 화이트 씨는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만 당신 발을 그냥 두는 건 훨씬 더 위험한 일이야."
콘스탄틴은 화가 나서 작은 소리로 말했다. "당신 말을 들으면 인간에게는 오직 발밖에 없는 것 같군요."
그 순간 그들이 달려가는 좁은 계곡의 한쪽에서 팽팽한 철사 줄이 끊어지는 것 같은 소총탄 터지는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이어서 높은 바위산 위에서 계속 사격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콘스탄틴은 자신의 용기를 시험하는 기회를 항상 만나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또 그런 경우의 각오가 마음 소에 준비되어 있지는 않았다. 그의 자존심과는 상관없이 그의 몸이 갑자기 혼자 움직였다.
그는 화이트 씨를 끌어안았다. 운전하는 손이 방해를 받아 자동차는 갑자기 방향을 바꾸며 옆으로 미끌어졌다. 그리고 차는 비스듬히 도로 위에 멈췄다. 콘스탄틴은 기름 땀을 흘리고 자존심을 되살리며 거북스럽게 팔을 도로 움츠러뜨렸다. 화이트 씨는 아무 말 없이 태연하게 콘스탄틴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약간 흔들었다. 자동차는 다시 출발, 묵묵히 드라이브를 계속했다. 총성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아니, 정말 당신은 전혀 놀라지 않는군요." 콘스탄틴은 주먹을 쥐면서 말했다. 유아독존의 무인도의 주민으로 자처하는 그에게는 오랜 전통을 고수하는 육지의 백성처럼 겁을 먹는 모습을 감출 수가 없었다. 용감하든 겁쟁이든 콘스탄틴이란 인간은 콘스탄틴일 뿐이고 이런 태도는 자기가 선택한 것이다. 스스로 자기 자신을 만들 것이며 스스로가 만들어낸 자기에 철저해져서 힘을 내기도 하고 패배도 한다. 용감하기보다 겁쟁이인 편이 어떤 의미에서는 더 재미있다. 그러나 이 밉살스러운 그의 은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정오가 되어도 이른 아침보다 별로 밝아지지 않았다. 회색 하늘에서 비는 사선을 그리며 사정없이 계속 내렸다. 빗방울을 잔뜩 받은 앞 유리를 통해서 보이는 나무들이나 하늘 그리고 계곡과 산은 서투른 화가가 팔레트에 아무렇게나 붓을 놀려서 그려내는 풍경화 같았다. 그러나 햇빛이 나든 안 나든 이제 정오다. 화이트 씨는 마치 롤스로이스 같은 고급 차가 이곳을 지나가기라도 할 것처럼 소 밖에 지나가지 못할 도로의 한 켠에 단정하게 차를 세우고 샌드위치 꾸러미를 풀기 시작했다.
"자네 때문에 캐비어 샌드위치를 좀 가져왔지." 화이트 씨가 속삭이듯 말했다. "러시아인은 캐비어를 아주 좋아하잖나."
"그럼 당신네 영국인들은 언제나 로스트비프를 먹겠군요. 오늘 그걸 싸 왔습니까?" 콘스탄틴은 비꼬듯 말했다. 화이트 씨가 언제나 집합명사로만 사람들을 부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니야, 나는 훈제 페이스트를 먹을 거야."
두 사람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고 기분 나쁜 침묵 속에서 음식만 씹었다. 콘스탄틴은 이제 자신이 외인부대에 들어갔던 사정을 화이트 씨에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무슨 얘기건 이제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화이트 씨 앞에서는 무엇이든 그럴 듯한 거짓말을 나열하는 즐거움 - 아니 평범한 진실을 말하는 즐거움조차 묘하게 사라져버리고 만다.
그것을 무어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지만 어쨌든 뭔가 콘스탄틴을 화나게 하는 것이 있었다. 화이트 씨는 핸들 위에 엎드려 두 손으로 눈을 가렸다. 차 운전에 피곤해진 것이다. 조금 전의 캐비어, 거기다 그의 피곤해하는 모습, 이것들이 콘스탄틴을 자극했다. 화이트 씨가 점점 더 노골적으로 짜증을 내고 있다고 콘스탄틴은 생각한 것이다.
"이제 내 얼굴을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 이런 겁니까." 그는 결국 이렇게 독이 든 말을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아니, 그렇지 않아." 화이트 씨는 정중하게, 그러나 별 성의 없이 말했다. "내 태도에 마음 상할 건 없어. 나는 백년이 지나도 이 모양일 테니까."
"내 발이 붙어 있든, 잘라지든 - 아무렇게나 취급되어 죽든 살든 - 백년 후에는 아무 변화도 없다 이 말씀이지요." 콘스탄틴이 상대방의 발언을 고의로 되풀이, 인간 개성의 귀중한 신비에 대한 모욕적인 말로 해석하는 것은 일부러 상대방을 걸고 넘어지려는 병적인 심리에서 나온 것이었다.
"아니, 이봐. 내가 자네 다리 때문에 이 이상 어떻게 더 해 줘야 하나?" 화이트 씨는 다시 자동차를 움직이면서 화가 나서 말했다.
'그 몇 백만 배, 몇 백만 배라도 해줄 수 있다.' 콘스탄틴은 거의 히스테리에 가까운 이런 생각을 했지만 꾹 참고 말은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