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시는 일단 눈을 감더니 말했다. 그 모습은 마치 쓰러진 조각상처럼 창백했다.
"난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는 걸 보고싶어. 이제 그걸 기다리는 것도 힘들어. 내가 그 동안 매달려왔던 것에서 손을 떼고 싶어. 그리고 어딘지 모르지만 하염없이 떨어져 가고 싶어. 철 지난 저 처량한 잎새처럼 말이야."
"우선 좀 자는 게 좋겠어."
수우는 말했다.
"난 베어맨 할아버지한테 늙은 광부 모델이 돼 달라고 해야겠어. 금방 돌아올 거야. 그러니까 내가 올 때까지는 꼼짝도 말고 있어야 해."
베어맨은 같은 건물 1층에 사는 화가였다. 나이가 예순이 넘은 노인이었다. 몸뚱이는 도깨비 같고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사튀르 같은 머리에다 미켈란젤로의 대리석 모세 상 같은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그는 사실 예술의 낙오자였다. 지난 40년 동안 계속 붓을 쥐고 있었으나 아직도 예술의 여신(女神)의 치맛자락도 붙잡지 못한 처지였다. 늘 걸작을 그린다고 장담을 하면서도 정작 그 걸작을 그리는 작업에는 손도 대지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최근 몇 년 동안에는 상업용 도안이나 광고 그림밖에는 전혀 그린 게 없었다.
그는 직업적인 모델을 둘만한 여유가 없는 이 예술인 마을의 풋내기 화가들을 위해 모델 노릇을 하여 몇 푼 안 되는 돈을 벌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진을 자꾸 들이키면서 미래 어느 땐가는 걸작을 그릴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그림은 보잘 것 없고, 몸집도 작았지만 그는 사기 충만한 노인네였다. 그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약해 빠졌냐며 비웃곤 했다. 그러면서 스스로 3층에 있는 두 젊은 여성 예술가의 수호신 역할을 떠맡고 있었다.
수우는 아래층에 내려가 베어맨 노인을 찾았다. 노인은 어둑어둑한 지하실에서 노간주 나무 열매(진의 원료) 냄새를 풀풀 풍기며 뒹굴고 있었다. 한쪽 구석에는 아무 것도 그리지 않고 텅 빈 캔버스가 이젤에 걸려 있었다. 그의 걸작을 그릴 붓이 닿기를 무려 25년간이나 기다려 온 캔버스였다.
수우는 베어맨 노인에게 존시 얘기를 들려줬다. 담쟁이 잎새가 다 떨어지면 자기도 죽는다는 환상을 갖고 있는 존시가 저러다가 정말 생명을 지탱하는 힘이 약해져서 가벼운 담쟁이 잎새처럼 허공으로 날아갈까봐 두렵다는 것이었다.
벌겋게 술에 취한 베어맨 노인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늙은이는 존시의 어리석은 망상에 대해 고함을 질러가며 나무랐다.
"멍청한 소리!"
그는 고함을 질렀다.
"담쟁이 잎새가 다 떨어지면 자기도 죽는다 그 말이야? 세상에 그런 멍청이가 어디 있담? 생전에 그런 얘기는 금시초문이야. 그런데 나더러 다 망가진 늙은 광부 모델을 해달라고? 왜 하필이면 그런 모델이야? 난 딱 질색이야. 그런데 도대체 존시 양은 왜 그따위 생각을 하는 거야?"
"걔는 지금 몸도 너무 아프고 약해져 있어요."
수우는 말했다.
"열이 높으니까 기분이 이상해지고 자꾸 환상 같은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베어맨 할아버지, 모델이 되기가 싫으면 관두세요. 상관없어요. 하지만 할아버지는 정말- 늙은 변덕장이라구요."
"여자라는 건 정말 어쩔 수 없는 것들이라니까!"
베어맨 노인은 더 큰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내가 언제 모델을 하지 않겠다고 그랬어? 먼저 올라가, 나도 곧 따라갈 테니까. 난 반 시간 전부터 모델이 되겠다고 말할 생각이었어. 글쎄 말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여기는 존시 같은 순해빠진 아가씨가 병이 나서 누워 있을 곳이 아니야. 나도 이제 곧 걸작을 그릴 거야. 그러면 우리 모두 이 동네를 빠져나가자구. 정말이야! 정말이구말구."
두 사람이 위로 올라가 보니까 존시는 이미 잠이 들어 있었다. 수우는 커튼을 밑으로 내리고, 베어맨 노인에게 옆방으로 가자고 손짓했다. 두 사람은 거기서 두려운 심정으로 창 밖의 담쟁이덩굴을 바라보았다. 담쟁이 덩굴은 이제 정말 잎새가 몇 개 남지 않았다.
잠시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계속해서 내리는 비에는 어느덧 눈보라까지 섞여 있었다. 베어맨 노인은 낡아빠진 파란 셔츠를 입고 뒤집어 놓은 남비 위에 걸터앉아 바위에 앉은 늙은 광부의 포즈를 취했다.
수우는 겨우 한 시간쯤 자고서 눈을 떴다. 벌써 아침이었다. 존시가 퀭한 눈을 크게 뜨고 초록색 커튼을 바라보고 있었다.
"커튼을 올려줘. 밖을 보고 싶어!"
존시가 마치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부탁했다.
수우는 어쩔 수 없이 그 말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어떻게 된 것일까? 벽돌 담벼락에는 담쟁이덩굴의 잎새 하나가 떨어지지 않고 여전히 달라붙어 있었다. 기나긴 밤사이에 사나운 비바람이 그렇게 거세게 휘몰아쳤는데도 말이다. 그것은 덩굴에 달린 마지막 잎새였다. 잎새 아래쪽은 아직 어두운 초록색이 남아 있고 가장자리는 시들어가는 노란 색이었다. 하지만 그 마지막 잎새는 땅에서 20피트쯤 뻗어간 줄기에 굳세게 매달려 있었다.
마지막 잎새 - 3. 굳세게 남아 있는 잎새 하나
- 세부
- 주동식에 의해 작성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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