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께까지 다 와서 축동 앞 다박솔 밑에 가 주먹으로 턱을 고이고 앉아서 한참 동안이나 으스름한 달빛을 우러러보다가 '달무리를 하니 이제는 비가 좀 오려나?' 하고 일어섰다.

제 그림자를 길다랗게 끌며 집으로 돌아오자니, 간담회 석상에서 처음 만났던 때와 악박골서 둘이 함께 밝히던 정열과 감격에 끓어 넘치던 그날 밤의 모든 정경이 바로 어제런 듯 머리 속에 떠오른다. 그는 영신이가 보고 싶었다. 불현듯이 보고 싶었다. 이틀 동안을 기다리기가 한 이태나 되는 듯이…

“이게 무슨 소리야!”

밤중에 동혁은 별안간 이불을 걷어차며 일어났다.

몸이 실실이 풀리는 듯 피곤해서, 턱 쓰러지기만 하면 금방 잠이 들 것 같건만 영신을 만날 생각과 시골은 도회지와 달라, 남의 일에도 말썽이 많은데 미혼 처녀가 늙은 총각을 찾아오면, 근처 청년의 지도자로 신망을 한 몸에 모으고, 모든 일에 몸소 모범이 되어야 할 처지에 있는 저로서, 일동 일정에 주목을 받을 터이니, 그것도 적지 아니 거북한 노릇이다.

생각이 옥신각신하다가 잠이 어렴폿하게 들었건만 강제로 마취를 당한 듯도 하고 꺼져가는 등잔불처럼 의식이 꿈벅꿈벅하는 판인데, 뜻밖에 이상한 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그저 저녁도 안 먹고 자는 동화의 거치른 숨소리에 섞여, 누에가 뽕잎을 써는 것처럼 부시럭부시럭 하는 소리가 간간이 머리맡에서 들렸다. 처음에는 '이게 무슨 소릴까?' 하고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들창 앞으로 다가앉으며 창밖으로 귀를 기울였다. 이번에는,

“뚜, 뚜, 후두둑 후두둑”

개초를 그저 못해서 뒤꼍 헛간에 묶어서 세워 놓은 짚단과 수수깡 사이에서, 잊어버릴 만큼이나 오랫동안 듣지 못하던 소리가 점점 크게 점점 똑똑하게 잦은 가락으로 들린다.

바람이 일어 청솔가지로 둘러싼 산울을 우수수우수수 흔들다가 덧문 창호지에 굵은 모래를 끼얹는 듯이 휘뿌리는 것은 틀림없는 빗소리가 아닌가.

“오오, 빗소리!”

동혁은 덧문을 밀쳤다. 습기를 축축히 머금은 밤바람이 방안으로 휘몰아들자, 자던 얼굴에 방울방울 부딪치는 찬 빗방울의 감촉! 동혁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얘 동화야, 비가 온다. 비가 와!”

형은 반가운 김에 아우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동화는,

“응?”

하고 깜짝 놀라 일어나서, 두 주먹으로 눈등을 비비더니,

“아, 정말 비가 오우?”

하고 바깥을 내다본다. 시꺼먼 구름이 잔뜩 끼어, 별 하나 찾을 수 없는 하늘을 쳐다보다가,

“제엔장, 이제야 온담.”

하고 볼멘 소리를 하고는, 목소리를 낮추어,

“나 아까 주정했수?”

하고 형의 얼굴을 바로 쳐다 보지를 못한다.

형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어서 더 자거라. 이담버텀 챙기면 고만이지… 다 형의 잘못이다.”

하고 문을 닫는다. 그러다가 아우가 엎드리며 머리맡을 더듬으니까, 얼핏 자리끼 사발을 집어서 입에 대어 준다. 동화는 한창 조갈이 심하게 나던 판이라, 목을 늘이고 숭늉 한 사발을 벌떡벌떡 들이키고는 다시 쓰러진다.

비가 제법 장마 때처럼 주룩주룩 쏟아지기 시작한다. 동혁은 일종의 신비감을 느끼어 노래라도 한마디 부르고 싶었다. 십 년만에 만나는 친구의 음성인들 이 빗소리보다 더 반가우랴.

흉년이 들겠다고 벌써부터 쌀금 보릿금이 오르고, 초목의 새싹이 지지리 타들어 가도록 온갖 생물이 목말라 하던 대지 위에 뚝뚝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와 그 비를 휘몰고 들어오는 선들바람의 교향악 그것은 오직 하늘의 처분만 바라고 사는 농민의 귀에라야 각별히 반갑게 들리는 소리다.


