락웰 청년은 한숨을 내쉬었다.

"실은 바로 이 얘기를 하고 싶었다."

노인은 아들에게 말을 계속했다.

"너를 불러들인 것도 이것 때문이란다. 너 요즘 무슨 고민이 있는 거 아니냐? 벌써 두 주일이나 안절부절하는 모습이더구나, 문제가 있으면 털어놓고 애비에게 말해보렴. 난 24 시간 안에 부동산을 팔지 않고도 1,100만 달러를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다. 만약 너한테 무슨 고민거리가 있다면, 램블라 호가 석탄을 싣고 이틀 후면 바하마제도로 떠날 수도 있다는 걸 기억해둬라."

"아버지 짐작이 사실 어느 정도 맞췄어요."

"암, 그렇겠지."

영감은 얼른 아들의 말을 받았다.

"그래, 그 여자의 이름은 뭐냐?"

락웰 청년은 이제 서재를 이리저리 불안하게 거닐기 시작했다. 이 무뚝뚝한 노인이 보여준 사랑과 관심이 아들의 신뢰를 얻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그런데 너는 왜 그 여자에게 청혼을 하지 않는 거니? 그 여자는 기꺼이 네 품에 뛰어들 텐데 말이야. 넌 돈도 많고 인물도 좋은데다, 신사답지 않으냐? 게다가 넌 어느 모로 보나 신선한 분위기란다. 유리카 비누 냄새가 아직은 풍기지 않는단 말이야. 넌 대학도 나오지 않았느냐? 아마 그 여잔 이런 걸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모양이구나."

"전 아직 청혼할 기회조차 잡지 못했어요."

락웰 청년은 말했다.

"기회는 자기가 만들어야 하는 거란다."

노인이 대꾸했다.

"공원을 함께 산책하거나, 차를 타고 시골로 가거나 아니면 교회에서 돌아오는 길에 바래다 준다고 하거나 그럼 되잖니. 기회가 없다니, 말이 안 되지."

"아버지는 사교계라는 물레방아를 모르고 계셔요. 사실 그 여자는 그 물레방아를 돌리는 물의 일부나 마찬가지에요. 그 여자의 일정은 제가 끼어들기 어렵게 빈틈없이 약속이 잡혀 있으니까요. 아버지, 저는 꼭 그 여자와 결혼하고 싶어요. 그렇지 못하면 제가 사는 이 거리는 저에게 영원히 시커먼 신갈나무로 뒤덮인 진창이나 마찬가지일 거에요. 그렇다고 고백하는 편지를 보낼 수도 없어요. 그런 짓은 차마 못하겠어요."

"참 딱하기도 하다."

노인은 말을 계속했다.

"내 돈이 다 네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그래 그런 여자애에게서 한두 시간도 얻어내지 못한단 말이냐?"

"저는 사실 너무 늑장을 부린 셈이에요. 그녀는 앞으로 2년 동안 머물 예정으로 내일 모레 배를 타고 유럽으로 떠납니다. 저는 내일 밤 겨우 몇 분 동안 둘이서 만나기로 했어요. 그녀는 지금 리치먼드의 숙모 댁에 가 있어요. 제가 그리로 찾아갈 수는 없어요. 하지만 그녀가 내일 밤 8시 반 기차로 여기 오면 제가 마차를 가지고 마중하러 정거장에 나가기로 했어요.

거기에서 그녀와 함께 윌랙 극장까지 가야 하기 때문에 브로드웨이 거리를 마차로 달릴 계획이죠. 그녀의 어머니와 일행이 극장 로비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구요. 겨우 주어진 6,7분 동안 엄청나게 바쁘게 돌아다녀야 하는데, 그 여자가 저의 고백에 귀를 기울일 것이라고 보세요?

마찬기지로, 연극이 끝난 뒤에 무슨 기회가 있겠어요? 불가능한 얘기에요. 아버지, 이거야 말로 아버지 돈으로 풀 수 없는 매듭 가운데 하나에요. 돈으로는 단 1분도 살 수 없어요. 만약 돈으로 시간을 살 수 있다면 이 세상 부자들은 한 사람도 죽지 않았을 거에요. 그녀가 유럽행 배로 떠나기 전까지 청혼할 만한 시간을 만들 수 없어요."

"얘야, 너무 걱정마라."

노인은 어딘지 장담하듯이 말했다.

"넌 클럽에라도 가 있으렴. 그렇지만 때로는 위대한 재물의 신 머큐리를 위해 신전에 찾아가 푸닥거리라도 할 필요가 있단다. 넌 돈으로 시간을 살 수 없다고 했지. 물론 우리가 돈으로 시간을 사서 우리 집으로 배달해 달라고 할 수 는 없겠지. 하지만 나는 시간을 지배하는 신이 금광을 찾아 돌아다니다가 발꿈치에 꽤 큰 상처가 생긴 걸 본 적이 있단다."


