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혹 그 영국인이 그 따위 피부색에 따른 의무감 같은 게 전혀 없다고 해도 콘스탄틴은 역시 희망을 잃지 않았을 것이다. 긴 얼굴은 못생겼고, 다리는 짧고 보기 흉했지만, 그래도 자기 태도에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있다고 그는 자신하고 있었다.
징을 박은 구두를 신고 콘스탄틴이 방에 들어서자 화이트 씨는 "아, 당신도 또 그 외인부대 탈주병이오?"하고 물었다. 아무리 봐도 그렇게 눈치 없는 사람 같지는 않은데...
콘스탄틴은 그 질문에 놀라서 "저는 콘스탄틴 안드레이에비치 소로비에프라는 사람입니다"하고 대답했다. 그는 어머니가 영국인었기 때문에 영어를 거의 완벽하게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또'라는 말을 이렇게 사용하는 것은 듣지 못했다. 이 말은 원래 이렇게 사용하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그렇게 쓰이지 않는다. 자기 같은 사람은 이 세상에 오직 하나밖에 없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다.
물론 생각하기에 따라 이 바보 같은 영국인이 말한 것도 완전히 엉터리는 아니다. 지난 주 화요일까지 콘스탄틴은 분명 통킹의 외인부대에 있었다. 하얗게 칠한 헬멧, 딱딱한 카키색 외투, 어색한 훈련복, 각반, 구리 단추, 장화, 이것들은 모두 프랑스 정부에게서 받은 물건들이었다. 그러나 그 속의 알맹이, 즉 혼이 들어 있는 딱딱한 껍질 속의 진주 그것은 오직 콘스탄틴 안드레이에비치 소로비에프 그것이었다. 이것만으로도 얘기는 전혀 달라지는 것이다.
콘스탄틴은 이 의심 많은 영국인을 곧장 붙들어 앉혀 통킹 경계와 중국 도시 사이에서 벌어진, 그의 위험천만하고 아슬아슬한 모험에 대해 얘기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뱀이나 호랑이, 사랑에 빠진 중국의 왕녀들 그리고 해적 같은 소재가 머리 속에 금방 떠올랐다. 우선 해적 얘기를 하기로 했다.
전부터 해적에게 습격을 받았다는 얘기를 해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려고 여러 가지로 생각해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실제로 해적을 만난 적은 없지만 전에 생각해둔 줄거리가 이럴 때 쓸모가 있을 것이다. 콘스탄틴은 혹 돈 많은 여자와 결혼해 안정이 되면 자서전을 쓸 작정이었다. 그의 실제 인생도 진귀하지만, 여러 가지 다른 인생을 만들어 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콘스탄틴은 이를 테면 무인도의 주민이었다. 정신적인 로빈슨 크루소였던 것이다. 모든 것을 자기가 직접 만들어내고 그 중 어느것 하나 헛되이 하지 않았다. 사실 로빈슨 크루소는 그가 애독하는 책이었다. 그가 읽은 단 한 권의 책이기도 했지만. 그는 자신이 그 주인공처럼 무인도의 주민인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는 인간 이성에 의해 희생되어 왔던 야성적인 사상의 껍질로 자기 정신을 감싸고, 스스로 연구해 만든 비 새는 움막에서 속세의 비바람으로부터 자기 정신을 지키기를 좋아했다.
육지에 사는 사람들이 경험이니 교육이니 하면서 훌륭한 양복이나 집을 즐기는 것보다 이 편이 더 좋았다. 그는 야만적인 생활, 섬에 혼자 사는 것을 즐기며 아무 것도 받아들이지 않는 생활이 좋았다. 아무 것도 흉내내지 않고, 아무도 믿지 않고, 어떤 것과도 타협하지 않고 - 철저하게 자기 중심적인 것을 기쁘게 생각했던 것이다.
그가 항상 갖고 다니는 물건들도 흔해빠진 오늘날 문명국 사람들의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홀로 고도에 사는 인간의 소지품이라 할 수 있었다. 지금 그의 유일한 소지품은 담배 갑으로 손수 만든 악기인 발라라이카 뿐이다. 이 악기에 맞추어 그는 자기가 작곡한 노래를(아주 불완전한 노래였지만) 불렀다.
그는 자기 노래나 악기가, 직업적인 작곡가나 발라라이카 제작자의 것보다 낫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배워서 안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의 것이라는 점에서 그는 비할 바 없이 그것들을 좋아했다. 만사가 그런 식이었다. 자신이 만든 것보다 남이 만들어 놓은 것을 더 즐기는 것은 그의 취향이 아니었다. 그가 사는 무인도의 수평선에서는 다른 육지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저는 거지가 아닙니다." 콘스탄틴은 말했다. "어제까지는 부대에서 일하면서 쓰라린 생활을 견디며 저축한 60 피아스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제 해질 무렵 여기서 20 베르스따쯤 떨어진 어두운 소나무 숲을 지나오다 그만..."
"도둑 떼를 만나셨겠지..." 화이트 씨가 앞질러 말했다. "다 알고 있어... 당신들 모두가 그렇게 말하더군."
콘스탄틴은 의아스러운 눈초리로 상대방의 얼굴을 보았다. 이른바 무인도의 주민인 그는 인간들이 들끓고 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나라에서 생활하면서 몇 차례나 거짓말을 하다가 꼬리가 잡혀 찔끔한 경험이 있었다. 그러므로 상대가 이렇게 말을 잘라도 놀라지 않았고 - 화도 내지 않았다.