안방에서는 늙은 양주도 잠이 깨었는지 이야기하는 소리가 두런두런한다.

동혁은 창 밖으로 팔을 내밀고 천금을 주고도 그 한 방울 살 수 없는 생명수를 손바닥에 받아 본다. 자리옷을 활활 벗어버리고 뛰어 나가서, 그 비에 온 몸을 고루 적시다가 땅 위에 디굴디굴 구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동혁은 아우가 감기가 들까 보아 다시 문을 닫았다. 바람은 파도 소리처럼 쏴아 쏴아하고 머리맡에서 뒤설렌다. 논배미마다 단물이 흥건히 고이고, 보리밭 원두밭이 시꺼매지도록 빗물이 흠씬 배어들어 갈 것을 상상하면서도 '이 우중에 영신이가 어떻게 오나. 내일까지만 실컷 오고 말았으면…' 하다가 스르르 잠이 들었다.

이튿날도 비는 끊임없이 왔다. 동혁은 도롱이를 쓰고 살포를 짚고 나가서, 논의 물꼬를 보고 들어왔다. 점심 뒤에는 신문지를 말끔 몰아가지고 집에서 한 삼마장이나 되는 바닷가로 나왔다.

해변에서 새우를 잡아 말리고, 준치나 숭어를 잡는 철이 되면, 막살이를 나오는 술장수에게 빌려주는 오막살이 방 한 간을 빌렸다.

아들은 젓잡이를 하러 나가고, 늙은 마누라와 며느리만 집을 지키고 있어서 대낮에도 노 젖는 소리와 간간이 뱃노래 소리밖에는 들리는 것이 없어 여간 조용하지가 않다.

동혁은 주인 마누라에게 풀을 쑤어 달래서 신문지로 흙방을 바르고 기직을 구해다가 방바닥에 깔고 하느라고 비에 젖은 하루해를 보냈다.

“어떤 손님이 오시길래 이렇게 손수 방치장을 하우? 그만하면 신방두 꾸미겠네.”

하고 주인 마누라는 안질이 나서 진무른 눈을 꿈적이며 두 번 세 번 묻는다. 동혁은,

“오는 사람을 보면 알걸, 뭐 그렇게 궁금하우.”

하고는 손님이 묵고 있는 동안, 밥까지 지어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집에는 거처할 방도 없거니와, 거의 하루 한번은 입버릇처럼 장가를 들라고 성화를 하는 부모가 어떻게 알는지도 몰라서 일테면 사처를 잡은 것이다.

저녁 뒤에 동혁은, 가장 무관하게 지내고도 영신을 오래 소개해온 건배와 정득이, 갑산이, 칠룡이 같은 농우회원을 찾아다니며 채영신이가 내일 아침에 온다는 소식을 전하였다. 동혁은 단독으로 영신을 맞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건배는,

“흥, 이제야 자네가 몽달귀신을 면하나 보이, 앞으로 다섯 해 안에는 결혼을 안 한다구 장담을 하더니, 하는 수 있나, 지남철 기운에 끌려오는 걸.”

하고 연방 동혁을 놀려댄다. 동혁은 변색을 하며,

“여보게 그게 무슨 가당치 않은 소린가. 아예 그런 말은 입 밖에두 내지 말게. 동지와 애인을 구별 못하는 낸 줄 아나?”

하고 건배의 험구를 틀어막았다.

이튿날은 이슬 같은 보슬비로 변하였다. 앞 논과 뒷개울에는 개구리가 제철을 만난 듯이 운다. 밤새도록 울고도 그칠 줄을 몰라서, 대합조개 껍질을 마구 비비는 듯이 와글와글하는 소리가 시끄러울 지경이다.

이른 아침 동혁은 찢어진 지우산을 숙여 쓰고 큰 덕미로 갔다. 쇠대갈산 등성이 위에 올라 머리를 드니, 구름과 안개가 싸인 바다가 눈앞에 훤하게 터진다. 무엇에 짓눌렸던 가슴이 두 쪽에 쩍 뻐개지는 것 같은 통쾌감과 함께, 동혁은 앞으로 안기는 시원한 바람을 폐량껏 들이 마셨다가 후우하고 토해 내고는 휘파람을 불며 불며 나루께로 내려갔다.