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고향에 내려갔다가 어머니가 해주신 맑은 조깃국을 먹은 적이 있었다. 내가 이런 음식을 어릴 적에 먹은 적이 있었던가? 아니, 기억에 없었다. 고춧가루를 전혀 쓰지 않고 그냥 몇 가지 야채만으로 맛을 낸 맑은 국물이었다. 조기의 살과 야채, 국물이 왜 그리도 정갈한 맛을 내는지... 그 조깃국을 맛본 이후에는 서울 음식점들에서 파는 생선 매운탕의 그 맵고 진한 양념들은 모두 생선 신선도의 약점을 덮어주는 기능으로 느껴지곤 했다.


사람들이 즐겨 먹는 음식도 변하고, 입맛도 변하는 것이 당연하다. 모르긴 해도 종합적인 견지에서 따지면 내가 진한 그리움으로 기억하는 어릴적 음식보다, 지금 심드렁하게 먹는둥 마는둥하는 음식들이 맛이나 영양이나 모든 점에서 더 우월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음식의 전통이 맵고 짜고 자극적인 맛으로만 점철돼 왔다는 인식에는 거부감을 느낀다. 내가 기억하는 그다지 멀지 않은 과거만 따져도 그건 아니었다.


내가 라면맛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는 것도 아마 내 기억 속 맛의 원형과 가장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맛의 코드를 라면이 갖고 있기 때문이란 생각을 해본다. 나는 그런 라면 맛이 싫다. 내 어린 시절 이후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겪어오고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만 했던 그 온갖 맵고 짜고 자극적인 삶의 방식이 라면 맛에 압축돼있기 때문이다. 이제 제발 좀 담백해져야 하는 것 아닐까?


내가 꼬꼬면을 사서 먹어보고 싶었던 것에는 아마 이런 내 컴플렉스가 있었던 것 같다. 맑은 닭고기 국물이라면 어쩌면 나도 라면 맛과 화해할 수 있으리라는 그런 기대가 숨어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딱 한번 꼬꼬면을 사려했던 내 시도가 무산된 후 나는 다시 생각을 고쳐먹었다. 아니, 앞으로도 나는 꼬꼬면을 먹지 않으련다. 그 얄팍한 화해를 위해 그나마 별로 많은 사람들에게 남아 있지도 않은 내 어린 시절 음식의 기억을 뭉테기로 잘라내주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아마 사람에게는 영원히 만날 수 없는 존재들도 있는 것 같다. 우리는 그걸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그러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것의 다른 이름은 어쩌면 '운명'일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