오히려 사냥꾼이 특별히 까다로운 언덕 위 짐승을 보고 기뻐하듯 일순 이 융통성 없는 화이트 씨를 사랑하고 싶은 충동마저 느꼈다. '이 사람은 정말 가까이 해볼 만한 인물'이라고 콘스탄틴은 생각했다. 무인도의 주민으로서 이런 경우 도둑의 얘기 따위는 그만두고 고귀한 독립심도 일단 버리는 것이 좋다는 것을 그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아니, 아닙니다." 콘스탄틴은 말했다. "도적은 만나지 않았습니다. 한 푼 없이 뛰쳐 나왔고 지금도 한 푼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돈을 좀 얻으려고... 여기 온 것도 실은 그것 때문입니다." 그는 말을 끝내고 커다란 코로 만족한 듯이 깊이 숨을 들이 쉬었다. 이것이야말로 나다운 화술이다. 이곳에 먼저 온 외인부대 탈주병들과 자기가 구별되는 점이 바로 이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화이트 씨도 역시 그렇게 생각한 모양이다. 그는 굵은 목소리로 짧게 웃었다. "그렇게 말하는 편이 좋아."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영국인도 이 정도라면 쓸 만해. 영국 놈들 가운데 제일 뛰어난 놈들은 대개 좀 비정상적인데, 이 녀석은 그렇지 않아. 그리고 이 녀석들은 뭔가 비정상적인 사람에게 호감을 갖거든.' 콘스탄틴은 호감을 느끼며 생각했다. "당신이 좋아졌습니다." 그는 큰 소리로 말을 꺼냈다. 그리고 계속했다. "저는 영국인이 좋습니다. 미국인 아닌 영국인에게 이런 부탁을 하게 된 것이 다행입니다. 정말입니다. 미국인은 대개 당신보다 돈이 많지만... 그러나 인색합니다. 나는 미국인을 싫어합니다. 특히 미국 여자의 그 젖은 것 같은 손톱이 마음에 안 들어요."
화이트 씨는 큰 목소리로 말했다. "젖은 것 같은 손톱? 아, 그거... 그 매니큐어 말이군. 그건 그래... 정말 언제나 젖은 것 같은 손톱이지... 핫핫... 맞다. 나는 미처 깨닫지 못했어..."
"물론 그렇지요." 콘스탄틴은 깜짝 놀라 말했다. "그건 내가 발견한 거니까. 당신이 어떻게 그걸 알 수 있겠어요." 그리고 잠시 사이를 두고 그는 덧붙였다. "나는 축음기가 아니에요."
화이트 씨는 콘스탄틴의 말에 약간 기분이 나빴지만 "축음기가 있습니까" 하는 질문을 받은 걸로 여기고 곧 맘을 바꿔 대답했다. "축음기야 물론 가지고 있지. 내 소중한 친구야. 당신은 음악을 좋아하나? 물론 좋아하겠지. 러시아 사람은 거의 대부분 음악을 좋아하니까. 나는 하루라도 쇼팡을 듣지 않으면 쓸쓸해서 견딜 수 없어. 하인들이 당신 먹을 걸 준비하는 동안 음악을 좀 듣는 게 어때?"
"고맙지만 축음기 음악은 듣고 싶지 않습니다. 내가 연주를 해드리지요. 둘도 없는 악기로 둘도 없는 음악을 말입니다."
"그거 참 좋군." 화이트 씨는 안경 너머로 담배 갑 발라라이카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당신은 영어를 굉장히 잘하는군." 화이트 씨는 음악 연주에서 상대방의 생각을 딴 데로 돌리고 싶었던 것이다. "하긴 러시아 사람은 대개 어학의 천재들이야."
"제 음악을 들려 드리겠습니다." 콘스탄틴이 말했다. "그런데 우선 말씀 드립니다만 '러시아 인이니까 음악을 좋아한다'거나 '러시아인은 모두 영어를 잘한다'거나 하는 말은 어쩐지 맘에 들지 않는군요. 나를 많은 사람들 가운데 그저 그런 한 사람으로 보는 것 같아 어쩐지 바보스러운 생각이 드니까요."
"우리는 누구나 여러 사람 중 한 사람일 뿐이야." 화이트 씨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화도 내지 않고 말했다.
"당신은 그럴지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습니다." 콘스탄틴은 말했다. "내 생각이 아닌, 내 영어를 가지고 당신은 이러쿵저러쿵하는 군요. 죄송하지만, 그건 아무래도 내가 말하는 것을 당신이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죠. 생각 없는 축음기 소리를 듣는 것처럼 당신은 내 목소리만 듣고 있는 겁니다."
"그렇지만 당신은 아직 내 축음기 소리를 들어보지도 않았잖아." 화이트 씨는 자기가 아끼는 축음기를 상대가 깔보자 자기도 모르게 울컥 화가 치솟아 콘스탄틴의 말을 가로막았다.
"남의 말소리가 어떻든, 무슨 나라 말을 하건,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쓰는 말은 다 비슷비슷한 겁니다. 그러나 사물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생각하는 당사자 한 사람만의 것입니다."
화이트 씨는 아무려나 맘대로 생각하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았다.
"당신은 대단한 철학자군."
"나에 대해 딱 뭐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콘스탄틴은 막힘없이 말했다. "나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일 뿐입니다. 쇼팡이 좋다느니 어쩌느니 하는 사람은 모두 '당신은 대단한 철학자'라는 따위 말을 좋아하죠."
"이번에는 당신이 나를 도매금으로 넘기는 얘기를 하는군." 화이트 씨는 화를 내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말했다. "당신이 아까 한 얘기는 사람을 함부로 규정하지 말라고 한 뜻이었을텐데."
"세상에는 그렇게 도매금으로 넘기는 얘기를 하는 사람도 있죠." 콘스탄틴이 말했다. "자, 이제부터 내 음악을 들려 드리겠습니다. 그러면 당신이 좋아하는 그런 음악하고는 의미가 다르다는 것을 당신도 알게 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