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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는 마치 술꾼이 포도주를 삼키듯 숨을 길게 들이마시며 대기를 마음껏 호흡하기 시작했다. 그는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황홀하고 놀라워 조카딸의 생각은 거의 잊어버리고 서서히 발길을 옮겼다. 그러다가 문득 신부는 발길을 멈추고 벌판을 둘러보았다. 애무하는 듯한 달빛에 포근히 젖어 있는 들판은 아늑한 이불에 싸인 것처럼 밤의 고요 속에 듬뿍 취해 있었다.
짧지만 날카로운 개구리 울음 소리가 벌판의 공기를 가르고, 멀리 꾀꼬리의 노랫소리가 호응하며 그를 꿈속으로 인도했다. 꾀꼬리의 가늘고 나지막하게 울리는 소리는 듣는 사람을 달빛의 유혹에 빠지게 하는 힘이 있었다.
신부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이제 마음이 한결 진정되는 느낌이었다. 그는 갑자기 맥이 빠지면서 온몸이 나른해졌다. 그냥 그 자리에 주저앉아 언제까지고 깊은 명상에 잠기거나, 주위에 널려있는 하느님의 작품들을 감상하면서 창조주의 능력에 감사하고 싶었다. 굽이치는 작은 개울을 따라, 버드나무가 길게 줄을 지어 이어지고 있었다.
달빛에 흠뻑 젖은 희미한 수증기가 강변을 온통 흰 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은은한 광채를 내는 강둑을 둘러싸고 대기가 잠자는 것처럼 퍼져 있었다. 굽이쳐 흐르는 강물은 솜처럼 가볍고 투명하게 보였다.
그러자 신부의 머릿속에 한 가지 의문, 아니 일종의 막연한 불안감이 떠올랐다. 그것은 지금까지도 가끔 한번씩 신부의 머리를 지배하던 의문의 하나였다. 그리고 그 의문이 지금 머릿속에서 다시 한번 분명하게 고개를 치켜들고 있었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아름다운 밤을 만드셨을까? 단순히 인간을 잠으로 이끌기 위해서일까? 무의식이나 휴식을 통해 인간을 망각으로 이끌기 위해 하나님이 밤을 만드셨다면, 이렇게 낮보다 밤을 더 매혹적으로 만드신 이유가 무엇일까? 또한 아침 햇살이나 저녁노을보다 밤을 더 아늑하고 친밀하게 만드신 이유가 무엇일까?
그리고 태양보다도 더 시적이고 한없이 신비스런 모습을 간직한 저 달은 왜 저 선명한 햇빛으로 밝힐 수 없는 물체들까지도 비춰야 할 운명을 타고 난 것일까? 강렬하고 매혹적인 저 천체는 어찌하여 지옥까지도 밝히는 신비한 광채를 지닌 것일까? 새 가운데서 가장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저 꾀꼬리는 어찌하여 여느 새들과 달리 불안한 어둠 속에서도 끊임없이 노래를 부르는 것일까?
어스름이 이처럼 온세상을 덮어버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슴은 어찌하여 이처럼 설레며 육신은 왜 이리도 권태로운 것일까? 왜 사람들이 잠자리에 들어가 아무도 보지 않을 때에도 자연은 이처럼 견딜 수 없는 유혹을 드러내는 것일까?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 보내는 이 장엄한 풍경, 이렇게도 시적인 감성이 넘쳐흐르는 풍경은 도대체 누구에게 주는 선물일까?
신부는 도무지 이런 의문들에 대해 해답을 얻을 수 없었다.
그때, 목장 저쪽 끝에 촉촉하게 안개에 젖은 무성한 나무 아래로 나란히 서서 걸어오는 두 그림자가 보였다. 키가 훨씬 더 큰 남자가 여자의 목에 가볍게 손을 얹고 이따금 그 이마에 키스를 퍼붓고 있었다. 이 한 쌍의 남녀가 나타나자 적막에 싸여 있던 대자연이 느닷없이 생기를 띠는 것 같았다. 주위의 모든 대자연이 마치 두 사람의 배경이 되기 위하여 하늘이 보내주는 영상인 것처럼 두 사람을 완벽하게 에워싸는 것이었다. 두 그림자는 마치 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한 사람을 위해 이 아늑하고 고요한 밤이 준비된 것 같았다.
그들은 신부 쪽으로 다가왔다. 마치 신부가 품고 있는 의문에 대하여 하나님이 던져주시는 생생한 해답 같았다. 신부는 심장이 뛰고 머리가 어지러워 마치 못 박힌 듯 제 자리에 서 있었다. 마치 성경 속 룻과 보아스의 사랑 이야기(편집자 주 : 구약성경 룻기)를 지금 눈앞에서 보는 것 같았다. 성경이 소개하는 하느님의 위대한 뜻을 눈으로 드러내 보여주는 기가 막힌 예술품이었다. 뜨거운 정열에 대한 찬미의 노랫소리가 그의 머릿속에 호소하는 것 같았다. 사랑에 불타는 육체의 애끓는 목소리가 간절한 시정으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신부는 '하나님이 이러한 밤을 만드신 이유는 아마, 사랑하는 두 남녀를 가장 적당한 베일로 감싸주시기 위해서인가 보다'하고 혼자서 중얼거렸다. 서로 꼭 껴안고 앞으로 다가오는 한 쌍의 연인들 앞에서 그는 한 발짝 옆으로 물러섰다. 그것은 그의 조카딸에 틀림 없었다. 신부는 이제 자기가 그 동안 하느님의 뜻을 어기려고 했던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되었다. 하느님이 이처럼 아름다운 광경을 이 밤에 펼쳐 보이는 것은 바로 남녀의 이러한 사랑을 허락하신다는 뜻 아니겠는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신부는 마치 발을 들여놓을 권리가 없는 성전에 들어서기라도 한 것처럼 당황하고 부끄러워져서 서둘러서 그 자리를 피해야 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