3. 반지가 주는 사랑의 행운

그날 밤에 상냥하고 감상적인 그러나 재산에 눌려 지겨워하는 엘렌 고모가 집에 찾아왔다. 앤서니 노인은 마침 석간 신문을 펴들고 읽고 있었다. 오누이는 락웰 청년이 안고 있는 고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애는 나한테 자기 고민을 다 털어놨단다."

노인은 하품을 하며 말했다.

"난 내 은행 예금을 그 애를 위해 모두 쓰겠다고 말했지. 하지만 그 애는 돈에 대하여 마구 공격을 퍼붓더구나. 돈 같은 건 사실상 쓸모가 없다는 둥, 사교계의 규율은 백만장자 열 사람이 힘을 합쳐도 전혀 바꿀 수 없다는 둥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여대더구나."

"그렇긴 해요, 오빠."

엘렌 고모는 한숨을 내쉬었다.

"오빠는 돈을 과대평가하는 것 같아요. 진정한 사랑에 있어서 재물이란 아무 소용도 없답니다. 사랑이란 이 세상 무엇보다 강한 거니까요. 그 애가 그 얘기를 좀 더 일찍 했더라면 좋았을 걸. 그 여자가 리처드를 마다고 할 리야 없었겠지요. 하지만 이젠 너무 늦은 것 같아요. 그 애는 여자에게 고백할 기회가 없을 거예요. 오라버니의 전 재산을 갖고도 그 애의 행복을 사줄 수는 없으니까요."

이튿날 저녁 8시 쯤 엘렌 고모는 낡은 상자 속에서 골동품 같은 금가락지를 하나 꺼내 리처드에게 주며 말했다.

"애야, 오늘 밤에 이걸 끼고 가렴. 네 엄마가 나에게 주신 거란다. 네 어머니 말에 의하면 이 반지가 사랑의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하더구나. 그래서 네가 사랑하는 사람을 찾았을 때 너에게 전해주라고 나한테 맡긴 거란다."

락웰 청년은 엄숙한 얼굴로 반지를 받아 자기 새끼손가락에 끼려고 했다. 하지만 반지는 손가락의 두 번째 마디까지 들어가고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반지를 다시 빼서 남성의 예법에 따라 조끼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전화로 자기 마차를 불렀다.

8시 32분에 락웰 청년은 정거장의 시끄러운 군중들 사이에서 렌트리 양을 찾아냈다.

"어머니 일행을 기다리게 해서는 안돼요!"

그녀는 말했다.

"윌랙 극장까지 최대한 빨리 마차를 몰아요!"

리처드는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마부에게 지시했다.

그들은 브로드웨이에 이르는 42번가를 쏜살같이 지나, 아침 해가 솟아 오른 산등성이를 지나가는 것처럼 브로드웨이의 불빛 환한 길거리를 달렸다. 리처드는 34번가에서 갑자기 창문을 열고 마부에게 멈춰서라고 말했다.

"제 반지를 떨어뜨렸어요."

그는 마차에서 내리며 말했다.

"그 반지는 어머니께서 남겨주신 것이라 잃어버리면 안 됩니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어디서 떨어뜨렸는지 알고 있으니까요."

그는 1분도 안 되어 반지를 가지고 마차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 1분 사이에 전차 한 대가 바로 마차 옆에 멈춰섰다. 마부는 왼쪽으로 빠져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커다란 우편 화물차가 앞을 가로막았다. 오른쪽으로 나가려고 하자, 가구를 실은 화물차가 갑자기 앞질러 나오는 바람에 오히려 뒤로 물러서야 했다. 마부는 말고삐를 떨구며 화를 냈다. 그는 어느새 많은 차량과 말들이 엉킨 혼란 한가운데 갇히고 말았다.

이 대도시에서는 가끔 이런 일이 일어나곤 했다. 그리하여 군중과 차량의 통행을 막아버리는 큰 혼잡이 빚어지곤 했던 것이다.

"왜 마차가 움직이지 않죠?"

렌트리 양이 초조한 목소리로 외쳤다.

"잘못하면 늦겠어요."

리처드는 마차에서 일어나 주위를 살펴보았다. 브로드웨이 6번가와 34번가 교차로가 대형 짐마차, 트럭, 전차 등으로 꽉 막힌 상태였다. 게다가 옆길에서 수레들이 전 속력으로 이 교차로를 향해 달려와, 붐비는 군중과 엉켜 있는 차량들 사이를 뚫고 지나가려고 했다. 거리는 차량의 운전수들이 외치는 아우성으로 갈수록 혼란이 심해지고 있었다. 맨해튼의 모든 교통기관이 여기 와서 뒤엉겨버린 것 같았다. 길에 죽 늘어선 수천 명의 구경꾼들은 원래 교통이 혼잡한 뉴욕에서도 이렇게 심한 교통 혼잡은 과거에 보지 못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